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회고록 낸 미국인 "왜곡 반복 안 돼, 윤석열 진실 알아야"
[소중한 기자]
▲ 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 현장을 목격하고, 회고록 ‘나의 이름은 임대운’을 발간한 데이비드 돌린저(한국명 임대운). |
ⓒ 권우성 |
데이비드 돌린저(David Dolinger), 한국 이름 임대운(林大雲). 미국 평화봉사단 자격으로 1978년부터 전남 영암에서 활동한 그는 1980년 5월 광주의 참상을 생생히 목격했다.
돌린저는 42년이 지난 올해 5월 <나의 이름은 임대운>이란 제목(영문판 < Called by another name >)의 회고록을 내놨다. 한국을 찾은 그는 11일 오후 서울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나 "5.18 왜곡이 반복돼선 안 된다. 광주의 행동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가 배워야 할 점이며 격찬 받아야 할 일"이라며 "(윤 대통령은) 5.18 당시 그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하게 된 진실한 이야기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회고록은 돌린저가 직접 목격한 광주의 참상뿐만 아니라 당시 광주시민들의 상황, 감정, 마음가짐을 잘 묘사하고 있어 기록물로서 큰 가치를 지닌다. 그는 5.18 이후 메모, 사진 등 수많은 기록물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었다.
▲ 5.18민주화운동을 목격한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1982년 초 워싱턴DC의 한인교회에서 연설을 하기 위해 1981년 8월(혹은 9월) 직접 한국어로 쓴 수기. |
ⓒ 데이비드 돌린저 |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진압한 5월 27일 전날) 토요일에 도청에 모여 있던 사람들과의 대화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고 죽기로 결정했으며 그 결정이 미래를 변화시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래 돌린저와의 인터뷰 전문이다.
"5.18 왜곡 알고 책 출간 결정"
- 그동안 한국에 여러 차례 다녀간 걸로 아는데, 이번 한국행은 얼마 만인 건가요?
"바로 직전이 2019년 10월이었습니다. 굉장히 오래전이라고 느껴집니다. 한국에 다시 방문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고 한국사람, 한국음식을 너무 사랑합니다. 한국은 고향 같습니다. 두 번째 고향이죠. 한국에 머물 때마다 그 기간이 너무 짧다고 생각합니다."
- 예전에 한국에 왔을 때 사진을 보니 가족과 함께 있더라고요. 이번에도 가족 분들과 함께 왔는데 동행하는 이유가 있나요?
▲ 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 현장을 목격하고, 회고록 ‘나의 이름은 임대운’을 발간한 데이비드 돌린저(한국명 임대운). |
ⓒ 권우성 |
- 이번에 5.18민주화운동 시점을 중심으로 한 회고록을 출간했습니다. 언제부터 회고록 출간을 생각했고, 그런 마음을 먹은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저는 사실 1980년부터 계속해서 회고록을 써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항상 제 속에 있는 걸 써내고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책 출간을 결정한 계기는 광주항쟁의 역사가 왜곡되는 것을 봤기 때문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5.18 당시 광주에 외국인이 있었다'는 것 정도만 알거나, 아니면 그마저도 잘 모릅니다. 광주에 외국인 기자들만 있었던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광주에 기자들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인들이 왜 남기로 결정했는지, 그 결정을 어떻게 내렸는지, 그리고 그 결정이 광주와 전라도 사람들 때문이라는 점을 인정받았으면 합니다. 특히 저는 (평화봉사단으로 함께 활동했던) 팀 원버그(Tim Warnberg)란 사람이 어떤 일을 했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인정받길 원합니다. 42년이 지난 지금도 팀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 회고록에도 그와 관련된 내용을 담았습니다."
- 한국인들이 팀을 어떻게 기억했으면 합니까?(관련기사 : 광주항쟁 곳곳에 등장한 이 미국 청년을 아십니까 http://omn.kr/1nj3g)
"팀은 광주와 광주사람들을, 한국과 한국사람들을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그는 (5.18 당시) 광주에 남아야 한다고, 광주의 비극에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팀은 자신이 언제든 떠날 수 있다는 걸 잘 알았지만 그와는 반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는 한국과 한국사람들이 폭력과 탄압을 당하지 않아야 한다고, 그래서 (외국인이지만) 우리가 함께 항거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린 미국인, 한국인이기 이전에 모두 인간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억압, 폭력, 탄압이 있을 때 자발적으로 맞서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임대운, 저를 돌아보게 하는 이름"
- 회고록 작성을 위해 40여 년 전 기억과 자료를 다시 더듬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저의 모든 기록은 하나의 커다란 상자에 담겨 있습니다. 그것이 글이 되도록, 책이 되도록 다시 조직화하는 게 어려웠습니다. 또한 (광주의 참상을 담은) 그것을 다시 봐야 한다는 것이 고통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 고통을 감내하며 기억을 되새겼습니다. 출간을 결정하고 그 고통이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그럼에도 밀어붙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회고록 제목이 영문판은 < Called by another name >, 국문판은 <나의 이름은 임대운>입니다. 이 같은 제목을 정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항상 가슴에 품고 있던 제목입니다. 저는 평화봉사단에 참여하며 한국 이름을 부여받았습니다. 한국에 살면서 미국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거나 그들이 말을 걸어왔을 때를 제외하곤 한국 이름으로만 불렸습니다. 한국에서 저는 임대운이었고 데이비드는 잊혔습니다. 그 이름에 제가 자부심을 갖고 있고 그것이 알려지는 게 중요했습니다. 임대운은 저를 돌아보게 하는 이름입니다."
