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라 틈새서 굶주리다 구조된 새끼 백구 '빽곰이' [개st하우스]

이성훈,조항미 2022. 6. 4. 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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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 리트리버와 함께 갇힌 채 사료 한 그릇으로 일주일 버텨
지난해 1월 주민들 신고했지만 "동물학대 볼 수 없다" 회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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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민영씨가 지난해 빌라촌에서 구조한 백구 빽곰이를 품에 안고 있다. 빽곰이는 방치 후유증으로 강한 공격성을 보였지만, 행동전문가 자격증까지 취득한 민영씨의 교육을 통해 사회성을 회복하고 있다. 광주=조항미 인턴PD

“빌라와 빌라의 외벽 사이에 폭 3m쯤 되는 틈새가 있는데 40대 남성이 2개월 된 백구와 8개월 된 리트리버를 가둬두고 키웠어요. 개는 두 마리나 되는데 사료는 일주일에 고작 한 그릇만 부어주니 작은 백구는 굶을 수밖에 없었어요. 먹이 때문에 다투다가 리트리버에게 물린 백구 울음소리가 동네에 가득했어요.”(제보자 임민영씨)

백구와 리트리버의 처지를 알게 된 이웃들은 견주인 40대 남성을 동물학대로 신고하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법률상 반려견을 때려서 다치게 하거나 관리 소홀로 사망 혹은 질병에 이르게 하지 않으면 동물학대로 인정받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학대는 학대입니다. 백구 빽곰이는 생후 17개월이 된 지금도 방치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백구 빽곰이는 1년 전 제보자 임민영(29)씨의 도움으로 구조됐지만 전문적 교육 없이는 반려견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빽곰이를 지켜보던 제보자 민영씨는 놀라운 선택을 하죠. 빽곰이의 재활을 돕기 위해 행동전문가가 되기로 한 겁니다.

프로 운동선수인 민영씨는 훈련과 대회 일정을 소화하는 틈틈이 행동교육을 배웠고 배운 걸 그대로 빽곰이에게 적용했습니다. 민영씨는 “빽곰이는 다른 개와 오랫동안 생존경쟁을 하도록 강요받아 공격성이 생겼지만 1년여 교육으로 사회성을 많이 회복했다”며 “입양될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난해 1월 경기도 광주 빌라촌서 발견

민영씨는 지난해 1월 경기도 광주의 지인으로부터 백구가 빌라촌에 방치돼있다는 제보를 받습니다. 당시 서울에서 라틴댄스 프로선수로 활동하던 민영씨는 쉬는 날에는 안락사 위기의 유기견들을 입양처 혹은 임보처(임시보호처)로 데려다주는 봉사활동을 해왔습니다.

지인은 자신이 거주하는 빌라촌의 건물 외벽 사이에 생후 2개월로 추정되는 백구와 8개월쯤 된 대형 리트리버가 갇혀 있다고 했습니다. 40대 중반인 견주는 주말마다 들러 사료 한 그릇을 두고 갔죠. 하나뿐인 밥그릇을 두고 두 강아지는 매일 싸웠는데 그때마다 작은 백구는 자신보다 몇 배는 큰 리트리버에게 물려 울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몇 개월째 소음이 이어지자 보다 못한 이웃들이 나섰습니다. 담장 너머의 두 강아지에게 사료를 챙겨주는 한편 동물학대 및 소음유발 등의 이유로 견주에 대해 구청과 경찰 측에 민원을 넣었습니다. 하지만 구청도, 경찰도 “현 상황을 동물학대로 판단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뜻이었어요.

현재 시행 중인 동물보호법에 따르면 반려동물에게 최소한의 먹이 제공 등을 하지 않아 상해를 입히거나 질병을 유발하는 행위(8조1항)도 학대로 분류됩니다. 하지만 동물이 사료 부족으로 상해 혹은 질병을 얻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어려워 동물이 사망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 조항을 적용하긴 어려웠습니다. 내년 시행되는 개정 동물보호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반려인이 동물보호법의 재개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박주연 동물권연구변호사단체(PNR) 공동대표는 “오랫동안 굶으면 동물은 당연히 신체적 고통을 느낀다. 학대의 정의에 ‘상해, 질병을 유발하는 행위’ 외에도 ‘신체적 고통을 주는 행위’를 포괄적으로 포함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정부도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아직까지 적극적인 개정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학대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해도 동물이 상해나 질병을 앓는다는 수의학적 정황이 부족해 후속조치를 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면서 “여러 지방정부에서 신체적 고통을 유발하는 행위를 동물학대에 포함하자는 건의가 오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구조했지만, 트라우마는 남았다
경기도 광주의 빌라촌 건물 틈새에 방치돼 있을 때 빽곰이 모습. 현행 동물보호법상 동물에게 충분한 사료와 물을 주지 않아도 동물의 부상 질병 사망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동물학대 혐의를 적용하기 어렵다. 임민영씨 제공

