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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세가 돼 뿌리 찾기 위해 허허벌판에 홀로 섰습니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 입양인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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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2-05-22 12:00:00 수정 : 2022-05-22 14:2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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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처럼 살아야했던 과거 딛고 시작한 뿌리찾기
공식절차 통해 입양…관련 정보 제공 받을 곳 없어
미국으로 입양되기 전 서울 동작구의 한 보육원에서 지내던 당시의 애슐리 모습. 본인 제공

1974년 한국에서 태어난 애슐리 화이트(한국명 이은애)는 이번달부터 본격적인 뿌리찾기에 나섰습니다. 50의 나이가 가까운 이 시점에 친모를 찾는 것을 비롯해 출생의 기억을 더듬기 시작한 겁니다. 단서는 거의 없습니다.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미국으로 입양된 1982년 당시와 비교해 더 알 수 있는 정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미국의 가정에 입양돼 잘 살아오던 애슐리가 왜 갑자기 뿌리찾기에 나섰을까요.

 

◆백인처럼 살아야했던 과거 딛고 시작한 뿌리찾기

 

애슐리는 이달 초 뿌리찾기를 목표로 한국에 왔습니다. 입양된 이후 세 번째 방한입니다. 첫 번째는 2000년 무렵 가벼운 마음으로 사흘간 회사 동료들과 관광하듯 한국을 찾았습니다. 두 번째는 2004년 무렵이었고,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어린 시절의 애슐리는 보통의 해외입양인들처럼 자신이 태어난 나라, 땅에 대한 그리움으로 힘겨워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1982년 미국 오리곤주의 메드포드로 입양된 이후 백인처럼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애슐리는 자신을 제외한 모두가 백인인 상태로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애슐리와는 잘 교제하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었지만, 사실 부모님이 그러한 상황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준 적은 없었습니다.

 

한국인, 아니 아시아인으로서의 감정을 처음 느낀 것은 학창시절을 마친 뒤 항공사 승무원으로 일하기 시작한 1995년 무렵이었습니다. 백인들에 둘러싸여 살았던 애슐리에게 많은 아시아인 직장 동료들이 생겼습니다. 자신과 겉모습이 비슷한 사람들을 많이 만난 것도 놀라웠지만, 본격적인 것은 업무 상황이 찾아오면서였습니다. 승객 중 아시아인들이 모든 요청을 백인 승무원이 아닌 애슐리를 통해서 했던 겁니다. 질문도 쏟아졌습니다. “일본인인가?”, “중국인인가?” 등등의 질문에 한국과 관련이 있다고 답한 적이 있었는데 곧바로 “북한 출신인가, 남한 출신인가”라는 질문이 이어지는 식이었습니다.

현재의 애슐리. 본인 제공

최근 뿌리를 찾기 위해 매년 수천 명의 해외입양인이 한국을 찾고 있습니다. 대부분은 몇주~몇달의 일정을 잡기 때문에 직장을 휴직하거나, 가족에게 양해를 구할 뿐 아니라 한국에서 장기간 보내기 위해 금전적으로도 많은 준비를 해야 합니다. 애슐리의 경우 승무원으로 일하면서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던 만큼 한국을 찾는 것 자체는 그렇게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첫 한국 방문도 회사에서 공짜 비행기표가 나온 덕분에 가능했습니다. 비행이 한 번 끝날 때마다 며칠 정도 여유롭게 휴가가 주어지던 차에 휴가를 보낼 해외 장소로 한국을 택했던 겁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뿌리를 찾는다거나 한국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없이 일반 관광객마냥 사흘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2004년 무렵 열흘 남짓한 일정으로 한국을 찾았을 때는 자신의 입양절차를 진행한 홀트아동복지회와 입양되기 전에 지냈던 서울 동작구의 보육원을 찾았습니다. 당시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친모의 이름과 현재 살고 있는 주소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뿌리찾기를 시작한 사실에 대해 알게 된 양부모가 매우 낙담한 부분이었습니다. 이제껏 자신을 잘 키워줬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온 가족이 크게 실망하는 모습을 본 애슐리는 결국 뿌리찾기를 중단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해 양모가 돌아가신 뒤부터 다시 뿌리찾기를 시작해야겠다고 생각했고, 1년 남짓이 지나 이렇게 세 번째로 한국을 찾았습니다.

