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목대 오르고 동고산성 거닐고··· 이성계·견훤의 발자취 따라가니 권력가의 꿈 있었네

전주/박근희 기자 2022. 5. 28. 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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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 펴내는
황윤 작가와 전주 역사 여행

‘전주(全州)’라는 지명이 역사에 등장한 건 757년 신라 경덕왕 때다. 전국의 지방 행정 구역을 한자식 지명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전주라는 이름이 처음 쓰인 것으로 알려졌다. 백제 무왕의 도시였던 익산과 가까운 전주는 신라가 삼국통일 후 힘의 무게중심을 옮겨오기 위해 만들었던 신도시이자 신라의 서쪽 진출과 연결되는 도시였던 셈. 전주는 후삼국 시대에 견훤이 등장하면서 후백제의 수도가 되고, 후삼국 시대 패권의 중심이기도 했다.

경주·가야·제주에 이어 역사 여행 에세이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전주 여행’ 편을 펴낸 황윤 작가는 “호남의 관문인 ‘전주’ 하면 흔히 떠오르는 여행 코스가 있지만, 우리 역사에서 묘하게 닮은 두 권력가 견훤과 이성계의 흔적을 따라가 보는 것도 전주를 색다르고 깊이 있게 여행하는 법”이라고 소개했다. 박물관 마니아이자 역사 저술가, 역사 스토리텔러로 활동하는 황윤 작가와 5월의 어느 날, 전주를 거닐었다.

역사 저술가로 활동하는 황윤 작가는 "조선 왕실의 전각인 전주 경기전은 서울 경복궁의 축소판"이라고 했다. 황윤 작가가 경기전 홍살문을 지나 정전으로 향하며 구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경기전’과 ‘전동성당’이 마주한 이유

전주한옥마을의 ‘만남의 장소’와 같은 전주 경기전(全州 慶基殿·이하 경기전) 앞은 체험 학습을 나온 교복 차림의 학생들부터 한복을 차려입은 젊은 커플, 나들이객이 섞여 모처럼 활기가 넘쳤다. 보물인 경기전은 조선 왕조의 발상지라 여기는 전각. 1410년 태종 이방원 때 어진을 모시는 어용전(御容殿)으로 지었다가 세종 때에 이르러 경사로운(慶) 터(基)를 위한 궁궐(殿)이라는 뜻의 경기전으로 이름을 바꿨다. 경기전 정전으로 향하던 중 홍살문 부근에서 황윤 작가는 걸음을 잠시 멈췄다. “이쯤에 서서 경기전 정전을 바라보면 마치 경복궁의 축소판 같다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규모는 작지만, 전체적인 배치와 구도가 경복궁과 매우 흡사하죠.”

경기전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됐다가 광해군 6년(1614년)에 중건했다. 조선 시대에 26점이나 그려진 이성계 어진 중 유일하게 남은 한 점을 보관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1872년 고종 때 낡은 구본을 모사해 그린 것으로 역사가 그리 오래되진 않았다. “어진 진본은 1년 중 10월 말쯤 한 차례 일반에 공개하는데 ‘어진박물관’(6월 초 재개관 예정) 홈페이지나 뉴스를 유심히 봐뒀다가 공개 날짜에 맞춰 방문하면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경기전 뒤편엔 ‘어진박물관’과 함께 ‘조경묘’가 있다. 영조 47년(1771년) 때 건립한 조경묘는 전주 이씨 시조인 이한과 시조비 경주 김씨 위패를 봉안한 왕실의 시조 사당이다. “영조가 세손인 정조에게 정통성 있는 왕위를 물려주는 방안을 고민하다 그 묘책으로 조성한 곳이 이 조경묘입니다. 내부에선 정조 친필 등을 확인할 수 있는데, 조경묘 역시 1년에 제를 지내기 전날 하루만 문을 엽니다. 아쉽지만 지금은 담 너머에서 볼 수밖에요.”

경기전 정전을 중심으로 서쪽에는 부속 건물이, 동쪽에는 세종 21년(1439년)에 설치해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관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1991년에 복원한 ‘전주사고’와 ‘예종대왕 태실 및 비’가 있다. 전체 4만9590㎡ 보호 구역은 대숲 등 그늘이 많아 잠시 쉼표 찍기 좋다.

