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잇 하다 = 변화를 외치다
[경향신문] ㆍ‘포스트잇’의 사회학
항의 부당한 규칙·성추행 교수 비판 등 ‘저항 수단’
지난 4일 부산 동래구 유락여중. 계단·복도 벽에는 “속옷색이 무엇이든 내 자유다” “왜 여자는 속옷이 비치면 안되나요” 등의 문구가 적힌 포스트잇 메모지 수백장이 붙었다. 학교 창문에는 포스트잇 수십장이 ‘검은 브라’라는 글씨 모양으로 붙여졌다. 학교 측이 검은색 브래지어 착용을 금지하고 흰색 브래지어를 입을 때도 비치지 않도록 흰 내의를 덧입을 것을 교칙으로 강제하자 학생들이 “속옷 색깔까지 규정하는 것은 인권침해”라며 ‘포스트잇 시위’에 나선 것이다.
이 학교 학생 ㄱ양(15)은 “복장 단속 소식에 학생들이 카카오톡에 채팅방을 만들고 익명으로 논의를 벌인 결과 각자 포스트잇을 붙여 불합리한 교칙에 항의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포스트잇은 저마다 한마디씩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선택됐다”고 말했다.
최근 이화여대, 덕성여대, 성신여대, 연세대 등에선 성추행한 것으로 지목된 교수들을 비판하는 포스트잇이 해당 교수 연구실 앞을 뒤덮듯이 붙었다. 지난 4일과 5일엔 중앙대와 고려대에서 성추행 의혹 교수의 파면을 촉구하는 포스트잇 시위가 이어졌다.
어디든 간단히 붙일 수 있는 작은 포스트잇 메모지가 공론의 광장에서 소통의 수단이 되고 있다. 2년 전 강남역 살인사건, 구의역 사망사건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해 사고 현장에 붙었던 포스트잇이 올 초 ‘미투(#METOO·나도 고발한다)’ 운동을 거치면서 불합리한 체제에 적극적으로 항의하고 변화를 요구하는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다.
공감 자신 드러내며 타인 변화 이끄는 ‘자기정치’ 도구
■ 7.5㎝ 정사각형의 힘
가로·세로 각각 7.5㎝ 크기에 불과한 작은 포스트잇 메모지의 힘은 가로 78㎝, 세로 100㎝ 전지 크기의 대자보보다 힘이 세다는 평가가 나온다. 과거 젊은 세대가 주로 저항의 도구로 쓰던 대자보의 경우 그룹의 의견을 담은 긴 글을 논리적으로 싣는 것에 맞춰진 반면에 포스트잇은 개인의 경험과 감정이 제각각 함축된 단문들의 집합체라는 점이 다르다.
특히 최근 젊은 세대가 자신을 표현하면서도 타인의 공감을 얻는 가장 효과적인 ‘자기정치’의 도구로 포스트잇을 발견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이나영 중앙대 교수는 “대자보는 정제된 언어로 표현된 논리적인 글이지만, 그 안에서 개개인의 감정은 사라져버린다”면서 “하지만 포스트잇 시위의 주체들은 자신이 그대로 존재하길 원한다. 한 사람의 경험과 감정이 담긴 형형색색의 포스트잇이 빼곡히 붙어있는 모습은 대자보보다 훨씬 위협적”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집단에서 주도하는 사람이 대표로 적는 위계적인 성격을 지닌 대자보와 달리 포스트잇은 평등한 관계로 타인과 연결되고 연대체가 된다”고 설명했다.
윤김지영 건국대 교수는 “누군가 ‘부당하다’며 포스트잇 한 장을 붙였을 때, 같은 부당함을 경험한 이들이 덧붙이며 ‘이어말하기’를 한다. 이는 개인이 느낀 부당함이 구조적이고 보편적인 문제였다는 점을 드러낸다”고 말했다.
추모 불합리한 체제 희생자 기리며 바꾸려는 의지
■ “이런다고, 바뀝니다”
유락여중 ㄱ양은 “학교에 붙은 포스트잇 중 ‘이런다고, 바뀝니다’라는 글귀가 인상적이었다”고 꼽았다. “한 선생님이 ‘너희가 이런다고 바뀌겠냐’고 하셨는데, 그 포스트잇은 내게 ‘우리가 바꿀 수 있어’라는 얘기를 해줘 힘이 됐다”고 말했다.
정원옥 계간 ‘문화과학’ 편집위원은 “포스트잇 시위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정동(감정 이입)’하려는 몸짓”이라면서 “포스트잇은 자기를 드러내며 타인의 행동 변화를 꾀하는 강력하고 효과적인 수단이 됐다”고 말했다.
꿈쩍하지 않던 조직도 바뀌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락여중은 교칙 개정작업에 들어갔다. 학교 관계자는 “학교 운영위원회에서 교칙 개정 여부를 결정키로 했다. 지금으로선 학생 속옷을 규정하는 조항이 삭제되는 방식으로 개정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최근의 포스트잇 시위 주체는 젊은 세대 중에서도 여성이 대부분이다. 남성·위계·연공서열 중심 사회구조에서 여성들의 불합리한 경험들이 포스트잇을 통해 발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최근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도 포스트잇을 통한 말하기 방식이 확산되는 한 요인으로 분석된다.
윤김 교수는 “젊은 세대 여성들은 자신이 경험한 부조리한 세상을 페미니즘이라는 틀에서 해석만 할 게 아니라 직접 변화시켜야 자신의 일상도 완전히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이들이 서로의 연대자이자, ‘듣는 자’이자, ‘말하는 자’로서 역할을 하는 데 있어서 포스트잇은 중요한 수단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재덕 기자 duk@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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