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 연주가 강태환, 고기·술 안 먹고 하루 두 끼 '도인' 생활
예술가의 한끼
강태환은 남들보다 한 해 일찍 신흥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한 살 어려서 그런지 뭐든지 시원찮았다. 4학년이 되자 밴드부에 들어갔다. 내성적인 성격이라 이를 극복하기 위해 부모가 억지로 넣은 것이다. 당시 전국의 국민학교에 밴드부가 딱 두 개밖에 없었다. 하나는 수원에, 하나는 인천에 있었다. 밴드부에서 클라리넷을 불었다. 강태환은 어릴 때 침을 잘못 맞아 손가락이 구부러졌다. 운지가 제대로 될 턱이 없다. 구멍을 정확하게 막아야 하는 클라리넷 연주에는 치명적이었다. 집의 지하실에서 밤낮으로 클라리넷을 불어댔다. 다듬잇방망이에 클라리넷 구멍을 그려놓고 시도 때도 없이 운지를 익혔다. 클라리넷 연주는 적성에 맞아 적극적이었다.
억울한 죽음 죽산 조봉암이 외숙부
서울예고 입시 때다. 강태환은 음악이론이나 음악용어조차 몰랐다. 시험감독은 베이스 바리톤 오현명, 시험관은 KBS교향악단 단원들이었다. 클라리넷 교본에 나온 걸 그냥 불었다. 합격했다. 음악 전공 입학생으로는 유일한 남학생이었다. 당시 서울예고는 이화여고 4층과 지하를 빌어 교사로 사용했다. 서울예고 2학년 때 4·19가 터졌다. 고관의 자제들이 많이 다니던 이화여고는 학생들이 데모에 뛰어들지 못하게 교문을 걸어 잠갔다. 2년 전 외숙부 조봉암의 억울한 죽음을 본 강태환이다. 강태환은 담을 넘고 나가 데모대에 합류했다. 4·19가 끝났다. 데모에 참여하지 않은 학교는 체면이 구겨졌다. 강태환이 혼자서 서울예고 체면을 다 세워줬다고 교장은 강태환을 칭찬했다.
서울 시내에는 르네상스 등 음악감상실이 몇 군데 있었다. 여기서 ‘레지널드 켈’이 연주한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콘체르토를 처음 들었다. 고교생 강태환은 이렇게도 행복한 톤과 컬러의 클라리넷 소리를 들어 본 게 처음이었다. 음악감상실에 강태환이 나타나면 디제이는 알아서 이 곡을 틀어 주었다. 평생 이 소리를 담고 살기로 했다. 지금도 그렇다.
서울예고에서도 학과공부는 뒷전이었다. 독일인 독일어 선생은 강태환이 시험에서 한 문제만 맞히면 70점으로 인정해주겠다고 했다. 플루티스트 고순자 선생은 강태환의 연주에서는 프로의 톤이 나온다고 격려해주었다. 강태환은 학교가 시시해졌다. 결국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나이 열여덟에 미8군 악단에 들어갔다.
다 버리고 자신의 음악이 하고 싶어졌다. 건축가 김수근이 만든 원서동의 공간사옥에 공간사랑이 들어선 건 1977년이다. 당시 공간사랑에서는 공옥진의 창무극, 사물놀이, 민속 굿제, 신파극 페스티벌, 현대 무용, 마임, 발레, 재즈 등의 공연이 열렸다. 1978년부터 강태환 등 여러 재즈 연주가들이 모여 한달에 한번 공간사랑에서 즉흥연주를 벌였다. 처음에는 30명으로 출발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점점 연주자들이 줄어들었다. 결국 강태환, 김대환(드럼), 최선배(트럼펫) 셋만 남았다. 이 셋으로 프리재즈를 하는 강태환 트리오가 결성되었다. 이 셋은 공간사랑에서 공연을 계속했다. 공간사랑은 1986년에 문을 닫았다. 76번째 공연이 이들의 마지막 무대가 되었다.
1985년 일본 공연을 시작으로 강태환은 해외공연을 자주 가졌다. 양반다리를 하고 방석에 앉아서 하는 그의 연주 방식이 독특하게 보였다. 순환호흡, 빠른 텅잉, 배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실력파 강태환은 해외공연을 시작하자마자 곧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독일, 미국, 영국, 호주, 홍콩, 러시아, 리투아니아, 프랑스 등으로 연주가 이어졌다. 1990년, 무세중, 이만방, 김대환, 이불, 심철종, 박창수, 김형태 등 한국작가 15명이 참가하는 일한행위예술제에 특별출연으로 참가했다. 강태환이 명단에 빠진 걸 안 일본측이 강력하게 참가를 요구했다. 그만큼 일본에서는 강태환의 명성이 높았다. 1990년대 초반은 홍대 앞 문화의 전성기다. 이때 강태환은 홍대 앞의 록카페 곰팡이 등에 나타나 화가 이준영 같은 젊은 아티스트들과 어울려 실험적인 퍼포먼스를 하곤 했다.
78년부터 원서동 공간사랑서 공연
그는 효창공원 부근에 산다. 자택의 지하실에서 매일 여덟시간씩 연습을 한다. 색소폰을 불다 보면 이가 빠지기도 한다. 강태환은 이가 많이 빠졌다. 이가 빠지면 이제까지 잘 구사하던 특별한 연주법이 안 된다. 기술을 다시 습득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래서 더 좋다. 다시 기술을 습득할 즐거움과 기쁨이 생겼으니. 관악기 연주자에게 절정의 육체적 나이는 40대, 50대다. 강태환은 팔순을 바라다보고 있다. 이가 빠지거나 나이가 들면 색소폰 연주자는 센 소리를 못 낸다. 그는 몇 년 전 심장질환으로 스탠트 시술을 했다. 그런데도 강태환의 색소폰 소리는 힘이 여전하다.
강태환은 하루에 두 끼만 먹는다. 고기는 먹지 않는다. 술도 안 마신다. 최소한의 단백질 섭취를 위해 약간의 멸치, 두부는 먹는다. 그래도 몸에 별 이상이 없다. 라면은 김치 없이 먹는다. 라면 자체가 짜기 때문에 김치가 필요 없다. 일본공연을 가면 대개 보름쯤 머무는데 김밥으로 일관한다. 그가 사는 동네에 마니아들이 찾는 유명한 수타 짜장면집이 있다. 그걸 먹어본 강태환은 유명 수타 짜장면이나 짜파게티나 맛이 그게 그거라 했다.
강태환의 생활과 몸과 용모는 안개랑 이슬만 먹고 살 것 같은 밋밋하고 해맑은 도인풍이다. 그의 또 다른 몸은 알토 색소폰이다. 이 둘이 합체하는 순간 격렬한 사자후가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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