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희가 펜 대신 카메라를 들었다, ‘난장이’를 향해

이문영 2023. 2. 13.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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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조세희 작가가 남긴 사진들
고 조세희 작가 작품. 조중협 제공
지난 11일은 지난해 12월25일 작고한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저자 조세희 소설가의 사십구재가 있는 날이었다. 그는 언어가 배반당한 시대를 부끄러워하며 오랫동안 세상에 글을 내보내지 않았다. 완강한 침묵의 시간이었으나 그는 ‘난장이들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는 펜 대신 사진기를 잡았다. 카메라를 들고 “가깝고 깊숙이 다가가 현장의 신음소리”를 기록했다. <한겨레>는 유족의 도움을 받아 언론사로는 처음으로 그가 남긴 사진 일부를 공개한다.
고 조세희 작가 작품. 조중협 제공

목격담들이 이어졌다.

탄압에 저항하며 목숨을 끊은 노동열사의 추모 시위에서, 벼랑 끝으로 몰리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생존권 사수 집회에서, 미군기지 확장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피투성이가 된 논밭에서, 쌀개방에 저항하다 경찰 방패를 맞고 쓰러진 농민들 사이에서, 자식들 묘비를 쓰다듬으며 통곡하는 광주민주항쟁 유족들 곁에서 그를 봤다는 이야기가 낯선 소문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소설가의 손에 책과 연필이 아니라 사진기가 들려있더라는. 왜소한 어깨에 카메라 가방을 걸고 현장을 뛰어다니더라는. 그의 글을 읽지 못하는 시간 동안 그렇게 그를 읽었다는.

고 조세희 작가 작품. 조중협 제공

문인들은 그를 자주 만나지 못했지만 시민들은 그를 자주 볼 수 있었다. 문단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를 보는 방법은 거리로 나가는 것이었다. 그 거리에서 백발의 소설가는 오해도 많이 받았다. “사진기자로도 보이지 않는 늙은이가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하니까 경찰이 고용한 채증조로 의심해 카메라를 빼앗는 사람들”(생전 작가의 말)도 없지 않았다.

시위 현장은 작가 조세희가 독자와 만나는 곳이기도 했다. 학창 시절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난쏘공)을 읽은 학생들이 졸업 후 노동자가 돼 집회에 나왔다가 그를 보고 달려왔다. 시위 진압 과정에서 그를 스칠 때마다 경례를 붙이는 전투경찰도 있었다. “우리 아는 사이냐”고 묻는 그에게 전경은 “그냥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며 슬픈 눈을 돌리기도 했다.

고 조세희 작가 작품. 조중협 제공
고 조세희 작가 작품. 조중협 제공

거리 한복판에서 ‘난쏘공’을 내밀며 사인을 부탁하던 학생을 그는 기억했다. 1978년 출간된 1쇄본이었다. “경찰이 가져가고 독자들이 가져가 버려” 작가에게도 없는 판본이었다. “새 책을 줄 테니 바꿔 달라”는 그의 부탁을 학생은 거절했다. 책 안쪽에 이름 두 개가 적혀 있었다. 학생의 부모였다. 난쏘공을 주고받으며 사랑하고 결혼해서 낳은 아이가 자라서 그 책을 들고 그의 앞에 서 있었다. “부모님이 집회 현장에 가면 선생님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해서 왔다”며 “이 책만큼은 드릴 수 없다”고 미안해했다. “내가 아주 슬픈 시절이었는데 난쏘공의 시간이 헛되이 흐른 것 같지 않아 기운이 났다”고 작가는 말하곤 했다.

고 조세희 작가 작품. 조중협 제공

그는 1980년 사북항쟁을 기록하며 독학으로 사진을 익혔다. 사진 르포집 <침묵의 뿌리>(1985)를 펴낸 뒤에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글을 쓰지 않던 시절에도 그는 사진으로 쓰고 있었다. 그는 “글이 생략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사진으로 채워 넣고자” 했다.

그가 평생 몇 컷의 사진을 남겼는지는 유족들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작가가 인화해 정리해둔 사진들 어디에도 찬란은 보이지 않는다. 질주하는 세계가 떨구고 간 사람들만 프레임을 가득 채우고 있다. 전체의 행복을 위해 불행해야 했던 키 작은 농부와, 키 작은 광부와, 키 작은 노동자들이 ‘우리 없이 행복한 전체가 성립할 수 있냐’며 묻고 있다. 그들의 얼굴이 작가의 시선이었고, 그들의 곁이 작가의 위치였다.

고 조세희 작가 작품. 조중협 제공

“사진을 찍으려면 반드시 현장에 있어야 한다. 나는 직업 사진가가 아니다. 나의 약점이다. 그래도 현장에 나간다. 글도 못 내놓는 내가 그들의 외로움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길 바라며 찍는다. 그래서 내 사진들이 오래 남길 바란다. 가능하다면 오백년쯤 버텨주면 좋겠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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