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들’ 정지영 감독 “나는 과거가 아닌 현재 당신들에게 분노한다”

이정우 기자 2023. 11. 1.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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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일 인터뷰…“내 작품 중 가장 촉촉한 영화”
“당대 지배논리에 대한 의심에서 내 영화는 출발”
“사람들이 권위를 내세우는 이유는 자신감이 없기 때문”
영화감독 정지영. CJ ENM 제공

"각자도생 시기에요. 누명을 쓴 세 소년처럼 능력 없는 사람들은 도태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이게 맞아요? 안 맞죠. ‘당신들은 이게 불편하지 않아?’ 이게 영화로 말하고 싶은 거에요."

영화감독 정지영(76)의 영화는 늘 화가 나있다. 베트남전의 실상을 드러낸 ‘하얀 전쟁’(1992)부터 법정 부조리를 꼬집은 ‘부러진 화살’(2012)까지. 실화를 소재로 사회를 고발하는 그의 영화는 분노한 만큼 강렬하지만 또 그만큼 건조하다.

그가 4년 만에 내놓은 ‘소년들’(1일 개봉) 역시 경찰·검찰의 대표적 부실수사 사건인 1999년 ‘삼례 나라슈퍼 사건’을 다룬 만큼 영화는 뜨겁다. 영화 속 경찰은 고문과 협박으로 3명의 죄 없는 소년들을 강도살인범으로 몰고, 검찰도 합세해 진범이 나타나도 모르쇠로 일관한다. 그런데 정 감독의 말처럼 "이제까지 작품 중 가장 촉촉한 영화"다. 사회와 인간에게 절망한다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영화를 통한 ‘변혁’을 바라는 노감독의 진심이 반영된 덕분일지 모른다. 다음은 30일 서울 종로의 한 까페에서 만난 정 감독과의 일문일답.

영화 ‘소년들’ 한 장면. CJ ENM 제공

―왜 삼례 나라슈퍼 사건이어야 했나.

"사회적 약자를 대하는 부정한 공권력의 민낯을 드러낸 대표적 사건이라서 영화 소재로 좋았다. 또 주변에 있던 우리가 방관하거나 동조하진 않았는지 점검해보고 싶었다."

―실화에서 소재를 찾는 이유는 뭔가.

"원래 인간과 사회 문제에 대해 남들보다 관심이 많다. 사랑, 우정, 가족 이런 건 사실 별로 관심이 없다. 그러다 보니 이 땅에서 겪고 있는 사건들이 다 영화의 소재다. 거기서 의미를 찾는 게 내 일인데, 애매한 것보단 확실한 의미를 던지고 싶다."

감독의 말대로 이번 영화는 선악이 확실하다. ‘미친개’로 불리는 전북청 수사반장 황준철(설경구)이 사건의 진상을 밝히려 고군분투하지만 거대한 조직 앞에 꺾인다. 16년 후 피해자의 딸로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인 윤미숙(진경)이 찾아오고, 재심에 나선다는 게 영화의 줄거리. 죄 없는 세 소년을 마구잡이로 잡고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던 부정한 공권력의 뻔뻔함과 힘이 없어 이를 감내해야 했던 세 소년의 안타까운 모습은 대조를 이룬다.

―실화는 힘이 있지만, 결과가 정해져 있다는 점은 영화적으로 단점일 수 있다. 더구나 이 사건은 선악이 명확한데, 찍을 때 부담은 없었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무슨 말인지?

"‘이렇게 살기 힘든데 사회적 비용을 들여 구할 만큼 세 소년들이 가치있느냐’는 사람들이 여전히 우리 주변에 있다. 재심으로 무죄가 확정되고, 소년들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후에도 여전히 ‘이 친구들을 구할 필요가 있냐’는 거다. 국가와 조직을 위해 세 소년이 희생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분노하는 대상은 그들이다."

―지나간 과거가 아닌 현재 사람들에게 분노하고 있다는 뜻인가.

"이 영화를 통해서 좀 더 따뜻하고 함께 사는 삶을 살자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다. 그런데 그것을 비웃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당신의 영화를 사회 고발로 인식한다. 그 점에 대한 부담은 없나.

"이 영화의 가제가 ‘고발’이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고발이 다가 아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은 이 소년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한 번 보여주자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그린 것이다."

―재심 장면에서 방청객들이 일반 관객들을 표상하는 것 같다.

"방청객들이 꼭 소년들 편에 서 있지 않다. 재심 과정에서 진상이 확연히 드러날 때 비로소 사람들은 그 소년들을 제대로 봐주게 된다. 단역 분들 모두가 그런 과정을 거치며 고난을 겪은 소년들에게 박수를 쳐줬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전작들에 비해 유연하고, 부드럽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유가 뭘까.

