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아 칼럼] 판사님들, 김명수 대법원장의 ‘제청’ 동의하나요?

김민아 기자 2023. 6. 12. 20:5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김명수 대법원장(왼쪽)이 지난달 30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열린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에 앞서 최영애 위원장(오른쪽)과 함께 접견실로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인기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 3>. 돌담병원에 외상센터장 대행으로 강동주(유연석)가 부임한다. 강동주는 중증외상 환자만 외상센터에서 맡고 나머지는 응급실로 보낸다는 원칙을 세운다. 어느 날, 응급실에 흉부외과(CS) 응급수술이 필요한 환자가 들어온다. CS 전문의 차은재(이성경)는 센터장 지시를 어기고 응급실로 달려간다. 강동주는 차은재에게 외상센터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분노한 의료진이 ‘강동주 보이콧’에 돌입한다. 뜻밖의 인물이 보이콧에 반대한다. 차은재의 연인인 외과 전문의 서우진(안효섭)이다. “집단으로 사람 하나 왕따 하자는 거잖아.” 그에겐 ‘내부고발자’란 이유로 보이콧의 타깃이 된 과거가 있다.

김민아 칼럼니스트

다음달 퇴임하는 조재연·박정화 대법관의 후임 제청을 둘러싼 보도를 접하며 이 장면을 떠올렸다.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가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후보군 8명을 추천한 뒤, 대통령실에서 이들 중 2명에 대해 ‘특정 이념 성향’을 이유로 임명 보류를 검토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김 대법원장이 ‘2명’의 임명을 제청할 경우 ‘보이콧’할 뜻을 선제적으로 시사한 것이다. 헌법 제104조 2항은 ‘대법관은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국회의 동의를 얻어 대통령이 임명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제청·동의·임명 주체를 삼분한 것은 권력분립 정신을 충실히 반영하겠다는 취지다. 일단 제청된 이후 대통령이 국회 임명동의안 제출을 미루는 식으로 임명을 보류한다면 막을 길은 없다. 하지만 제청도 하기 전 특정 후보는 안 된다며 ‘콕 찍어’ 압박하는 건 헌법정신에 위배된다. 전례도 없다.

외통수에 몰린 김 대법원장의 선택을 모두가 주목했다. ‘2명’을 제청하면 대통령 눈 밖에 나고 ‘2명’을 배제하면 사법부 수장의 리더십을 포기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임기가 석 달밖에 남지 않은 김 대법원장은 백기투항했다. 헌법이 명시한 ‘대법원장의 대법관 제청권’은 사실상 사문화했다. 앞으로는 대통령이 ‘여당 대표 낙점하듯’ 대법관 후보자를 점찍으려 할 것이다. 보이콧 표적이 될 게 뻔한 진보·리버럴 성향 후보군은 인사검증을 위한 정보제공 자체에 동의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어떻게든 대법원에 입성하려는 이들의 시선은 ‘용산’에 꽂힐 것이다.

대통령실의 유무형 압력이 있었다고 김 대법원장이 면책될 순 없다. 그가 ‘2명’을 배제하고 제청한 후보자들의 적격 여부와도 무관하다. 최고 사법기관인 대법원의 수장이 헌법정신을 외면한 행태는 용납하기 어렵다. 더욱이 보이콧당한 2명은 모두 여성이며, 사유는 ‘특정 이념 성향’이었다. 대법원은 정의와 인권의 최후 보루이다. 여성 법관 2명을, 헌법상 ‘양심의 자유’가 보장되는 나라에서 이념 성향을 문제 삼아 보이콧하는 반인권적 행태에 대법원장이 동조하다니 참담하다. 평생 법관으로 헌신하며 커리어를 쌓아온 두 여성은 1차적으로 대통령에 의해, 2차적으로 사법부 수장에 의해 배제·거부당했다. 김 대법원장은 이들 대신 ‘서·오·남’(서울대 출신·50대·남성) 후보자 2명을 제청하며 “대법관 구성 다양화를 요구하는 국민 기대를 염두에 뒀다”고 했다.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법관들의 침묵이다. 20년 전인 2003년 8월 당시 박시환 서울지법 부장판사(전 대법관)는 최종영 대법원장이 서열 위주의 관료적 대법관 제청 관행을 고수하는 데 항의해 사직서를 던졌다. 하루 만에 법관 100여명이 박 부장판사를 지지하는 연판장에 서명했다. 4차 사법파동의 시작이었다. 대법관 제청 절차는 이런 우여곡절을 거치며 민주적이고 투명한 방향으로 조금씩 변화해왔다. 이번에는 다르다. 지난 1일 ‘대통령실, 대법관 제청 거부권 검토’ 보도가 나온 후 열흘이 넘도록 법원은 조용하다. 대통령실이 대법관 제청 과정에 개입한 사안이, 대법원장이 서열대로 후보군을 선정한 일보다 가벼운가.

다시 <낭만닥터 김사부 3>. 강동주가 오기 전 외상센터장은 차진만(이경영)이었다. 외상센터에서 아들이 숨진 뒤 병원 측에 소송을 건 도의원은 병원장에게 거래를 제안한다. 차진만을 자르면 소송을 취하하고 외상센터 예산 지원도 검토하겠다는 내용이다. 병원장은 흔들린다. 외과 과장 김사부(한석규)는 원칙을 강조한다. “그건 제안이 아니라 협박이에요. 어떤 협박도 우리를 흔들 수 없어야 합니다.” 병원장은 꼼수를 써가며 차진만을 해임하지만, 도의원은 말을 바꾼다. 위기를 모면하려고 원칙을 저버렸다가는 더 큰 위기가 닥친다. 드라마에서만 그럴 리 없다.

김민아 칼럼니스트 makim@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