경기전 내 대숲은 커플 사진을 찍는 이들이 줄을 잇는다. 호젓한 산책로가 있어 잠시 쉼표 찍기 좋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경기전을 빠져나오면 맞은편에 보수 공사가 한창인 전동성당이 보인다. 조선의 신전과 다름없는 경기전과 근대에 서양 문물의 전파를 통해 건립된 하느님의 신전인 전동성당이 공존하면서도 대립하는 듯 아이러니한 광경이다. “동양과 서양, 두 개의 이질적 세계관이 멀지 않은 곳에 함께하게 된 건 일제강점기 폐성령(廢城令)에 의해 풍남문을 제외한 모든 성을 없애버린 결과입니다. 경계인 성을 없애니 자연스럽게 마주 보며 ‘공존’하는 것처럼 된 것이죠”. 전동성당은 천주교 박해가 있었던 1791년 천주교인들이 성문 밖으로 끌려가 참수를 당했던 순교지에 100여년 뒤 터를 잡아 조성되기 시작했다. 건립 당시 헐린 읍성의 돌들을 옮겨와 주춧돌로 사용했다. “전동성당 가장 아랫부분에는 당시 성벽의 돌이 여전히 남아있어요. 신자들이 순교한 곳의 주춧돌이라도 가져와 지은 성당은 천주교인에 대한 의리를 보여준 곳이라 생각해서 저는 ‘의리의 성당’이라고 부른답니다.”

◇이성계가 대풍가를 불렀다던 ‘오목대’

경기전 부근엔 전주한옥마을이 있다. 일본이 전주 읍성을 헐면서 성내 중심 지역이었던 곳에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자, 조선인들이 성 밖 동쪽 영역에 근대식 한옥을 짓고 모여 살며 형성된 곳이 전주한옥마을이다. 지금은 한옥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카페부터 식당, 한옥 펜션, ‘한옥마을 뷰’의 야외 수영장까지 갖춘 호텔 등이 빼곡하게 자리 잡았다.

'오목대 전망대'에 서면 전주한옥마을 일대가 발아래 펼쳐진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오목대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태조로를 따라 남동쪽으로 나지막한 언덕에 있는 나무 계단을 오르면 오목대 전망대다. ‘오느라 수고했다’는 듯 겹겹이 물결 치듯 솟아오른 기와지붕촌 풍경이 웰컴 인사를 건넨다. 계단의 종착지에 있는 오목대는 고려 우왕 6년인 1380년 삼도도순찰사 이성계가 남원 운봉 황산 대첩을 승리로 이끈 뒤 대스타가 되어 개성으로 돌아가던 중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잔치에서 이성계는 한 고조 유방이 불렀다는 ‘대풍가’를 부르며 훗날 나라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드러낸다.

이성계가 황산대첩에서 대승하고 자축연을 열었다는 오목대. 고종의 친필을 새긴 '태조고황제주필유지' 비가 있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황 작가는 “오목대라고 하면 오목대 한쪽의 2층 누각부터 떠올리지만, 역사 속 이성계가 연회를 펼친 곳은 누각이 아니라 비가 세워진 부근의 너른 마당이었다”며 “누각은 한참 후인 1988년에 세워진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오목대는 낮도 좋지만 은은하게 조명이 켜지는 야경이 더 아름답다. 이성계의 고조부인 목조 이안사가 전주를 떠나기 전에 살았던 이목대는 오목대에서 육교(오목교) 건너편에 있다.

자만벽화마을은 6·25 때 피란민들이 정착해 살아온 동네 골목을 벽화로 꾸민 곳이다. 골목 탐험하듯 걷다보면 옥류 벽화마을, 낙수정 벽화마을까지 이어갈 수 있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자만·옥류 벽화마을은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핫플’ 된 벽화마을 위로는 후백제 城이

