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동네 빵집'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박찬일 2022. 10. 23. 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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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의 '밥 먹다가 울컥'] 빵이나 요리, 미용, 사진 같은 업종은 도제식 교육을 통해 업무를 꾸려간다. 견습 기간에는 '소정'의 교통비와 밥값 정도 줬다. "그때는 많이들 그랬다."
한 빵집에서 직원이 빵을 만들기 위해 반죽을 하고 있다. ⓒdpa

한때 주방 군기라는 게 있었다. 군대도 아닌데, 우리는 군기라는 말을 지금도 가져다 쓴다. 도제식 교육을 통해서 업무를 꾸려가는 업종이 유독 그렇다. 주방 일도 그랬다. 빵 만들던 내 친구 진수는 5년 차가 될 때까지 친구들 술자리에 못 나왔다. 새벽 4시 첫 버스를 타고 나가서 반죽을 주물러야 했다. 밤에 반죽을 해놓고 퇴근하면 가장 먼저 졸병이 출근해 반죽 상태를 체크하고, 짧게 발효하는 빵은 기계에 돌려서 반죽을 쳐놓아야 했다. 주 6일 근무였다. 30년도 전이었으니까. 그때 토요일은 반공일(半空日)이라 해서 대여섯 시간 일했고, 대략 일 년에 300일 이상 출근했다. 일해서 입에 풀칠했고, 풀칠하고 남으면 저축했다. 국민연금이 막 시작될 때인데 2000원인가 뗐다.

“제법 큰 공장(빵집은 주방이라고 안 부르고 공장이라 한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관습이다)이라서 국민연금을 떼더라고, 그게 뭔지도 모르고 몇천 원 내는 게 아까웠지. 나중에 공장이 망했는데, 알고 보니 돈을 떼가기만 하고 연금공단에 돈은 안 냈더라고. 그래서 내가 연금이 얼마 안 돼.”

요새야 연금 공제한 거 떼먹으면 형사처벌감이지만 그때는 뭐든 허술했다. 요리사나 제빵·제과 기술자들은 이직도 잦았다.

“1년 이상 일하면 퇴직금 주는 거잖어? 별로 받아본 적이 없어. 가게가 망해서 못 받고, 어떤 데는 월급에 퇴직금이 포함돼 있다고 안 주데?”

이른바 ‘13분의 1’ 꼼수였다. 연봉이 1200만원이라 치자. 그러면 매달 100만원을 주는 게 아니라 13분의 1, 약 92만3000원만 준다. 1년을 채우면 퇴직금으로 차액분을 준다는 거다. 희한한 계산법이다. 멀쩡한(?) 중소 규모 기업도 그따위 수작을 부렸다. 말도 안 되는 편법이지만 그때는 그게 아주 신박한 묘수였으리라. 그렇게 월급 떼먹은 사장들, 지금도 아는 놈들 있는데 다 떵떵거리고 잘산다.

하여튼 진수는 술자리에 못 나왔다. 어쩌다 나오면 거푸 석 잔쯤 마시고 얼른 들어갔다. 기어코 꼬깃꼬깃 접은 5000원짜리를 제 몫이라며 내놓고 갔다. 그때 진수 월급이 9급 공무원의 절반인가 그랬다. 그쪽 동네가 그랬다. 빵이나 요리, 미용, 사진 같은 업종이 심한 편이었다. 요리는 덜했는데, 다른 직종은 무슨 견습이 그리도 긴지. 견습 기간에는 ‘소정’의 교통비와 밥값 나부랭이 정도 줬다. 한 1년은 그렇게 살아야 ‘정식’(아, 그 잘난 정식!)이 됐다. 정식이 되면 의료보험도 들어준다고 해서 좋아했다. 한 해 100만명 넘게 태어나던 시대였다(작년에 대한민국 신생아는 26만명을 겨우 넘었다). 기술로 벌어먹고 살려는 사람이 많았고, 시장은 자주 그들을 그렇게 써먹었다.

몇 시간이고 같은 일을 반복한다

요리 쪽도 옛날 선배 얘기를 들어보면 비슷했다. 1년은 그냥 차비만 받고 다녔다고. 명절에 집에 갈 때 봉투 하나씩 주는 게 전부인 식당도 많았다. 석탄이나 연탄으로 불을 살려둬야 하는 중국집이나 밤새 불 때는 국밥집은 퇴근 없이 기숙을 많이 했는데, 선배들 증언에는 종종 주인이 문을 걸어 잠그고 가버렸다고 했다. 불이라도 나면 어쩌라고. 한 중국집에서 일했던 이연복 주방장은 기숙하는 직원들을 2층 손님방에 때려넣고 주인이 문 잠그고 퇴근한 적도 있었다 했다. 밥이라고는 누룽지에 짠지가 전부였다.

