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무능과 무능이 만났다..6·25 전쟁, 첫 사흘간 벌어진 일[포커스 인사이드]

남도현 입력 2022. 6. 13. 05:01 수정 2022. 6. 13.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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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파에서 회군한 침략자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도심을 질주하는 북한군 T-34 전차. 당시 북한은 제105전차여단 예하의 4개 연대 중 무려 3개 연대를 의정부축선 공략에 투입했다.


6.25 전쟁 개전 초 국군이 밀렸던 배경엔 불가항력적 측면이 있다. 만일 당시 북한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했을 만큼 피아의 전력 격차가 너무 컸다. 그런데 전쟁 전체를 통틀어 북한군이 가장 우위를 점했던 그 시기 그들은 의외로 무능한 모습을 많이 보였다. 우리가 치욕으로 여기는 3일 만에 서울이 빼앗긴 사실을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을 정도다.

일단 병력으로 2배, 화력으로 5배 이상의 전력으로 기습한 북한군이 38선에서 50㎞ 정도 떨어진 서울까지 오는 데 3일이 걸렸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 뛰어난 전과가 아니다. 반면 이는 국군이 선전했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 실제로 문산축선의 제1사단, 춘천축선의 제6사단, 동해축선의 제8사단 그리고 옹진반도의 제17연대는 상당히 잘 싸웠다. 특히 제6사단의 선전은 북한의 초기 전쟁전략을 와해시켜 버렸을 정도다.

의정부축선을 담당하던 제7사단은 고전했는데, 공교롭게도 개전 직전에 부대를 재배치하던 중이어서 1개 연대가 감편된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반면 이곳으로 남침한 북한군은 이후 서울을 점령하는 제3, 4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이었다. 전선 전체를 놓고 볼 때 피아간 격차가 가장 컸던 지역이었다. 다시 말해 압도적인 북한군이 아군의 가장 약한 곳을 공략했지만, 서울까지 3일이 걸린 것이었다. 북한군의 무능이 어우러진 결과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일동에서 의정부로 남하하던 제9연대와 제109전차연대가 서파까지 진입했다가 포천으로 회군한 사건이다. 38선에서 의정부를 연결하는 통로는 3개(현 3번, 43번, 47번 국도)가 있는데, 북한군은 도로마다 보병 지원을 위해 1개 전차연대씩 투입했다. 그만큼 서울 점령에 대한 의지가 강했다. 하지만 서파 부근은 지도의 표시와 달리 전차가 통과할 수 없는 산골 오솔길이었다.

서파 인근 옛 47번 국도의 최근 모습. 6.25전쟁 당시에는 그야말로 등산로 정도의 오솔길이었다. 때문에 북한군 전차가 통과할 수 없어 회군을 해야 했다. 카카오맵 로드뷰 캡처


결국 이들이 우회하면서 포천에서 의정부로 향하는 통로에 1개 사단과 2개 전차연대가 한꺼번에 몰려 극심한 정체가 벌어졌다. 그 결과 서울을 목전에 두고 북한군은 무려 35시간이나 진격을 멈추어야 했다. 사전에 치밀한 답사가 이뤄지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만큼 북한의 전쟁 준비는 어설펐다. 북한군 총참모장이 불과 32세인 강건(姜健)이었으니 부족한 점이 많았던 것은 어쩌면 당연했을지도 모른다.


스스로 무너뜨린 대책



6.25전쟁 당시 의정부 항공 사진. 서울의 동북쪽 관문인 이곳을 방어하기 위해 모든 예비대가 집중됐다. 문제는 병력이 도착하는 순서대로 축차투입되면서 의미 없이 소모돼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국군을 지휘한 34세의 참모총장 채병덕(蔡秉德)도 강건에 못잖았다. 의정부 축선의 중요성을 잘 아는 그는 무너져 내리는 제7사단을 돕기 위해 제23연대를 제외한 모든 후방 부대들을 동원했다. 당연한 조처였지만 문제는 귀중한 증원군을 중구난방으로 전선으로 내몰았다는 사실이다. 수도경비사령부를 쪼개서 투입하는 것도 모자라 제2, 5사단 예하 부대들도 서울역에 도착하는 족족 전선에 보냈다.

이들 부대가 집결한 뒤 방어에 나서도 이길까 말까 한 상황이었는데 분산해 달려간 결과는 비참했다. 전력의 축차투입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금기시하는 전술이나 육군본부는 그렇지 않았다. 더구나 한강교량을 예고 없이 폭파시킴으로서 경의가도를 잘 막고 있던 제1사단의 퇴로마저 차단하는 자충수를 두기도 했다. 결국 일주일도 안 되어 제2, 5, 7사단은 전투서열에서 사라져 버렸다.

냉정하게 보자면 병력을 축차투입하지 않았더라도 역전이 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 다만 도착한 병력을 무턱대고 전선으로 내모는 무능을 연출하지 않았다면 개전 초에 10만 명이었던 병력이 불과 일주일 만에 3만 명선까지 몰락한 비참함은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결국 서울 사수 실패는 전쟁 이전에 전력을 충실히 구축하지 못한 위정자들의 잘못도 컸지만, 군 수뇌부의 무능함 또한 크게 한몫했다.

의정부 전선을 방문한 채병덕 참모총장과 육군 지휘부. 열심히 지휘했지만 전면전을 지휘하기에는 실력이 부족했다. 중앙포토


6·25전쟁 중 유일하게 남북한군끼리만 교전을 벌였던 1950년 6월 25일부터 6월 28일까지 서울 함락 포함해서 여러 사건이 벌어졌지만, 그 이면에는 경험이 일천한 군대들이 보여줄 수 있는 한심함이 곳곳에서 표출되었다. 사실 위에 언급한 북한군의 회군과 국군의 축차투입도 그런 수많은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한마디로 6.25 전쟁 최초 3일은 일선 병사들이 치열하게 싸운 것과 별개로 무능과 무능이 만난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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