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집불통 트럼프의 취임 선물로 ‘컵’ 선택한 영국 총리 [김지호의 위스키디아]

김지호 기자 2024. 2. 15. 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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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미영(美英) 정상회담. 테리사 메이 당시 영국 총리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물건 하나를 전달합니다. 트럼프 당시 미국 대통령이 취임 후 영국으로부터 받은 첫 공식 선물이었던 셈이죠. 얼핏 보면 사약 그릇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가운데가 움푹 파이고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조가비 모양의 ‘퀘이치(Quaich)’라는 이름의 컵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전통 잔 퀘이치(Quaich). /김지호 기자

퀘이치는 영국에서 우리 돈으로 3만~10만원 수준이면 구매할 수 있는 대중적인 물건입니다. 중세 시대부터 사용해 온 영국의 전통적인 술잔인 퀘이치는 스코틀랜드 게일어로 컵을 의미합니다. 역대 미국 대통령 중 가장 재산이 많은 것으로 알려진 도널드 트럼프에게 일반인들은 몇만 원이면 사서 쓰는 컵을 선물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컵에는 생각보다 많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위스키를 좋아하고 입문 수준에서 진일보하고 싶다면 반드시 퀘이치에 관해 알아야 합니다. 그 역사는 중세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사람 피와 인신공양으로 탄생한 퀘이치

1860년대, 피를 뽑고 있는 환자 모습. 피를 담는 그릇으로 탄생한 것이 퀘이치라는 설이 있습니다. /위키피디아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를 비롯한 중세 의료계에서는 사람의 피를 뽑아서 버리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건강을 유지하려면 몸에서 나쁜 액체를 빼내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물론 대부분의 방혈(放血)은 과다출혈로 인한 사망으로 이어졌지만, 그 결과와 상관없이 이러한 의료행위를 위해 피를 담는 그릇으로 탄생한 것이 퀘이치라는 설이 있습니다. 고대 켈트족의 고위 전문직 계급인 드루이드들이 인신공양을 집전할 때, 인간의 심장에서 흘러나온 피로 퀘이치를 채웠다는 일화도 전해져 옵니다.

반면 가리비 모양에서 영감을 얻은 컵일 뿐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해안가나 섬에서 조개껍데기에 위스키를 마시면서 자연스럽게 대체품을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어찌 됐든 단순히 물만 따라 마시는 평범한 컵은 아니었던 같습니다.

스코틀랜드 전통 잔 퀘이치(Quaich). 컵 바닥이나 손잡이에는 자기 부족(클랜)이나 가문의 문양을 새기기도 합니다. /김지호 기자

전통적으로 퀘이치는 양옆에 두 개의 손잡이가 달린 나무 컵의 형태입니다. 컵 바닥이나 손잡이에는 자기 부족(클랜)이나 가문의 문양을 새기기도 합니다. 점차 소재나 크기도 천차만별로 변해갑니다. 일반적인 목재부터 백랍, 화려한 은, 금 등 고가의 재료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다양해지는 것이지요. 심지어 세숫대야만 한 큰 퀘이치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사랑과 우정, 평화의 상징 퀘이치

퀘이치는 사랑과 우정 그리고 평화의 상징이었습니다. 지금은 상투적으로 들리는 단어들이지만 중세 영국에서는 다소 ‘낯선’ 단어들이었습니다. 중세 영국의 역사는 동족 살인과 배신, 수많은 권모술수, 여러 부족의 왕좌 쟁탈전으로 요약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투쟁 없이 왕좌에 오른 군주는 없었으며 대부분 뜻하지 않게 왕좌의 자리를 내줘야 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왕 제임스 1세는 1437년 그의 삼촌에 의해 살해됐고 그의 아들 제임스 2세는 대포에 맞아 사망합니다. 제임스 3세는 이제 막 15살 된 아들과의 전투 끝에 살해당하고 제임스 4세는 처남에 의해 생을 마감합니다. 단 한 순간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던 ‘왕좌의 게임’이 계속됐던 셈입니다.

스코틀랜드 전통 잔 퀘이치(Quaich). /김지호 기자

1589년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덴마크의 안나 공주에게 결혼 선물로 퀘이치를 전달하면서 컵이 주목받기 시작합니다. 제임스는 안나가 스코틀랜드로 무사히 올 수 있도록 전국적으로 기도회와 예배를 열었으며, 안나가 탄 배의 안위를 지속해서 보고 받았습니다. 심지어 안나를 위해 노래를 쓸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고 합니다. 한 역사학자는 이에 대해 “제임스 6세의 삶에서 가장 낭만적인 순간”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렇게 그가 안나에게 건네준 퀘이치가 사랑의 상징으로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손잡이가 두 개 달린 퀘이치는 수 세기 동안 하이랜드 지역 족장들끼리도 교환됐습니다. 이는 환대의 표시이자 연대감의 상징이었습니다. 상대방으로부터 퀘이치를 전달받을 때는 양손으로 받는 게 일반적입니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신뢰의 의미도 담겨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된 배경에는 생각보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습니다. 술잔을 양손으로 주고받아야 남은 한손으로 무기를 꺼내 상대를 죽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최소한 술잔이 오가는 동안은 평화가 유지됐던 셈입니다. 같은 이유로, 퀘이치를 손님에게 제공하기 전에는 주인이 먼저 술을 한 모금 마셔야 합니다. 눈앞에서 몸소 기미상궁 역할을 해줬던 것입니다.

일부 퀘이치의 바닥은 유리로 만들어졌는데 이 또한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를 상대방의 동태를 살피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술잔을 비우면서도 한 눈으로는 상대방을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스코틀랜드 정통 행사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퀘이치

퀘이치는 스코틀랜드의 전통 결혼식 때도 자주 등장합니다. 피로연 때 남녀가 퀘이치에 담긴 술을 함께 나눠 마시는 것이지요. 때로는 온 가족이 다 같이 나눠 마시기도 합니다. 이제는 모두가 한 가족이 됐음을 환영하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어떻게 마시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술자리에서 ‘의리게임’처럼 입술만 살짝 담그고 상대방에게 건네줘도 무방합니다. 물론 마지막으로 술잔을 전달받은 사람이 머리 위로 잔을 털어내면 분위기가 더욱 무르익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용물도 꼭 술일 필요는 없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스카치위스키를 마셨지만, 브랜디, 물, 심지어 차를 담아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특별한 순간을 함께 하는데 그 의미가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어부들의 퀘이치 사랑도 남다릅니다. 그들은 매년 연어 시즌의 시작을 축하하기 위해 퀘이치에 스카치위스키를 담아 강으로 뿌리고 있습니다. 이는 연어의 건강뿐만 아니라 강에 축복을 기리는 의식입니다.

찰스 3세 국왕 부부가 스코틀랜드 전통 행사에서 퀘이치에 담긴 위스키를 마시고 있는 모습. 2005년 8월 6일. /게티이미지코리아

오늘날까지도 퀘이치는 스코틀랜드에서 이뤄지는 다양한 기념행사에 단골처럼 등장하고 있습니다. 왕이나 왕비, 총리가 존경의 의미로 손님들에게 선물을 하기도 합니다. 메이 전 총리가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게 건네준 퀘이치도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단순히 컵이 아닌 스코틀랜드의 오랜 전통과 유산을 선물한 셈이지요. 당시 정상회담은 양국 간의 끈끈한 유대관계와 공통의 이익에 바탕을 둔, 관계의 힘과 중요성에 대한 입장을 재차 확인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퀘이치 선물이 중세 때부터 품어온 힘을 발휘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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