이목대로 가다 보면 자만·옥류 벽화마을을 지난다. 전주한옥마을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승암산 경사면을 따라 촘촘하게 자리 잡은 집 담벼락은 온통 캔버스다. 이 마을은 6·25전쟁 때 피란민들이 하나둘씩 정착하면서 생겨난 달동네다. 10년 전쯤 골목길 40여 채의 노후 주택 곳곳에 벽화를 그리며 명소가 됐다. 3년마다 새롭게 단장해오고 있는데 지금은 규모가 더욱 커지고 벽화도 다양해졌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골목길 담장을 따라 꽃, 동화, 풍경, 아이돌, 월드 스타 등을 주제로 한 벽화들이 맞이한다. 아기자기한 벽화만 감상해도 즐거운데 길의 끝자락쯤, 전주한옥마을 주변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전망은 덤이다. 자만벽화마을엔 ‘자만동 금표’가 숨어 있다. 조선 말 고종이 이안사가 태어난 일대를 성역화하며 세운 금표다. 황 작가는 “당시 아무나 접근할 수 없게 금표를 세웠으나 이미 나라의 시스템이 무너질 때쯤이어서 금표의 위력은 금세 사라졌고 이후 피란민들이 정착하면서 동네의 유명무실한 비석처럼 존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동고산성은 전주에서 후백제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유적 중 하나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동고산성 서문지'란 표지판에서 5분 정도 더 올라가면 '동고산성 건물 터'가 나온다. 주춧돌이 남아 있는 터를 표시한 구역이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자만벽화마을이 있는 승암산 정상부엔 후백제와 연결고리가 되는 유적 동고산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후백제 전주성’이라고도 한다. 벽화마을에서 언덕을 따라 숨이 가쁠 정도로 30~40분쯤 올라야 나온다. 차를 이용한다면 ‘낙수정 군경묘지’ 부근까지 진입 가능하다. 성의 초입엔 ‘동고산성 서문지’란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표지판 주변으론 돌로 쌓은 성의 흔적과 성이 무너지지 않게 덧대어 놓은 흔적이 남아 있다. 5분 정도 더 오르면 경계를 두른 무성한 풀숲이 나타난다. 주춧돌이 남아 있는 터를 표시한 구역이다. 1990년 발굴 조사에 따르면 가로 22칸, 세로 3칸, 총 66칸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황 작가는 “경회루가 전면 7칸, 측면 5칸 총 35칸인 것에 비하면 동고산성 건물터엔 얼마나 큰 규모의 건물이 있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고, 신라 말 고려 초 기와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동고산성은 통일신라 때부터 전주 지역을 통치하기 위한 중요한 성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덧붙였다. 건물터는 유심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무성한 풀로 뒤덮여 있었다. 황 작가는 “유적지 여행을 하기에는 요즘처럼 풀이 무성한 계절보다 터를 확인하기 좋은 겨울이 낫다”며 발길을 돌렸다.

동고산성 부근 낙수정 군경묘지도 지나칠 순 없다. 6·25 당시 조국을 지키다 전사한 군인과 경찰관을 안장해 놓은 곳이다. 낙수정 군경묘지와 가까이 있는 ‘재하 로스터리 카페’ 주인은 “이 동네를 찾는 이들 중 상당수는 낙수정 군경묘지를 다녀가는 외국인 관광객들”이라며 “동고산성을 알고 찾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고 했다.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엔딩 배경으로 등장해 유명해진 한벽굴. 일제강점기에 개통한 전라선 철도의 흔적이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한벽굴이 있는 바위 절벽엔 남원 광한루, 무주의 한풍루와 함께 조선시대 '호남의 삼한' 중 하나로 꼽혔던 한벽당이 있다. 한벽당에 오르면 전주천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 박근희 기자

◇드라마 촬영 명소 옆엔 ‘한벽당’

낙수정 군경묘지에서 옥류마을 전망대를 거쳐 하산하면 한벽굴(한벽터널)이 나온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전주팔경의 하나였던 한벽당 아래를 뚫어 낸 전라선 터널이다. ‘잊기는커녕 틈만 나면 나는 철길 동네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곤 했다. 멀리는 기린봉이 보이고, 오목대까지 두 줄로 뻗어 있던 레일 위로는 햇살이 눈부시게 반짝이며 미끄러지곤 했었다.’ 1931년 개통 후 이리역과 남원을 오가며 한벽굴을 지나던 1970~80년대 철도 풍경은 전주 출신 소설가 양귀자의 단편소설 ‘한계령’에 등장하기도 한다. 세월이 흘러 철도는 사라지고 전주 시민의 산책로가 된 지 오래. 한벽굴은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남주혁·김태리 주연의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엔딩 장면의 배경으로 나오면서 인근 서학동 예술마을, 전주수목원 등과 함께 젊은층의 핫플이 됐다. 한벽굴을 빠져나와 오른쪽 전주천 산책로로 진입하면 한벽당과 만난다. 한벽당은 조선 초기 문신이자 개국 공신인 최담이 태종 4년에 전주로 낙향해 지은 누각. 처음에는 그의 호를 따서 ‘월당루’라 했으나 여러 차례 중수하면서 한벽당으로 바뀌었다. 남원의 광한루, 무주의 한풍루와 함께 호남의 삼한(三寒)으로 알려져 시인 묵객들이 즐겨 찾으며 풍류를 즐겼다 전해진다.