주민들은 견주의 방치행위를 중단시킬 다른 수단을 찾아냈습니다. 구청을 통해 민원을 제기하는 한편으로 견주에게 방치된 개들에 대한 소유권을 포기하도록 종용한 겁니다. 민원 압박이 계속되자 방치 3개월째인 지난해 3월 견주는 소유권을 포기했고 이웃 주민들은 개들을 구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때조차 믹스견인 백구는 버려졌어요. 인근 주민들은 리트리버만 구조한 뒤 백구는 그대로 두고 갔고, 2주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민영씨 홀로 백구 구출에 나섭니다. 견주로부터 소유권 포기를 약속받은 민영씨는 담을 넘어 백구를 품에 안았습니다. 방치 3개월만에 백구가 구조된 겁니다. 새하얀 얼굴이 북극곰을 닮은 녀석에게 민영씨는 빽곰이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하지만 오랜 방치생활은 어린 빽곰이에게 정신적 후유증을 남겼습니다. 사회성이 형성되는 생후 2~5개월 사이에 치열한 생존경쟁을 겪은 빽곰이는 다른 개를 향해 강한 경계심을 드러냈습니다. 이런 이유로 민영씨는 자신이 구조해 기르고 있는 다른 2마리의 유기견과 빽곰이를 합사하는 데 실패했죠. 결국 빽곰이는 별도의 방에 격리됐어요.

“빽곰이도, 저도 성장했어요”

민영씨는 수소문 끝에 12년 경력의 권미애 유기견 행동전문가를 만납니다. 권 전문가는 주1회 빽곰이의 행동교육을 진행하는 데 ‘딸깍’ 소리를 내는 훈련도구인 클리커를 활용했습니다. 클리커는 1900년대 중반부터 활용된 교육 수단으로 돌고래 닭 말 등에 교육 효과가 입증된 도구입니다. 교육은 빽곰이가 멀리 떨어진 다른 개에 공격성을 드러내지 않고 침착할 때마다 클리커 소리와 함께 보상을 해주고 둘의 거리를 좁히는 식으로 1년간 진행됐습니다.

그간 성장한 것은 빽곰이뿐이 아니었습니다. 민영씨도 한국애견협회 및 한국애견연맹이 인증하는 클리커전문가 자격증을 취득해 행동전문가가 됐습니다. 틈틈이 이론을 공부한 민영씨는 이를 빽곰이에게 적용했죠. 1년의 노력으로 빽곰이는 이제 다른 개가 2~3m 가까이 다가와도 흥분하지 않고 민영씨와 산책할 수 있게 됐습니다.

최근 경기도 광주의 야외 교육장에서 빽곰이를 만났습니다. 빽곰이는 소심하지만 사람을 좋아하는 견공이더군요. 처음 만난 기자의 냄새를 한참 맡더니 이내 ‘앉아, 얼굴’이라는 구호를 알아듣고 손바닥에 얼굴을 올려두는 개인기를 선보였습니다.

방치로 인한 공격성도 상당 부분 극복한 모습이었습니다. 동료 행동전문가 윤이쌤의 반려견과 거리가 3m까지 좁혀졌지만 빽곰이는 침착하게 민영씨와 산책을 이어가더군요. 간격이 2m로 좁혀지자 결국 짖으며 흥분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권미애 전문가는 “다른 개에 대한 공격성을 훌륭하게 줄여나가고 있다. 6개월 정도 더 교육받는다면 공격성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총평했습니다.

빽곰이가 훈련을 마치는 그날 정식 입양자 모집을 시작할 계획입니다. 어릴 적 트라우마를 딛고 반려견으로 거듭나는 빽곰이의 훈련일지는 인스타그램 (ming_dogtrainer)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광주=이성훈 기자, 조항미 인턴PD tellm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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