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임대운..42년 전 5월의 광주에서 다시 태어났다네

조일준 2022. 5. 14.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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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도청에서 하룻밤 보낸 유일한 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
"기억하기는 어렵지 않았지만, 힘든 시절 돌아보는 고통 커"
5·18 민주화운동의 목격자인 데이비드 돌린저가 2022년 5월11일 서울 마포구의 한 스튜디오에서 진행한 <한겨레21> 인터뷰에서 자신이 펴낸 회고록을 들고 있다. 김진수 선임기자

“나는 42년 동안이나 회고록을 쓰고 또 썼습니다.”

미국인 데이비드 돌린저(66)가 1980년 광주항쟁에서 42년이 흘러서야 회고록을 낸 이유를 설명한 첫 문장이다. 그는 <한겨레21>과의 전자우편 인터뷰에서 “내(가 경험한) 이야기가 5·18을 둘러싼 역사의 ‘공식적인’ 일부가 되는 게 중요하다고 판단해 회고록 출간을 결심했다”고 밝혔다.

돌린저는 광주항쟁의 첫날(5월18일)부터 마지막 날(5월27일)까지 현장을 목격한 소수의 외국인 중 한 명이다. 계엄군이 전남도청으로 쳐들어올 것이란 소식을 듣고 광주 시민과 생사를 같이하겠다며 도청에서 하룻밤(5월24일)을 보낸 유일한 외국인이기도 하다. 지금은 미생물학·면역학 박사로, 미국에서 감염병 진단법 개발에 앞장서고 있다.

평화봉사단으로 영암보건소 근무

돌린저 회고록은 광주항쟁 42주년을 앞둔 2022년 5월 둘째 주에 한국에서 영문판과 한국어판이 동시에 출간됐다. 영문판은 온라인서점 아마존에서 한국사 부문 1위에 올랐다. 회고록 제목은 <또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다>(Called by Another Name), 우리말 번역본 제목은 <나의 이름은 임대운>(객 펴냄)이다.

그의 회고록은 앞서 2020년 5월 돌린저의 친구인 폴 코트라이트가 쓴 <5·18 푸른 눈의 증인>(원제는 Witnessing Gwangju)에 이어 외국인이 쓴 광주항쟁 회고록으로는 두 번째다(https://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8678.html). 둘 다 5·18기념재단 연구위원을 지낸 최용주 박사(사회학)가 번역했다. ‘또 하나의 이름’ 임대운은 돌린저가 22살이던 1978년 미국 평화봉사단(Peace Corps) 단원으로 한국에 처음 왔을 때 한국어 선생님이 지어줬다. 숲(林)과 큰 구름(大雲). 돌린저는 “이 이름이 아주 마음에 든다”고 했다.

돌린저는 2019년 한국을 방문한 지 3년 만인 최근 다시 가족(아내와 아들)과 함께 한국을 찾았다. <한겨레21>은 그의 한국 방문에 앞서 전자우편으로 문답을 주고받았고, 한국에 도착한 다음날인 5월11일 서울에서 그를 만나 인터뷰했다.

1980년 당시 전남 영암의 보건소에서 결핵 환자를 돌보던 돌린저의 인생은 ‘5월 광주’와 함께 큰 변화를 맞았다. 5월16일 평화봉사단 동료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광주에 가면서였다. 그날 저녁 광주역에서 전남도청까지 학생들의 평화적 횃불시위 행진을 지켜볼 때까지만 해도 향후 벌어질 비극은 상상조차 못했다. 군부가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 5월18일, 통행금지 시간이 앞당겨지면서 영암으로 돌아가는 버스가 일찍 끊겼다. 돌린저는 이날 광주의 거리 곳곳에서 방독면 차림의 무장군인들이 저지르는 무자비한 폭력을 보고 들었다. “서울의 시위와 다르지 않았는데도 군인들이 길거리에 보이는 젊은이들을 진압봉으로 잔인하게 구타하고 도망치는 사람들을 추격해 잡아들였어요.” 돌린저는 군인들이 왜 그렇게 잔인하게 진압하는지 알고 싶었다고 했다.