국립전주박물관의 '고창 봉덕리무덤 출토 금동장식신발'. 5세기 중반 고창 봉덕리 지역에 살았던 정치 세력의 위상을 잘 보여주는 유물이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전주 박물관 속 보물 찾기

‘박물관 보는 법’을 펴내기도 했던 황윤 작가는 “어느 도시에서든 박물관 관람은 역사 여행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했다. 그런 면에서 국립전주박물관은 전주 역사 여행의 퍼즐을 맞춰볼 수 있는 좋은 공간이다. 동고산성에서 출토된 ‘전주성(全州城)’ 수막새부터 이성계 어진, 18세기 전주지도 등과 함께 ‘완주 갈동 출토 잔무늬 청동거울’과 ‘고창 봉덕리 출토 금동장식신발’도 볼 수 있다. 황 작가는 “특히 고창 봉덕리 금동장식신발은 한성백제 시절 금속 공예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표 유물”이라며 엄지척을 했다. 그는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을 관람하고, 해당 유물이 출토된 곳으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역사 여행을 확장하는 방법”이라고 귀띔했다.

황윤 작가가 국립전주박물관과 함께 역사 여행 코스로 추천한 '전북대학교 박물관'에선 완주 봉림사지 삼존석불을 만날 수 있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전주 여행을 마무리하며 쉼표를 찍은 '전주수목원' 연못가에서 황윤 작가는 말했다. "마치 모네의 그림 '수련' 같아요." 한국도로공사 전주수목원은 '전주의 지베르니'라는 별칭이 있다.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 전주 비빔밥도 울고 갈 닭곰국시 맛의 비결 ]

가성비 좋기로 소문난 전주 맛집

전주에서 맛집을 쉽게 찾으려면 ‘전대 맛집’부터 검색하면 된다. 가격 부담이 적고 맛 좋기로 소문난 식당이 ‘전대(전북대)’ 주변에 모여 있다. 금암동 정둔면옥은 황윤 작가가 책 ‘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전주 여행’에도 소개한 닭곰국시(9500원) 집. 뚝배기에 부추를 얹은 뻘건 닭곰탕과 소면, 공깃밥을 함께 내어준다. 뼈째 나온 토종닭을 먼저 건져 먹고 소면을 적셔 먹은 후 공깃밥을 말아 먹는 게 코스다. 색깔만 보면 국물이 매울 것 같지만, 들깨가 들어가 고소하면서 적당히 칼칼하다. 주인은 “새우와 표고 가루 등 여덟 가지 재료를 넣어 국물 맛을 낸다”고 했다. 전골 형식으로 나오는 오징어철판국시(9500원·2인 이상)는 만두, 부추, 소면, 고기, 오징어 등 건더기를 건져 먹고서 국물에 밥을 볶아 먹으면 맛있다.

우족과 건더기를 푸짐하게 넣은 '금암우족탕'의 한우우족탕. / 주민욱 영상미디어 기자
닭다리가 뼈째 들어있는 '정둔면옥'의 닭곰국시. / 박근희 기자

전주 고속터미널 부근 금암우족탕은 더운 여름에도 뜨끈뜨끈한 한우 우족탕(1만3000원) 한 그릇 하려는 이들이 찾는 곳. 3대째 우족탕 맛을 이어오고 있다. 1970년대 농수산물 시장 부근 금암동 약강다리에서 시장 상인들의 허기를 채워주던 ‘봉남회관’ 우족탕이 금암우족탕의 시작이다. 뽀얀 국물에 고기가 푸짐하게 들어간다. 여기에 밑반찬과 함께 특수 부위 고기를 접시에 따로 담아준다. 국물이 진해 보약을 먹은 듯 든든하다. 한우 갈비탕(1만4000원), 전복 우족탕(1만5000원), 한우 특우족탕(1만7000원)도 있다.

전주의 옛 풍경을 묘사한 양귀자의 소설 ‘한계령’에는 한벽당 주변 ‘오모가리 매운탕’ 얘기도 나온다. 오모가리는 전라도 사투리로 뚝배기라는 뜻. ‘한계령’ 속 묘사한 것처럼 ‘버드나무 줄기 축축 늘어진 천변의 나무 평상에 앉아’ 천변의 야외 평상에 앉아 오모가리 매운탕을 맛볼 수 있는 식당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화순집’ ‘남양집’ ‘한벽집’ 세 식당이 오모가리촌을 이루고 있다. 대개 새우탕부터 피라미탕, 메기탕, 쏘가리탕 등 민물고기를 넣고 끓인 탕을 전문으로 하며 가격은 인원수에 따라 새우탕 3만5000원부터 쏘가리탕 10만원까지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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