"내가 워낙 드라이(건조)한 사람이다. 아무리 극적 장치를 넣어도 정서적으론 메마르단 평가를 받아왔다. 그런데 이 작품은 상당히 정서에 호소한다. 왜 그렇게 됐는지 궁금하죠? 시나리오 작가(정상협) 덕분이다. 시나리오 작가가 감성이 풍부하다. 나와 반대되는 사람이라서 정말 잘 맞았다."

―감독님 내면에 변화가 있는 줄 알았다.

"그렇진 않다. 시나리오 작가가 내게 부족한 감성을 불어 넣어줬다. 이번 영화는 촉촉하다. 분노엔 다양한 방식이 있는데 정서적으로 다가가 설득력이 높아지면 좋겠다."

―설경구 배우는 최근 출연한 영화 중 최고의 연기였다.

"원래 그 정도 자질이 있는 연기자인데, 최근엔 자기 역할을 못 만난 거다. 설경구가 정지영 감독 만나서 갑자기 잘한 건 전혀 아니다."

―16년이란 간극을 가진 역할이다. 캐릭터에 대한 상의는 어떻게 했나.

"일단 처음부터 황 반장 역엔 설경구를 놓고 시작했다. 예전 ‘강철중’이 나이를 먹고 연륜이 쌓이면 황 반장처럼 될 것이라 생각했다. 16년 후의 모습은 기가 꺾이고, 노쇠한 모습을 살리고 싶었다. 쉽게 말해 과거의 모습은 설경구가 가장 잘했던 것이고, 현재의 모습은 우리 영화에서 잘 표현해야 하는 거였다."

―연기의 디테일이 돋보였다. 과거의 회한과 경찰로서 자긍심과 책임감이 뒤섞인 모습을 보고 역시 설경구란 생각이 들었다.

"영화 초반 식당에서 아내 식당에서 딸이랑 몰래 소주 먹는 장면이 있다. 아내 역의 염혜란 배우가 ‘니 아빠 옛날엔 미친개로 전주 바닥에서 날렸다’고 하면, 딸이 ‘아 알지. 미친개’라고 할 때 설경구의 표정이 기가 막히다. 17년이란 세월에서 느꼈을 법한 감정들이 다 녹아 있다. 이 표정 때문에라도 이 영화는 두 번 볼 필요가 있다."

―유준상이 악역을 맡은 것은 생소했다.

"요즘 시대에 나쁜 사람을 보면 잘생기고 머리 좋고 겉이 멀쩡해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유준상이었다."

―염혜란(아내), 허성태(후배 형사)가 영화의 분위기를 잘 살렸다.

"대단한 배우다. 염혜란은 매 장면 애드립을 했는데 100% 받아들였다."

―애드립 싫어할 것 같은데.

"함부로 하면 안 좋죠. 그런데 염혜란은 캐릭터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하다 보니 저절로 나오는 애드립이었다. 안 쓸 수가 없었다."

―공권력에 대해 파고드는 이유.

"당대를 지배하고 있는 지배논리에 대한 의심에서 내 영화는 출발한다. 과연 이게 맞아? 당신들은 이게 불편하지 않아? 질문하는 거다."

―이번 영화의 경우엔 어떤 질문을 던진 건가.

"지금은 각자도생 시대다. 세 소년같이 능력 없는 사람들은 도태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시대다. 그런데 이게 맞나? 안 맞죠. 이게 내가 이 영화로 말하고 싶은 거다."

―영화로 세상과 잘 소통이 되고 있다고 느끼나.

"솔직히 말하면 사회와 인간에 대해 절망하고 있다. 그런데 희망을 놓고 싶지 않다. 그래서 영화로 이 허무한 마음을 극복하고 있는 거다.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바꾼다는 믿음을 가진 것 같기도 하다.

"영화 한 편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느냐고 물으면 답은 간단하다. 불가능하죠. 그런데 이런 가능성은 있다. 예전에 의사 한 분을 만났는데 내 영화로 본인의 삶이 달라졌다고 했다. ‘하얀 전쟁’을 보고, 베트남에 의료 봉사를 한 10년 있었다는 거다. 큰 보람을 느꼈다. 영화가 사회를 바꿀 순 없지만, 한 두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순 있다. 그 사람들이 모이는 게 사회인 것이고, 그럼 영화가 미약하나마 ‘변혁’의 힘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정 감독은 늘 배낭을 메고 다닌다. 이날 인터뷰에도 배낭을 메고 혼자 걸어왔다. 설경구, 유준상 등 ‘소년들’에 출연한 배우들은 그를 ‘소년’이라 칭했다. 이런 소탈함 덕분이다. 그는 "현장에선 모두 감독의 지시만 기다린다. 존재 자체로 권력자"라며 "권위를 일부러 내세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다"고 말했다. "사실 사람들이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는 본인이 자신감이 없기 때문 아닌가요."

이정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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