세계 정치 지도자들과 경제계 고위 인사들이 모이는 세계경제포럼(WEF)이 올해는 '반쪽짜리' 행사에 그칠 전망이다. 미국·중국·영국·프랑스 국가 정상이 모두 불참하며 포럼의 무게감이 확 떨어졌기 때문이다. 미·중 무역 전쟁,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따른 혼란, 포퓰리즘 득세 등 글로벌 이슈를 놓고 머리를 맞대야 할 주인공들이 대거 불참하기로 한 것이다. 세계경제포럼은 1971년부터 매년 1월 말을 전후해 스위스 휴양 도시 다보스에서 열리며, 흔히 '다보스 포럼'으로 불린다. 올해는 22일부터 나흘간 열릴 예정이다.
이번 다보스 포럼에서는 미국 정부 고위 인사를 볼 수 없다. 15일 백악관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다보스 포럼 참석을 취소한다고 밝혔다. 예산안을 둘러싼 여야 대치로 시작된 연방정부 셧다운(일시 업무 정지)이 장기화되면서 이를 수습하기 위해 못 가겠다는 것이다. 미국 언론은 "트럼프가 (셧다운으로) 스위스에 가기 위해 필요한 출장비를 쓸 수도 없는 상태"라고 했다. 백악관은 스티븐 므누신 재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등 핵심 부처 장관으로 구성된 정부 대표단은 그대로 파견한다고 했지만, 이틀 뒤인 17일 이마저도 취소했다.
EU와의 브렉시트 합의안이 의회에서 부결돼 정치적 미래가 불투명한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도 불참을 선언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역시 석 달째에 접어든 '노란 조끼' 시위를 무마하기 위해 전국을 돌며 '사회적 대토론'을 벌이느라 참석을 취소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일찌감치 참석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화웨이 사태로 중국과 외교 마찰을 빚고 있는 캐나다의 쥐스탱 트뤼도 총리도 불참을 선언했다.
이 같은 무더기 '노쇼(no show)'로 인해 다보스 포럼은 시작하기도 전에 김이 빠졌다. 영국 CMC마켓의 마이클 휴슨 수석 애널리스트는 AP에 올해 다보스 포럼이 '아무것도 아닌 것의 총합(the sum total of diddly squat)'으로 전락했다고 평가했다.
예년엔 달랐다. 지난해 트럼프 대통령이 장관만 7명이 따라붙는 매머드급 사절단을 이끌고 나타나 메이 총리 등 4국 정상과 릴레이식 정상회담을 가졌다. 2년 전 행사에선 시진핑 주석이 중국 국가 주석으로는 처음으로 참석해 개막 연설을 했다. 올해는 서방 주요 7국 중 독일, 일본, 이탈리아 정상만 참석하고, 기조연설은 극우 지도자인 자이르 보우소나루 브라질 대통령이 하게 된다.
그간 다보스 포럼은 세계를 이끄는 주요 인사들의 '고급 살롱'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세계화와 자유무역 등 다보스 포럼의 지향점이 미·중 무역 전쟁, 브렉시트 등으로 위협받는 상황에서 포럼의 위상이 급락했다. 세계 주요 언론은 국가 간 연대를 훼손하는 당면 과제를 해결하는 데 다보스 포럼이 별 도움이 못 된다고 분석하고 있다.
하버드대 케네디스쿨의 폴 시어드 연구원은 "과거에는 세계화로 이득을 보는 이들만 메가폰을 들고 있었고 패자들은 조용했다"며 "하지만 이제는 패자들이 투표로 목소리를 내면서 상황이 바뀌고 있다"고 진단했다. CNN은 "주요국 정상이 한꺼번에 불참한 것은 세계가 위기 상황에 빠졌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했다.
올해 다보스 포럼 주제가 '세계화 4.0: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새 구조 만들기'이지만 논의가 공허할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미국의 경제 매체 CNBC는 "사람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은 미·중 무역 전쟁과 브렉시트로 인한 글로벌 경제의 침체지만 다보스 포럼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어려운 실정"이고 했다. 다보스 포럼을 주관하는 세계경제포럼의 클라우스 슈바프 회장은 "경기 침체를 둘러싼 두려움이 포퓰리즘의 먹이가 되고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