뉴욕에서 패션 디렉터로 활동하던 당시 애슐리. 본인 제공

애슐리는 입양 뒤 좋은 가정에서 잘 자라며 다양한 경험을 쌓았습니다. 대학에 진학하는 대신 항공사 승무원으로 9년 가까이 일했고, 이후에는 대학에 진학해 IT(정보통신) 분야를 전공한 뒤 2년간 인도에 가서 관련 분야의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대도시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뉴욕의 모델 에이전시에서 인턴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돼 패션업계에 뛰어든 뒤 패션 디렉터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MBA(경영학석사)까지 취득해 현재에는 금융사에서 부동산 관련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공식절차 통해 입양됐지만 기록은 없다

 

본격적으로 뿌리찾기에 나선 애슐리는 처음부터 벽에 부딪혔습니다. 2004년 무렵 홀트아동복지회에서 받은 친모에 대한 서류를 분실해 관련 정보를 다시 받기 위해 홀트아동복지회를 찾았지만, 답변은 “없다”였기 때문입니다. “전에 준 정보를 그대로 주면 되는데 왜 안 되는 거냐”고 반문했지만, 오히려 “우리는 그런 정보를 준 적도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습니다.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한 길이 막히자 다음으로 기댈 수 있는 곳은 입양가기 전에 지냈던 보육원이었습니다. 하지만, 보육원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2004년 무렵에는 애슐리가 보육원에서 지내던 당시의 사진들을 보여줬지만, 이번에는 그마저 허락하지 않았고 “아무런 정보가 없다”는 입장만 되풀이했습니다.

 

정부측인 아동권리보장원을 찾았지만, 아직까지 별다른 소득은 없습니다. 관할 경찰서인 동작경찰서에서도 “함께 보육원을 방문해줄 수는 있지만, 공식적으로 정보를 달라고 할 수는 없다”고 했습니다. 엄연히 민간기관인 입양기관에게 구체적으로 요구할 수 있는 근거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을 것 같긴 합니다.

입양절차가 진행되던 과정에서 홀트아동복지회가 애슐리에 대해 작성한 보고서. 본인 제공

하지만, 애슐리의 입양서류들을 살펴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우선 애슐리는 태어난 이듬해인 1975년 노량진 파출소를 통해 인근의 보육원에 인계됩니다. 애슐리는 생후 1년 가까이 친모와 지낸 뒤 보육원에 들어갔고, 친모가 보육원에서 일하며 3년 가까이 더 함께 지낸 것으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친모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약 5년간 보육원에서 지낸 애슐리는 1980년 홀트아동복지회에 인계되며 본격적인 입양절차를 밟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방한 당시 만났던 보육원장은 “미국에서 나이가 좀 있는 아이를 원하고 있다고 해서 은애(애슐리)를 보내기로 했는데, 당시에 친모가 은애를 찾고 있는 상황을 알고 있어서 고민이 됐다(딜레마였다)”고 고백했습니다.

 

매우 어린시절이었지만, 애슐리에게도 당시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있습니다. 보육원장이 “나쁜 사람이 너를 찾으러 오고 있으니 벽장에서 나오지 말라”며 애슐리를 숨겼습니다. 이윽고 남녀가 찾아와 자신의 이름을 크게 부르며 모든 방을 뒤졌지만, 애슐리는 보육원장의 말대로 벽장에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비명까지 지르며 울부짖던 여성의 목소리는 얼마 후 잦아들었고, 결국 남성과 함께 떠났습니다. 당시에는 ‘보육원이 나에게 가장 안전한 장소’라는 사실만이 중요했지만, 40여년이 지난 지금의 애슐리는 “그때 그 남녀가 내 친모와 친부였던 것 같다”며 “벽장에서 나갔더라면 현재의 내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고 말했습니다.

미국 오리건주 미드포드에서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애슐리 모습. 본인 제공

입양절차에 돌입한 애슐리에게 부여된 번호는 K80-2694. 이는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1980년에 2694번째로 입양된 아이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애슐리가 입양된 해가 1982년이고, 서류 내용을 종합해보면 80이란 숫자는 입양절차가 시작된 해, 혹은 해외입양 승인이 떨어진 해로 추정됩니다. 보건복지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80년에 해외입양된 아이는 4144명이었고, 1982년에는 6434명이 해외입양됐습니다. 해외입양은 1985년 8837명으로 정점을 찍은 뒤 이후 점차 감소했지만, 지난해에도 189명의 한국 아이들이 해외입양의 길을 떠났습니다.

 

구체적으로 입양절차를 살펴보면 보육원 소속이었던 애슐리는 1980년 보육원이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는 서류를 홀트아동복지회에 전달하는 것이 첫 단계였습니다. 이후 서류를 살펴보면 홀트일시보호소에서 애슐리를 기아(미아)로 인수해 홀트아동복지회를 후견인으로 지정하는 절차를 서울시가 확인합니다.

