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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호,군자리골프장 스토리[JTBC골프매거진]

조회수 2018. 8. 15.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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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군자리 골프장 복구를 급히 지시한 사연이 있다. 주한미군 장성들이 "한국에 골프장이 없어 오키나와로 간다"는 말을 듣고 안보를 걱정해 나온 것이었다.
군자리 골프장이 처음 만들어진 건 일제강점기였다. 1927년 영친왕이 왕가 소유의 땅 30만 평과 건설비를 하사하면서 지어졌다. [게티이미지]

대한민국 남녀 골퍼들이 세계 무대 정상을 호령하는 시대다. 그러나 오늘날 훌륭한 선수들이 배출되기까지 그 원류를 따라 올라가면 ‘골프장’이 하나 나온다. 대한민국 최초의 골프장, 바로 군자리 골프장이다.

군자리 골프장이 처음 만들어진 건 일제강점기였다. 1927년 영친왕이 왕가 소유의 땅 30만 평과 건설비를 하사하면서 지어졌다. 기록에 따르면 영친왕은 완성된 골프장에서 라운드를 자주 즐겼을 정도로 골프를 매우 좋아했다. 왕이 골프장 건설을 위해 하사한 땅은 왕실의 말과 양을 키우던 곳이었는데, 당시 행정구역으로는 경기도 고양시 뚝도면 군자리였다. 지금은 어린이대공원이 있는 서울 능동이다. 1929년 6월 완공된 골프장의 이름은 경성골프클럽. 당시 지명에 따라 군자리 코스로 더 친숙하게 불렸다. 군자리는 1949년 서울시로 편입됐다.

파란만장한 군자리 골프장의 역사

처음 개장한 군자리 골프장에서는 주로 영친왕을 비롯한 왕가 사람들이 골프를 즐겼다. 그러나 오래가진 못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골프장은 운영이 중단됐고 농경지로 변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이 1949년 군자리 골프장 복원을 지시한다. 그 이유는 ‘국가 안보’였다. 한국 프로골프 초창기 스타인 한장성은 자신의 회고록 <군자리에서 오거스타까지>에서 이와 관련한 내용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부수립 1주년 기념 축하연에 모인 미군 장성들에게 “휴일을 어떻게 보내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이들은 “한국에는 골프 코스가 없어서 휴일이면 군용기를 타고 일본 오키나와로 가서 골프를 한다”고 답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순용 외자관리청장을 즉시 불러 조속한 시일 내에 골프장을 건설하라고 지시한다. 유사시 주한미군 고위 장교가 오키나와에 골프를 하러 갔다가 복귀가 늦어질 경우 국토방위에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는 게 그 이유였다. 정부는 검토 후에 군자리 골프장을 복구하기로 한다.

과정이 간단하지는 않았다. 이미 군자리 골프장 자리는 농경지로 변한 지 오래였고, 그 자리에서 농사를 짓던 소작농들이 골프장 건설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국회에서도 굳이 골프장 복구를 강행해야 하냐며 문제 제기를 했다.

우여곡절 끝에 군자리 골프장은 1950년 5월 공사를 마치고 다시 문을 열었지만, 한 달 여 만에 6·25가 발발하면서 다시 폐허로 변했다.

휴전 후 군자리 골프장은 기어이 다시 문을 열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이순용이 군자리 골프장 복구 책임을 맡아 1953년 11월 사단법인 서울컨트리구락부가 창설됐다. 군자리 골프 코스 운영을 맡게 될 단체였다. 이순용은 열정적으로 골프장을 복원했고, 단순히 골프장만 지은 게 아니라 선수를 키워내는 양성자 과정까지 만들었다.

