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체제하에서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금됐거나 유죄 판결을 받아 옥살이를 했던 피해자들에 대해 국가의 손해배상 책임이 인정된다는 대법원 첫 판단이 나왔다. 2015년 대법원이 긴급조치 9호가 헌법에 위반돼 무효라도 국가가 민사상 배상 책임을 질 수 없다고 본 판례를 7년 만에 뒤집은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김재형 대법관)는 30일 긴급조치 9호 피해자 유모씨 등 71명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의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승소 취지로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대법원은 “긴급조치 9호는 위헌·무효임이 명백하고 긴급조치 제9호 발령으로 인한 국민의 기본권 침해는 그에 따른 강제 수사와 공소 제기, 유죄 판결의 선고를 통하여 현실화됐다”며 “이런 경우 긴급조치 9호 발령부터 적용·집행에 이르는 일련의 국가작용은 ‘전체적’으로 보아 공무원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객관적 주의 의무를 소홀히 하여 그 직무 행위가 객관적 정당성을 상실한 것으로서 위법하다고 평가된다. 긴급조치 9호의 적용·집행으로 강제 수사를 받거나 유죄 판결을 선고받고 복역함으로써 개별 국민이 입은 손해에 대해서는 국가 배상 책임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이번에 대법원이 판결한 사건의 원고들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최대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거나 구속된 피해자들이다. 이중 상당수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최대 1억 2600만원의 형사보상금을 받았다고 한다. 이들은 2013년 정부를 상대로 112억여원 상당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지만 1·2심에서 패소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다르게 판단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뉴스1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5년 5월 긴급조치 9호를 발표했다. 긴급조치9호는 유신헌법을 부정하거나 폐지를 청원하는 행위와 일체의 집회·시위를 금지하고 이런 내용을 방송하거나 보도하는 행위도 금지했다. 이를 위반하면 영장없이 체포될 수 있고, 1년 이상 유기징역을 받을 수 있었다.

헌법재판소는 2013년 3월 긴급조치 9호에 대해 재판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과도하게 제한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대법원도 같은 해 4월 “긴급조치 9호는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하거나 침해한 것으로 유신헌법은 물론 현행 헌법에도 위반돼 무효”라고 판단하면서,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이 재심을 통해 형사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하지만 민사 재판에 대해선 달랐다. 대법원은 2015년 긴급조치 9호 피해자들이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한 이후 이를 계속 유지해 왔다. 당시 대법원은 “긴급조치 9호 발령은 위헌·무효지만 고도의 정치적 행위로서 정치적 책임을 질 수는 있어도, 국가가 국민 개개인에 대해 민사상 불법 행위에 따른 책임은 지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2021년 서울중앙지법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징역 3년에 자격정지 3년을 받은 피해자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위헌적 긴급 조치 발령과 그에 따른 국가 작용으로 발생하는 개별 공무원의 행위는 불법이다. 정부는 2억 4000여만원을 지급하라”며 종전 대법원 판례에 반하는 판결을 내놓기도 했다. 그리고 대법원도 이날 판결을 통해 판례를 변경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종전 대법원 판결은 긴급조치 9호에 근거한 수사와 재판이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에 의한 불법 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봤다”며 “이번 판결을 통해 판례를 변경함으로써 , 긴급조치 제9호의 발령부터 적용·집행에 이르는 ‘일련의 국가작용’으로 개별 국민이 입은 손해에 대해서 국가배상책임이 인정된다고 보아, 과거에 행해진 국가 권력에 의한 기본권 침해에 대한 사법적인 구제를 인정하였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