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복룡의 신 영웅전] 위안스카이의 그림자

2023. 6. 15. 00:35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도봉산에 올라가면 망월사(望月寺)가 있다. 탁 트인 풍광도 좋지만, 구한말 청국 공사 위안스카이(袁世凱·1859~1916)의 대웅전 현판도 볼만하다. 1891년 가을에 썼으니 32세 때다. 악명과는 달리 위안스카이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원소(袁紹)의 명문가 출신이다. 본디 무사 출신이었던 위안스카이는 임오군란(1882)을 진압하러 온 오장경(吳長慶)의 하급 무사였는데, 그때 나이 23세였다.

위안스카이가 거친 성격으로 조선 왕실을 휘어잡자 그를 기특하게 여긴 이홍장(李鴻章)이 25세이던 그를 조선 공사로 발탁했다. 말이 공사였지 ‘총독’과 같았다. 하마비(下馬碑) 앞에서도 가마에서 내리지 않고 대전까지 들어갔다.

신 영웅전

1882년 조·미 수교로 1887년 전권 공사 박정양(朴定陽)이 미국으로 출발할 때 위안스카이는 속국의 사신이 지켜야 할 세 가지 원칙, 즉 영약삼단(另約三端)을 지시했다. ①조선 공사는 청국 공사관을 방문해 안내를 받아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출하고 ②외교 모임에서 조선 공사는 중국 공사보다 아랫자리에 앉으며 ③외교 업무를 청국 공사와 상의하라는 것이었다.

위안스카이는 인삼을 밀수했고, 인사에도 개입했다. 김씨 성을 가진 조선의 미녀를 첩으로 들였다. 청·일 전쟁이 일어나자 야반도주하면서 데리고 간 그 여인이 시인 위안커원(袁克文)을 낳았다. 손자가 물리학자 위안자류(袁家騮)인데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우젠슝(吳健雄)의 남편이다.

조선과 일본의 강화도조약(1876년)으로 청과 조선의 종속 관계가 사라진 지 140여년이 지났다. 그러나 아직도 중국은 한국을 함부로 하대한다. 중국을 등지는 것이 과연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바람직한지는 더 고민해야겠지만,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다. 주한 중국 대사의 얼굴에는 아직도 위안스카이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신복룡 전 건국대 석좌교수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