5월19일 첫차를 타고 영암으로 돌아가서도 돌린저는 군인들의 잔혹성을 이해할 수 없었다. 5월21일, 그가 직무교육을 받으러 다시 광주로 향한 날, 광주의 모든 전화 회선이 끊겼다. 버스도 나주에서 멈춰 섰고, 더는 갈 수 없었다. 돌린저는 나주에서 광주까지 걸었다. 이날은 부처님 오신 날이자, 군부가 처음으로 시민에게 발포한 날이었다. 돌린저는 이날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상공을 낮게 맴돌던 군용 헬리콥터에서 군인들이 몸을 내밀어 지상의 시민들에게 총을 쐈어요. 나는 그 자리에서 온몸이 얼어붙었습니다.”

1980년 5월24일, 전남대병원 옥상에서 독일 공영방송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맨 왼쪽)가 목격자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다. 데이비드 돌린저(맨 오른쪽)는 외국 기자들의 취재와 통역을 적극 도왔다. 

헬기 사격 뒷받침할 총상자 엑스레이 사진

헬기 사격 증언은 계엄군이 광주에서 잠시 후퇴한 5월22일 돌린저가 외국 기자들의 취재를 도우려 함께 간 광주기독병원에서도 뒷받침된다. “의사들이 총상을 입은 한 젊은이의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줬어요. 총알이 왼쪽 어깨로 들어가 (몸을 관통해서) 오른쪽 엉덩이로 빠져나간 흔적이 뚜렷했습니다.” 이런 탄도는 아주 높은 곳에서 내려쏜 총탄에 맞은 정황의 증거다. 돌린저는 “다른 총상 엑스레이 사진에는 총알이 몸속에서 부서져 있었다. 국제법으로 금지된 연성탄”이라고 했다. “총알이 몸속에서 잘게 부서지면서 장기를 파괴합니다. 적국과 전쟁할 때도 쓰면 안 되는 총알이에요.”

전두환씨가 죽을 때까지 헬기 사격을 부인하고 계엄군의 총격은 정당방위라고 주장한 것에, 돌린저는 “거짓말이다. 무고한 시민에게 발포한 증거는 차고 넘친다”고 단언했다. 그는 “어떻게 헬리콥터에서 사람들의 등 뒤에 총을 쏠 수 있나? 어떻게 사람을 죽도록 구타할 수 있나? 어떻게 사람을 총검으로 죽이고 신체를 끔찍하게 훼손할 수 있나? 그런 게 정당방위인가?”라고 되물었다.

돌린저는 당시 광주에 있는 동안 외국 기자들의 취재와 통역을 도맡다시피 도왔다. 광주의 참상을 처음 세계에 영상으로 알린 독일 공영방송의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도 이때 만났다. 그가 기자들을 안내한 전남대병원과 기독병원은 응급실뿐 아니라 건물 바깥 공터까지 주검과 부상자로 넘쳐났다. 그는 회고록에 “어떻게 인간이 인간에게 이런 짓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광경을 보고도 모른 체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잘못”이라고 썼다. “이곳에 남아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마음먹은 이유다.

돌린저는 42년 전 일을 어떻게 정확하고 생생하게 회고록에 담을 수 있었을까? 그는 “수많은 메모와 미국의 집에 보낸 편지, 그리고 다양한 버전의 회고록 초안들을 보관했다.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끊임없이 기억하려 했다”고 말했다. 증언자로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믿음에서다. “당시 일을 기억하는 건 힘들지 않았습니다. 정말 힘든 것은 그 시절 기억을 되돌아보고 글로 쓰는 고통이었지요. 내가 봤던 사망자들, 내가 만났지만 그 뒤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수많은 사람을 떠올리며 글을 쓰다보면 절로 눈물이 나왔어요.”

극단적 충격과 공포가 심리적 상흔을 남기진 않았을까? 돌린저는 “사람들이 내게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었다고 진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충격에) 굴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 결심을 굳건하게 다지는 데 활용했다”고 말했다.

돌린저는 회고록에 “광주는 내가 다시 태어난 곳”이라고 썼다. 무슨 뜻인지 물어봤다. “광주는 세상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내가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나의 눈을 틔워준 곳입니다. 광주는 내 삶을 돌아보게 했고, 대학원에서 의료과학을 공부하겠다는 결심에 힘을 실어줬죠. 광주항쟁은 내가 다른 사람을 돕고 살지,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해 살지를 결정하게 한 사건이었어요. 나는 전자를 선택했습니다.”

