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이여 단결하라" 목 놓아 외친 양반

김형민 2022. 8. 7.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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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민 PD의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백정 해방 운동을 이끈 '형평사'의 초대 사장은 양반 출신 강상호였다. 그는 보통 사람들의 비난, 양반의 따돌림, 일제 관헌의 방관과 경멸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강상호는 해방 후 좌익 연루 혐의를 받았다. ⓒ독립기념관 제공

백정(白丁)이라는 사회적 신분의 기원은 좀 복잡하다. 고려시대만 해도 일반적으로 농사짓는 백성들이라는 뜻으로 쓰인 이 단어는 조선시대 이후 소나 돼지 등 동물을 잡고 해체해서 파는 일을 포함해 특수한 천역(賤役)에 종사하는 사회적 신분의 뜻을 지니게 돼. 이를테면 유명한 백정 출신 도적 임꺽정은 버드나무로 생활 도구를 만들어 바치던 ‘고리백정’이었다지.

백정 남자들은 장가를 들어도 상투를 틀지 못했고 부녀자는 결혼해도 비녀를 꽂지 못했다. 양반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는 농민들도 백정이라면 흰 눈부터 떴다. 성인이 된 백정도 상민(常民)의 자제들에게 존댓말을 써야 했고 “너도 말을 해봐!” 할 때까지 입을 닫고 기다려야 했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되어 백정에 대한 법적 차별은 공식적으로 종식됐지만 나랏법이 바뀌었답시고 백정이 큰 갓 쓰고 길을 나섰다가는 뉘 집 멍석말이를 당해 세상을 하직할지 모르는 형편이었지. 일제강점기에도 그랬다. 일본은 지금도 ‘부락민’이라 하여 사회적 천민 계층이 남아 있다고 하니, 백정 차별을 오히려 더 잘 이해했는지도 모르겠구나. 일제강점기 민적(民籍)상 백정들에게는 도한(屠漢), 즉 ‘도살업 하는 자’라는 뜻의 굵은 글씨가 항상 박혀 있었다. 나라가 망하고 세상이 바뀌었지만 백정은 계속 백정이었어.

3·1 항쟁의 폭풍이 온 조선을 휩쓸고 간 뒤의 어느 날, 경상도 진주 어느 동네에서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젊은이들 몇이 백정을 끌고 와 개를 잡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백정은 고개를 저었다. “못 잡겠소.” 이 버릇없는(?) 백정에게 분노한 혈기 방장한 젊은이들은 주먹질과 발길질을 사정없이 퍼부었다. “어떻노? 인자 개 잡을 거제?” 그래도 개 잡기를 거부한 백정은 잔인한 구타 끝에 목숨을 잃고 말았어. 눈에 핏발이 선 백정의 이웃들이 일본 경찰서에 달려가 범인을 잡아 처벌할 것을 호소했으나 일본 경찰은 백정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결국 백정을 죽인 사람들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어.

참혹한 백정 청년의 죽음을 기화로 뜻있는 이들이 손을 잡고 일어선다. 백정 출신인 장지필·이학찬 등과 더불어 양반 출신 강상호가 백정 해방 운동을 주창하고 나선 거야. 마침내 1923년 4월 ‘형평사(衡平社)’의 깃발이 경상도 진주 하늘에 처음으로 휘날린다. ‘저울처럼 평등한 모임’이라는 뜻이었지. “우리의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참다운 인간이 되는 것을 기하는 것이다. …전국의 형평 계급아 단결하라.” 강상호는 백정 출신이 아니면서도 초대 형평사 사장을 맡는다.

강상호는 도무지 백정 해방 운동에 뛰어들 이유가 없는 사람이었어. 강상호의 아버지 강재순은 정3품 통정대부를 지낸 사람으로 천석꾼 부자였고, 강상호는 장남이었다. 아무리 일제강점기라 해도 한평생 여유롭게 보내고도 남을 사람이었어. 하지만 강상호는 그 어떤 폭군의 군대보다도 강력한 인습의 장벽, 그 앞에 선 사람의 기가 질리게 만드는 완강한 차별의식의 성벽을 온몸으로 들이받는 용사로 탈바꿈했지.

가죽을 말리는 건피장에서 일하는 백정 가족의 모습. ⓒ독립기념관 제공

고달픈 노년 살다 쓸쓸하게 잊혀

백정들의 가장 큰 한(恨) 중의 하나는 자식 교육이었다. 백정의 자식이 학교에 오기만 하면 다른 아이들이 동맹휴업에 들어가는 지경이었으니 백정 아이들의 취학이란 불가능한 일이었지. 그런데 강상호는 이 문제를 매우 창조적으로 돌파한다. 어느 날 그는 백정의 아이 두 명의 손을 잡고 학교에 나타났어. 벌써 그 얼굴들을 알아본 학생들이 술렁이는 가운데 그는 난처한 얼굴의 교사들과 마주앉았다.