1954년, 18홀 6750야드로 복구된 골프장은 서울컨트리클럽이 운영을 맡으면서 이후 서울컨트리클럽으로 불렸다. 서울컨트리클럽에서 직접 라운드를 즐긴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골프사랑이 남달랐던 박정희 대통령은 평소 군인들에게 “여가 시간에 골프를 하라”고 권할 정도로 골프를 좋아했고 ‘골프 전도사’ 역할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골프 애호가 박정희 대통령의 손에 군자리 골프장의 역사가 막을 내리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2년 골프장을 없애고 그 자리에 어린이대공원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차세대 주역인 어린이들이 마음껏 뛰어 놀 수 있는 꿈동산을 만든다’는 게 그 명분이었다. 일설에는 평소 어린이대공원 설립을 꿈꿨던 육영수 여사가 골프장 부지를 미리 점찍어 두고 박정희 대통령을 졸라서 성사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다른 설도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컨트리클럽에서 라운드를 자주 했는데, 개장 때만 해도 골프장이 서울 외곽의 한산한 지역이었지만 1960년대 말이 되면서 점점 서울이 개발돼 골프장 주변에 집과 건물이 많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때문에 라운드를 하는 대통령의 경호가 쉽지 않아졌다며 경호실에서 문제 제기를 했다는 설이다. 결국 군자리 골프장은 1954년 서울컨트리클럽으로 제대로 복구된 이후 18년 만에 완전히 역사에서 사라졌다.

골프장이 스타를 키웠다


군자리 골프장에서 골프 인생의 꽃을 피운 한장상.[사진 KPGA]

군자리 골프장은 그 파란만장했던 역사 이야기 이상으로 ‘스타’를 키워낸 산실이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한국 남자골프의 첫 스타라고 할 수 있는 연덕춘, 한장상은 모두 군자리 골프장 때문에 골프를 시작했다. 연덕춘은 1916년 뚝섬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이곳에 화재가 나면서 연덕춘의 가족은 군자리 골프장과 가까운 화양리로 이사한다. 연덕춘은 소학교 시절 군자리 코스에서 캐디 마스터실 보조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골프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탄탄하게 다진 골프 실력을 바탕으로 일본 후지사와CC에서 골프 수업을 받아 일본 프로 자격을 획득했고, 1941년 한국인 골퍼로는 최초로 일본오픈에서 우승한다. 귀국 후 경성골프클럽(군자리 골프장)의 전속 프로를 맡게 된다. 연덕춘은 1950년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로 코스를 복구할 때 직접 코스 설계를 맡기도 했다.

한편 1938년생인 한장상은 일제강점기부터 6·25 전쟁 때까지 어린 시절 내내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전국을 떠돌며 살았다. 그러던 그의 가족이 전쟁 후 정착한 곳이 서울 화양동이다. 한장상의 집은 군자리 골프장이 내려 보이던 곳에 있었고, 그 역시 골프장 캐디로 골프에 입문한 후 서울컨트리클럽의 양성자 과정을 통해 실력을 키웠다. 한장상은 1958년 서울컨트리클럽에서 열린 제1회 한국프로골프선수권부터 참가를 시작해 이 대회에만 총 50회 출전했다. 대회 첫 우승은 1960년 제3회 대회에서 기록했다. 한장상은 1972년 일본오픈에서 우승하면서 연덕춘 이후 31년 만에 한국인으로서 우승했고, 같은 해 한국오픈까지 휩쓸며 양국 내셔널타이틀을 한 해에 모두 가져가는 기념비적인 기록을 남겼다. 또한 그는 일본오픈 우승자 자격으로 한국인 최초로 마스터스에 참가했다.

처음 군자리 골프장이 만들어진 1920년대, 당시에도 골프는 서민들의 스포츠는 아니었다. 그러나 군자리 코스가 만들어지면서 가까운 마을에 살던 소년들이 캐디로 일하기 시작했고, 그 소년들은 어깨 너머로 골프를 익혔다. 그중 뛰어난 실력과 정신력을 가진 소년들은 수준급 실력을 갖춰 프로 선수로서의 길을 개척해 나갔다. 연덕춘, 한장성 등 한국 골프의 1세대 스타들이 이런 과정을 거쳤다.

20세기 초에는 군자리 골프장 외에도 서울의 효창원이나 청량리 등에 골프장이 만들어진 바 있다. 그러나 군자리 골프장 외의 다른 곳들은 매우 짧은 역사만 남기고 금세 사라졌다. 군자리 골프장 역시 이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곳은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온몸으로 겪어내면서도 초창기 한국 골프의 중심지이자 젖줄 역할을 해냈다.

이은경 기자 jhjh@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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