 

당시에는 한자 이름이 필수였기 때문인지, 입양신분을 만드는 과정에서 ‘殷愛(은애)’라는 한자이름과 함께 한양이씨로 본을 창설하는 공식 절차가 진행됐습니다. 입양서류를 살펴보면 한양이씨라는 본(일가)을 만드는 것은 서울 마포구(당시 홀트아동복지회 소재지)청장이 보증하고, 서울가정법원이 허가한 것으로 돼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담긴 서류는 애슐리가 입양되던 당시 양부모가 홀트아동복지회로부터 전달받은 것입니다. 이후에 추가된 정보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보육원과 홀트아동복지회는 물론, 경찰서와 구청, 시청, 가정법원 등이 모두 과거의 서류에 등장하지만, 40여년이 지난 현재 애슐리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곳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애슐리 화이트(한국명 이은애)에게 한양이씨의 본을 부여하는 서류. 본인 제공

◆무분별한 입양의 책임은 누구에게…

 

2년 가까이 입양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홀트아동복지회는 입양대상 아동인 애슐리에 대한 보고서를 수시로 작성합니다. 아마도 미국의 입양기관 혹은 양부모에게 전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측됩니다.

 

1980년 12월에 작성된 보고서를 살펴보면 애슐리에 대해 10개의 치아가 있고, 편식하지 않으며 매끼 밥 한 공기 정도를 섭취하며, 하루에 두세 번의 간식을 즐긴다고 돼있습니다. 스스로 화장실을 가며 처음 대하는 성인에게 쉽게 적응하고, 율동·동요 등의 교육을 받고 있다는 점도 기록돼있습니다. 무엇보다 신장과 체중이 연령에 맞게 자라고 있는 건강한 아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1981년 12월에 작성된 보고서에는 치아가 12개 있고, 신장과 체중이 증가했을 뿐 아니라 표현력과 이해력도 증가했다고 돼 있습니다. 같은 나이의 아이들보다 무용 능력이 뛰어나며 노래도 다른 아이들보다 빨리 배웠다고 합니다. 자신보다 어린 아동을 솔선수범해 도우려 하며 처음 보는 어른도 붙임성있게 잘 따랐다고도 합니다. 결국 신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지적발달상으로 별문제가 없기 때문에 ‘이해 있는 가정에 입양되면 바람직하게 성장할 것’이라는 점과 ‘입양을 조급히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1982년 애슐리가 미국으로 입양이 됐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양부모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건강하다던 애슐리가 시력과 청력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소리를 잘 듣지 못했고,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도 거의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양부모는 곧바로 홀트아동복지회에 “왜 이러한 사실을 하나도 말하지 않았느냐”며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홀트아동복지회는 서신을 통해 우선 “보육원 측에서 추가로 전달받은 내용이 없다”며 “보육원에 계속 전화하고 이은애(애슐리)의 친모가 다니던 교회에도 연락해봤지만 실패했다”고 변명합니다. 그러면서 “홀트측과 보육원측은 이은애의 친모가 친딸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전화하거나 방문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애슐리의 친모가 딸을 데려가기 위해 보육원을 찾았고, 보육원장에게 딸을 데려가고 싶다고 했으며, 딸이 입양된 이후에도 찾으려는 노력을 지속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입양 서류상에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는 행동이 빈번하다’, ‘시력에 큰 문제가 있는지 의사의 점검을 받았지만 문제 없어 보인다는 진단을 받았다’ 등의 언급이 있습니다. 애슐리 또한 보육원 시절에 “중이염을 항상 앓았던 탓에 항상 약을 발랐고, 정도가 심해졌는지 그 약의 냄새도 강해졌다”고 기억합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한 언급 없이, 입양하기에 문제가 없는 신체적·정서적으로 건강한 아이라는 점만을 강조한 겁니다.

 

어쨌든 양부모는 애슐리를 파양하지 않았습니다. 귀에 6번, 눈에 2번 등 어린 나이에 수많은 수술을 거쳐 지금은 다행히도 건강히 잘 살고 있습니다.

 

흔히 우리나라의 해외입양에 대해 6·25 전쟁 이후 발생한 수많은 전쟁고아 및 미군 주둔 과정에서 탄생한 혼혈아 문제를 국내 차원에서 해결할 수 없었기에 시작됐다고들 합니다. 차라리 선진국으로 입양보내는 것이 아이에게 훨씬 나은 선택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1970년대에 급증한 해외입양은 ‘한강의 기적’을 바탕으로 서울올림픽을 치른 1980년대에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애슐리의 입양 과정을 보고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애슐리의 경우 다행히 좋은 가정을 만났지만, 뿌리를 찾겠다며 성인이 돼 한국으로 돌아오는 수만 명의 해외입양인 중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러한 방식으로 수십 년 전 진행된 해외입양에 대한 책임과 현재 자신 뿌리에 대한 아무런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책임은 과연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요.


김준영 기자 papenique@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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