“허허 이거 잘 아시면서… 이 아이들은 백정의 아이들 아닙니까. 저희가 받을 수가….”

이때 강상호는 품 안에서 호적 서류를 꺼내 교사들의 코앞에 들이민다. 백정의 아이 둘은 놀랍게도 강상호의 호적에 올라 있었어. “이 아이들은 내 양자들이오. 내가 백정이 아니라는 건 아실 테고, 달리 안 되는 이유가 있소?” 그만 교사들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지. 아이들은 학교에 입학하는 데 성공한다.

강상호는 백정이 인간임을 인정할 수 없던 사람들의 눈에 가시가 됐고 ‘때려죽일 결심’의 표적이 됐다. 1923년 5월25일, 그러니까 형평사가 설립된 지 얼마 안 됐을 때 백정들과 주민들 간 패싸움이 일어났고 분노한 주민들은 형평사를 찾아갔어. “그들은 형평사에 찾아와 그 사장 되는 강상호씨를 불러내어 두 뺨을 무수히 난타하였으며 의복을 찢는 등 봉욕을 주었다(〈동아일보〉 1923년 5월30일).”

이런 사건이 빈발하면서 사람들은 흥분했다. 그들은 형평사에 동조하는 사람들도 백정으로 치부하겠노라 선언하고 형평사 소속 백정들에게는 고기를 사지 않기로 맹세했다. 그들은 ‘신백정(新白丁)’ 즉 원래 백정이 아니었으나 백정에 동조한 강상호 등의 이름이 적힌 깃발을 휘두르며 시위를 벌였고, 강상호와 뜻을 같이하는 인사들의 집이나 가게에 찾아가 행패 부리기를 일삼았다. 일본 경찰 또한 형평사의 적이었다. 진주경찰서장이 “형평사가 잘못을 저지른다면 내가 직접 형평사를 해산하겠다”라고 기염을 토할 정도였어. 보통 사람들의 비난과 반발, 양반 일문의 외면과 따돌림, 일제 관헌의 방관과 경멸, 그 모든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강상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차별을 받는 사람들이 일어서서 싸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들의 일원도 아니면서, 설움받는 이들의 손을 잡고 그들과 어깨를 겯고 앞장까지 서고 그 때문에 받아야 할 불명예와 불이익을 기꺼이 감당하는 행위는 그야말로 인간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인간성의 정수일 거야. 뭇 동료와 이웃의 지지 속에 강적과 싸우는 것은 힘겨운 일이지만 자랑찬 추억이 되고, 후일의 무용담이 된다. 하지만 편견과 인습에 사로잡힌 이웃들의 표적이 되고, 미쳤다는 손가락질 받아가면서 억눌린 채 지워진 이들의 권리를 위해 싸우는 것은 고역 중의 고역이거니와 누가 알아주지도 않을 헛심의 주인공이 되기 십상이지. 강상호는 그런 사람이었어.

그는 일제강점기 내내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살았고, 천석꾼 부자에서 빈털터리로 전락했으며, 해방 후에도 좌익 연루 혐의를 받아 고달픈 노년을 겪다가 1957년 쓸쓸하게 죽었다. 그 어떤 외부의 적보다도 강력하고 거대한 내부의 완고함에 돌팔매를 던지고 온몸으로 부딪친 다윗이었으나 결코 다윗처럼 영광스러운 존재로 기억되지 못했던, 되레 오랫동안 잊혀버린 영웅이었다. 그래도 강상호의 최후를 지킨 사람들은 백정들이었어. 전국에서 모여든 ‘백정’, 이제는 어엿한 공화국의 시민이 된 사람들은 목메어 울며 강상호를 기렸다. 그들의 만사(輓詞)를 들었다면 강상호 또한 어깨를 폈을 것 같구나. 아울러 그가 우리 역사에 얼마나 큰 인물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거야.

“오직 선생님만은 그 시대의 속칭 양반계급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신분의 명예를 포기하고 전 재산을 희사해가면서 우리들의 고독한 사회적 지위의 인권 해방 계급 타파를 위하여 선봉에 나서서 오직 자유·인권·평등을 부르짖으시며 우리들의 치학의 개방을 부르짖으시며 우리만이 당해오던 50만 동포를 위해 주야고심 투쟁하지 않으셨습니까. 위대하십니다. 장하십니다.”

김형민(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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