- 한국 이름 '임대운'은 어떻게 해서 정하게 됐나요. '임'은 숲, '대운'은 '큰 구름'이란 의미인데 그 뜻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 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 현장을 목격하고, 회고록 ‘나의 이름은 임대운’을 발간한 데이비드 돌린저(한국명 임대운). |
ⓒ 권우성 |
- 회고록에는 직접 목격한 광주의 참상과 당시 광주시민들의 상황, 감정, 마음가짐이 잘 묘사돼 있습니다. 당시 근무지는 영암이었고, 어떻게 보면 현실을 외면할 수도 있는 입장이었는데 그렇지 않고 광주의 참상을 목격하고 기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장 먼저 친구들이 염려됐습니다. (5월 18일 광주에 있다가 영암으로 돌아온 뒤) 화요일(5월 20일)에 모든 통신이 단절됐습니다. 평화봉사단 미국인 친구들뿐만 아니라 한국인 친구들이 무사한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죠. 그리고 말로 설명하긴 어려운데 당시엔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광주에 가야겠다'는 마음이었습니다."
- 5.18 직후 평화봉사단을 나와야 했고 그 외에도 여러 신변의 어려움을 느낀 것으로 압니다. 당시로선 두려움을 느끼진 않으셨는지요?
"진실로 두려웠던 적은 없습니다. 광주에서 한 일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옳다고 생각했으며 한국과 한국정부가 저에게 해를 끼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과 평화봉사단 측에선 내가 한 일 때문에 위험할 수도 있다고 했으나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 최근 당신이 제공한 자료를 토대로 1982년 초 워싱턴DC 한인교회에서의 연설문을 위해 썼던 '한글 수기'를 <오마이뉴스>가 보도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연설문을 작성하던 마음가짐과 연설 당시의 상황, 한인들의 반응 등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모든 사실을 담으려고 했고, 청중들이 알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을 모두 이야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준비한 연설문 중) 일부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연설을 이어가다 주저앉아 버렸고 말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됐기 때문입니다. 연설문 중 나머지 부분은 다른 사람이 읽었습니다. 당시 연설을 들은 한국인들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1982년엔 광주의 실상을 다 알지 못했습니다. 연설은 현장에 있던 한국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많은 이들이 절망하고 울었습니다."
"회고록은 작은 징검다리, 앞으로도 계속"
- 1980년 당시 광주를 떠올려보면 여러 사람들과 장면들이 떠오르실 텐데요. 그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과 장면이 있다면요?
"제 마음 상태에 따라 다른데요.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던 모습입니다. 그때 한 할머니가 계속 주먹밥을 주며 사람들이 제대로 먹는지 걱정하고 있었는데 정말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윤상원 등 기억에 남는 사람이 많지만, 특히 (계엄군이 전남도청을 진압한 5월 27일 전날) 토요일에 도청에 모였던 사람들과의 대화를 잊을 수 없습니다. 그분들은 자신들이 죽을 것을 알고 있었고 죽기로 결정했으며 그 결정이 미래를 변화시킬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 '5월 18일'이 국가기념일로 인정된 지도 한참이 지났는데, 여전히 5.18은 왜곡과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번 회고록을 출간을 맞아 이 같은 상황에 대해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다면요?
"1980년 5월 18일과 이후 열흘 동안 광주에서 일어난 일은 한국 민주화의 큰 걸음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양심에 입각해 발언했고 시민들이 이를 들어줬으며 시민들과 학생들이 함께 폭력, 야만, 억압을 허용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5.18이 없었으면 1987년 6월항쟁이 가능했을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 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서 현장을 목격하고, 회고록 ‘나의 이름은 임대운’을 발간한 데이비드 돌린저(한국명 임대운). |
ⓒ 권우성 |
- 5월 10일 취임한 한국의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8일 만에 5.18민주화운동 42주년을 맞게 됩니다. 그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윤 대통령이 광주사람들, 특히 5.18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하게 된 진실한 이야기를 알아야 합니다."
- 당신의 삶에서 이번 회고록 출간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습니까? 이후의 삶은 어떻게 이어갈 예정입니까?
"회고록 출간은 작은 징검다리에 불과합니다. 제 삶의 초점은 변하지 않고 회고록 이후에도 (5.18 관련 활동은) 더해질 것입니다. 한국에서 평화봉사단으로 활동하며 경험하고 기록한 것을 더 이야기하며 살 것입니다."
*통역 : 이대훈 피스모모 평화·교육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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