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데스크] 그래도 추석이니까
'안전·복지' 국가의 역할 생각
물질 풍요에도 삶은 더 불안
복구 돕는 따스한 이웃에 위안
하지만 확연히 바뀐 기후는 당최 적응하기 힘들다. 날씨가 달라졌다. 가물어 큰 산불이 나더니 기록적인 폭염 후 폭우가 쏟아졌다. 여기에 초강력 태풍까지. 서울 도심이 몇 시간 만에 물에 잠기고 포항도 순식간에 처참한 피해가 났다. 그 와중에 반지하 가족의 참극, 지하주차장 비극이 벌어졌다. 반지하 발달장애인 가족 3명은 방 안으로 차오르는 물속에서 나오지 못했다. 자연재해는 지역과 계층을 가리지 않으며 사회적 약자에겐 더 혹독하다는 걸 실감한다. 기습 폭우 때 집을 잃은 수재민 수백 명이 아직도 떠돌고 있는데 이번 태풍으로 또 수많은 이재민이 나왔다.
수해와 태풍 사이에 수원에서 세 모녀가, 광주에서 보육원 출신 청년이 극단적 선택을 했다. 정말이지 이런 사건은 더더욱 적응이 안 된다. 암과 난치병을 앓는 세 모녀는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에도 사회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 보육원 출신 새내기 대학생은 기숙사 방에 홀로 남았다. '아직 읽지 못한 책이 많은데'라고 쓴 쪽지가 가슴을 친다. 보호시설에서 나온 자립준비청년의 '홀로서기'에 사회는 너무나도 냉담했다. 안전과 복지 사각지대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서 과연 국가의 역할이 무엇인가 다시 생각하게 한다.
'위험 사회론'을 펼친 독일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는 '위험'을 현대사회를 이해하는 핵심 단어에 올려놓았다. 물질적 풍요가 늘어날수록 정작 삶은 불안하고 위태로워진다. 사람들은 더 안전한 삶을 요구한다. '선성장 후안전' 시대가 저물고 있다는 진단을 35년 전에 했다. 짧은 시간 경제강국으로 급성장한 우리 사회는 예측 불가능한 위험들이 도처에 깔려 있다. 압축 성장에 가려 많은 사고와 위험을 겪으면서도 국가는 그 원인을 개인 탓으로 돌렸다. 그래서 안전 대책은 뒤로 미뤘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년 정부 예산안만 봐도 그렇다. 폭우에 사람 잡은 반지하 주거 상황을 뻔히 보고도 공공임대주택 예산은 대폭 삭감했다. 수원 세 모녀 대책은 찾아가는 복지 서비스를 하겠다는 말잔치에 그쳤다. 노인 빈곤율 48.5%에 노인 자살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4배나 높은 상황인데도 '질 낮은 일자리'라고 공공형 노인 일자리를 줄인다. 그것에 생계를 의존하던 노인들은 어쩔 셈인가.
폭우도 태풍도 지나갔지만 고물가, 고환율, 고금리 '3고의 경제 태풍'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건 대통령실에서 '무박 2일' 비상태세를 갖춘다고 될 일이 아니다. 매우 길고 고통스러울 것이며 그 과정에 얼마나 많은 낙오자가 생길지 가늠하기 어렵다. 재난 피해이건 경제위기이건 사회가 생산하는 위험의 특징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부글부글 끓다가 잠잠해지면 정부나 정치인은 안면을 바꾼다. 천재지변인데 어떻게 하겠느냐, 글로벌 경제가 다 나쁜데 우리라고 별수 있느냐고 한다. 정부의 무책임 속에 개인은 물이 들어찬 지하주차장 배관을 붙들고 살 수밖에 없다. 후진국일수록 사회적 위험을 이런 방식으로 대한다. 그래서 위험은 계속 반복되는 것이다.
지난달 폭우 속에서도 물이 차오르는 반지하 방범창을 뜯어 사람을 구한 시민들이 상을 받았다. 국가가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제도적으로 제공해야 할 안전 대책을 시민들의 의협심과 희생정신이 대신하고 있다. 추석인데도 포항을 돕기 위해 몰려든 자원봉사 이웃을 보며 잠시 따스함을 느껴 본다. 답답해도 그래도 추석이니까.
[전병득 사회부장]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