1980년 5월22일 광주 시내 병원마다 부상자들이 밀려든 가운데 전남대병원 옥외에 마련된 임시병상에 부상자들이 누워 있다. 데이비드 돌린저 촬영.
1980년 5월21일, 데이비드 돌린저가 전남 나주에서 광주까지 걸어가던 중 찍은 사진. 시민군이 탄 트럭과 버스의 앞 택시에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승객으로 위장해 타고 있었다. 이들은 돌린저가 사진 찍는 것을 보고 곧장 다가와 필름을 빼앗으려 했으나 돌린저는 신분을 밝히라고 요구하며 완강히 거부했다.

나를 ‘확장된 가족’으로 받아준 여성들

그는 42년 전 광주 시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들은 위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민주주의와 미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했지요. 나는 주로 학생과 노동자를 만났는데, 모두가 너무 친절했고 항상 나의 안전을 걱정하며 먼저 챙겨주려 했습니다.” 그는 특히 “광주항쟁과 이후 한국의 민주화운동에서 여성의 힘이 과소평가된 것 같다. 사람들이 직접 봤다면 여성들이 얼마나 강인했는지 알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성들은 결코 자기 자신(ego)을 내세우지 않았고 무엇이 옳은지 잘못인지 알았으며, 마치 엄마나 자매처럼 항상 나를 ‘확장된 가족’의 일원으로 여겼습니다.”

돌린저는 1980년 광주의 비극에 대한 ‘미국 책임론’에 대해서도 분명한 의견을 밝혔다. “당시 지미 카터 정부는 엘살바도르에서 했던 것과 매우 비슷하게 한국에서도 간접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주한 미국대사관은 광주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미국인이 아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미국 정부가 광주의 사건을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은 지미 카터 정부가 인권을 대변한다던 내 생각과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비밀문서를 계속 발굴해 진실을 밝히고 미국에 합당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가 말한 엘살바도르 사례는 미국이 1980년부터 12년간 이어진 엘살바도르 내전에서 군부정권이 좌파 저항세력을 잔혹하게 학살하는 것에 눈감고 돈과 무기를 지원한 흑역사를 말한다. 영화 <로메로>로 잘 알려진 오스카르 로메로 주교도 극심한 빈곤과 인권 억압에 신음하는 민중을 돕다가 미사 집전 도중 무장괴한들의 총격에 숨졌다.

돌린저는 광주항쟁이 자신과 인류에게 “모든 인간을 생각하는 큰 비전을 갖게 했다”며 “광주에서 배웠고 지금도 배우려는 교훈은 인내심”이라고 했다. “광주 시민의 희생이 결실을 보기까지(1987년 6월항쟁과 민주화) 7년이 걸렸고, 여전히 더 시간이 걸릴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광주 시민은 함께 뭉쳤고 하나처럼 행동했지요. 우리는 모두 각자 목소리를 갖고 있지만, 한목소리를 내야 세상이 들을 수 있고 변화를 끌어낼 수 있습니다.”

돌린저는 “민주주의란 양분이 필요하고 날마다 노력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며 기본적 인권이 부인돼선 안 됨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은, 소수자를 이해하고 보호하며 전체를 인식하되 개인이 전체에 얼마나 기여하는지도 인정하는 것이죠. 이는 우리가 어떻게 (타인의 목소리를) 경청하고 우리 자신을 북돋우며 서로 도울지를 이해할 때, 개인과 권력과 돈이 아니라 휴머니티(인간애)를 강조하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음을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월출산의 모든 길을 다 알았다”

돌린저는 열흘 남짓 한국에 머물면서 광주에서 열리는 제42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하고 지인들을 만나며 영암에도 찾아갈 계획이다. “한국 음식 정말 맛있어요. 아내와 아들도 너무 좋아합니다. 영암 월출산도 정말 멋진 산이지요.” 그는 40여 년 전 영암보건소에서 봉사활동을 할 때 월출산에 자주 올랐고 절의 스님들과도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월출산의 모든 길을 다 알았다”고 말할 때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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