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수의 오마이갓] 성균관 "차례상 표준안, 뒤늦은 반성문 맞습니다"

2022. 9. 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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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갑 성균관 의례정립위원장
최영갑 성균관 의례정립위원장이 5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차례상 표준안'을 발표하고 있다./뉴스1

“예, 맞습니다. 반성문 맞습니다.”

지난 5일 ‘차례상 표준안’을 발표한 기자회견장에서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 최영갑 위원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가 발표한 기자회견문이 마치 ‘반성문’처럼 보인다는 기자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지요. 이날 최 위원장은 “유교는 오랜 세월 동안 우리 국민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현대화 과정에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옛 영화만 생각하며 선구자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며 “그 결과 유교에 대한 국민의 인식은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로 자리잡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명절만 되면 ‘명절 증후군’과 ‘남녀 차별’이란 용어가 난무하고 심지어 명절 뒤끝에는 ‘이혼율 증가’로 나타나는 현상을 모두 유교 때문이라는 죄를 뒤집어 써야 했다”며 “유교의 중추 기구인 성균관은 이러한 사회 현상이 잘못된 의례문화에 기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오랫동안 관행처럼 내려오던 예법을 바꾸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문자 그대로 ‘반성문’이었습니다.

이날 위원회는 파격적인 ‘차례상 표준안’을 발표했지요.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는 작은 탁자가 준비됐고 시연 순서엔 과일 4종류와 3색 나물, 고기 구이[炙], 물김치, 송편, 술 등 6가지만 차례상에 올랐습니다. 차례와 제사 때마다 원성을 사곤 했던 ‘전(煎)’은 없었습니다. 위원회는 이 여섯 가지를 기본으로 “조금 더 올린다면 육류, 생선, 떡을 놓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요리’라고 할 것은 구이 밖에 없었습니다. 구이 대신 생선이나 전을 올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 간의 합의’라고 했지요.

최영갑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 위원장(왼쪽 두 번째) 등이 5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차례 간소화' 방안을 발표 후 간소화 방안대로 차례상을 시연했다. 성균관은 작년 10월부터 9차례 회의와 국민 여론조사를 거쳐 차례상 표준안을 만들었다. /연합뉴스

◇“찬반 엇갈리지만 호응이 더 많아”

성균관은 표준안을 발표하면서 상차림을 그래픽으로 만든 리플릿과 ‘차례 간소화 이야기’라는 만화까지 만들었습니다. 성균관은 ‘차례상 표준안’ 리플릿 1만장을 추석 연휴 전날 서울역과 용산역에서 일반국민에게 배포할 예정입니다. 인터넷에는 “늦었지만 잘한 일”이라는 호응과 “전통을 무너뜨린다”는 반응도 있습니다. 대체적으로는 호의적인 반응이 많습니다.

기자회견에 앞선 간담회에서는 “위원회가 이런 파격적인 표준안을 발표해도 유림 내부의 반발이 없느냐”는 질문도 나왔지요. 최 위원장의 답변은 “모든 분들의 의견을 다 반영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유림 가운데 젊은 세대(최 위원장은 59세입니다)가 앞장서지 않을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사실 최 위원장의 ‘개혁’ 발언은 지난 7월 성균관유도회총본부 회장 취임 기자회견에서 예고된 바 있습니다. 당시 그는 “유교는 ‘꼰대’ ‘고리타분’ 이미지로 인식되고 있다”며 ‘유교 현대화’에 앞장서겠다고 밝혔습니다. 그 첫 단추가 5일 발표된 ‘차례상 표준안’이었습니다.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가 만든 차례상 간소화 리플릿. 성균관은 추석 전날 서울역과 용산역에서 리플릿 1만장을 배포할 예정이다.

이날 기자회견장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단어는 ‘가족 간의 합의’였습니다. 성묘와 차례 중 무엇을 먼저 할 것인지, 과일의 가짓수는 어떻게 할 것인지, 차례상의 음식 위치는 어떻게 정할 것인지 등 대부분의 사안을 ‘가족 간의 합의’로 정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명절 때 국내외로 여행 가서 차례를 지내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조상을 사모하는 후손들의 정성이 담긴 의식’인 차례를 놓고 가족 간의 불화나 갈등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취지입니다.

◇“차례상 표준안은 일반 국민 대상, 종가 제사와는 달라”

성균관은 이번에 차례상 표준안을 발표하면서 ‘일반 국민’과 ‘종가(宗家)·유림(儒林)’을 분리하고 ‘차례’와 ‘제사’도 나눴습니다. 이번에 발표한 표준안은 ‘차례에 관해 일반 국민을 대상’으로 한 일종의 ‘권고안’이지요. 음식 가짓수도 표준안에서 제시한 아홉 가지에서 더하거나 빼는 것도 가족끼리 결정하면 된다는 취지입니다. 이와 달리 종가 등에서 수백년째 이어오는 불천위(不遷位) 제사 등은 일종의 무형 문화재로 더욱더 전통을 이어가자고 했습니다.

사실 성균관의 이번 표준안 발표는 세태를 선도하기 보다는 시대의 변화를 인정하는 느낌입니다. 최 위원장도 이런 점을 인정했습니다. 그는 “이미 많은 가정에서 차례나 제사를 간소화하고 있습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이번 표준안은 국민들의 마음의 부담을 덜어드리는 측면이 강하다”고 했습니다. 간소하게 차례를 지내면서 ‘이래도 되나’하는 마음의 부담을 갖고 있는 국민들에게 ‘그래도 된다’고 안심시키는 효과를 주고 싶었다는 것입니다. 최 위원장은 “지금까지 유교는 ‘그러면 안 된다’며 금지하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이 때문에 차례와 관련된 온갖 비판과 비난은 유교가 뒤집어썼다”라고 했습니다.

◇유림 42%도 “간소화 필요”

표준안 발표 후에 최 위원장이 피부로 느낀 반응은 어땠을까요? 6일 전화 통화에서 그는 “유림 가운데 이번 표준안을 비판하는 경우는 극히 일부였다”고 했습니다. 여론 조사에서 유림들은 차례의 간소화가 필요하다는 응답이 41.8%로 일반 국민의 40.7%보다 높게 응답한 데서 보듯이 차례 간소화는 국민과 유림 모두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얘기이지요.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가 차례 간소화 캠페인을 위해 만든 만화 '차례 간소화 이야기'의 일부. /성균관 의례정립위원회

◇최 위원장 “우리집도 형님과 제가 번갈아 차례 모셔”

파격적인 차례상 표준안을 발표한 최 위원장 본인은 어떻게 차례를 준비할까요? 그는 2남 가운데 차남이랍니다. 아버님은 생존해 계시고, 형님과 최 위원장이 번갈아 차례를 모신다고 하네요. 아버님이 차례를 모실 때에는 차례상에 음식이 25가지 정도 올랐다고 합니다. 최 위원장이 모실 때는 15가지 정도 올린다고 하지요. 과일을 한 가지로 계산하면 10~11가지 정도 된다고 하고요. 그는 “저 역시 아버님을 설득하면서 차례상을 차츰 간소화하는 중입니다. 가족 간의 합의가 중요하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차례상 간소화로 신호탄을 쏘아올린 ‘유교의 현대화’가 어떻게 전통과 현실을 조화시킬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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