“볶음밥을 하려면 가마솥에 석탄 때서 밥을 짓고 박박 긁어놔. 그걸 식혀서 볶음밥이나 잡탕밥 같은 데 쓰는 거지. 그러곤 남은 누룽지에 물 끓여서 직원식을 주는 거야. 반찬은 무에 소금만 딱 넣고 간 배게 해서 내주더라고. 몇 달 그러다가 도망쳤지. 그런 집들이 왕왕 있었어.” 진수네가 그런 빵집까지는 아니었다. 그 녀석의 말대로 ‘그때는 많이들 그랬다’고 할 뿐이었다.

빵집을 보통 제과점이라고 하는데 실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빵집은 빵집, 과자 전문으로 하는 제과점은 제과점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제과점이라고 통칭해왔다. 빵집에서도 과자를 구색 맞춰 팔았고, 제과점이라 해도 빵을 안 팔면 매출이 좋지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딱 부러지게 두 업종이 나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아무래도 빵이 잘 팔리고, 빵 맛이 좋아야 과자도 팔린다. 과자는 잘 상하지 않으니 미리 만들어두고 오래 팔 수 있어서 효자 상품이다.

진수가 제일 잘하는 건 식빵과 단팥빵, 그리고 크림빵, 소라빵 같은 기본 빵이다.

“난 ‘주도한빠’야(일본어로 ‘중간 정도 간다’는 뜻. 기술업장에서 많이 쓰는 말이었다). 어정쩡하게 이것저것 다 했어. 빵집은 사실 그래. 골키퍼도 하고 공격도 하고. 기본 빵은 반죽이 대개 같으니까 그걸로 북 치고 장구 치고 그러지.”

나중에 발효기가 좋아지고 출근 시간이 좀 나아졌다. 버튼 눌러서 원하는 발효 완료 시간을 맞춰놓고 퇴근하면 출근에 맞춰서 반죽이 딱 준비되는 장비다. 어쨌든 그렇게 나온 반죽으로 몇 시간이고 같은 일을 반복한다. 식빵 수백 개, 단팥빵도 수백 개, 크림빵도 수백 개, 여기에 소보로 같은 계열의 ‘맘모스빵’을 잼 발라 만든다. 기술자들은 대충 거기서 털고 끝내는데 졸병들은 다음 날 쓸 달걀 깨고(한 번에 열 판, 스무 판씩 깨야 한다. 진수는 언젠가 달걀 빨리 깨기 ‘생활의 달인’에 나오고 싶다고 했다. 자신 있다나 뭐래나) 반죽 치고, 오래 발효시킬 것들은 발효실에 넣어야 일이 끝난다. 거기다 짬짬이 쿠키며 롤케이크며 잡다한 것들도 만들어야 한다. 튀기는 과자며 빵도 많다. ‘도나쓰’는 빵집에서 잘 팔리는 인기 메뉴다. 꽈배기 꼬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빵집은 속도의 장사다. 찹쌀도나스라는 건 또 반죽이 달라서 애를 먹인다. 거기에다 팥소까지 채워서 둥글려놔야 준비가 끝난다. 정작 튀기는 일은 어렵지 않다.

“제일 힘든 건 어린이날이랑 크리스마스야. 나중에는 어버이날도 그랬고, 케이크 만들어야 하니까. 언젠가부터는 추석 때도 케이크가 나가더라.” 케이크는 하루아침에 다 만들 수 없다. 영업을 하면서 엑스트라로 준비해야 한다. 빵 치고 과자 구워가면서 케이크도 만들어 쌓아둔다. 큰 가게는 팀을 꾸려 케이크에 매달린다. 왕년에 어지간한 가게에서 500개, 1000개씩 케이크를 팔았다. 요새야 프랜차이즈도 있고 해서 케이크 구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예전에는 뻔한 동네 제과점에서 그 케이크를 다 조달했다.

“며칠 밤새우는 거야. 나중에는 졸면서 크림을 짰어. 한석봉 엄마랑 붙어도 이긴다 내가. 큭큭.”

케이크 위에 메리 크리스마스 같은 축하 레터링을 짜주머니에 넣은 초콜릿 크림 같은 걸로 쓰는데, 졸면서 써도 글씨가 그럴듯했다고 한다. 짜식, 허풍이 세다.

그는 그 고생을 해서 빵집 일급 기술자가 되었지만, 이제 빵은 만들지 않는다. 도배를 배워 그걸로 먹고산다. 대기업이 ‘도배질’ 하러 들어오지는 않을 거 아니냐면서.

아니, 들어올지도 몰라. 도배업체 비교 포털사이트 같은 걸 만들어서 네 일감도 먹으러 들어올지 몰라. 퀵서비스도, 용달도 손을 댄다며. 진수야, 어쨌든 이제 술자리에 자주 나올 수 있어서 좋다. 그래그래. 그거 좋구나. 한잔 마셔라. 이제 빵 반죽 해놓고 갔는데 푹 꺼져버리는 꿈 같은 건 안 꿔도 되겠다, 야. 

박찬일(셰프)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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