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나도 부르짖는 '의용봉공', 그 뜻을 아십니까

박요순 2022. 5. 10.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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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나는 의용봉공의 기억 (상)

[박요순 기자]

지난 3월 29일은 올해로 처음 맞는 법정 기념일인 '의용소방대의 날'이었다. 의용소방대는 소방의 예비군이라고 할 수 있는데 화재, 구조, 구급 등의 소방서 업무를 보조하는 비상 동원 조직으로 전국의 행정구역별로 구성된다. 작년 초를 기준으로 모두 3902개 의용소방대에서 9만6천여 명의 대원이 활동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의용소방대는 1876년 개항 이후 조선으로 건너온 일본인들의 자위 소방 조직인 '소방조(消防組)'를 본떠 만든 조선인 소방조(1910년 이전)를 시초로 한다. 그 연원이 일본의 에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소방조 활동은 원래 비상시에만 소집되는 자원봉사 성격이었다. 그러다가 조선에서는 1907년 경성 등의 대도시에서 일본인 중심으로 직업적인 '상비(常備)' 소방조를 설치하며 이와 대비되는 기존의 '비상비' 소방조를 관행적으로 '의용 소방조' 또는 '의용 소방대'라고 불렀는데 (상비와 의용 모두 이름 앞에 지역명을 붙인 '○○소방조'가 정식 명칭이었다) 해방 이후 소방법이 제정(1954)되면서 '의용소방대'가 자원소방대(volunteer fire brigade)를 가리키는 공식 이름이 된다.

이렇게 대표적인 관설(官設) 시민 봉사 조직인 의용소방대와 관련해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는데 바로 '의용봉공(義勇奉公)'이라는 표현에 관한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대부분은 이 한자 성어가 낯설게 들릴 것이다. 예전에는 잘 들어보지 못하던 표현이었는데 2007년 경기도 어느 의용소방대와 관련한 언론기사에 처음 등장하더니 그 뒤로는 전국의 의용소방대들에 유행처럼 퍼져 요즈음엔 의용소방대라면 너도나도 이 '의용공봉공' 정신을 부르짖고 있다. 

아래는 인터넷에서 검색되는 '의용봉공' 관련 언론 기사인데 작년 한 해에만 모두 58건의 '의용봉공' 관련 보도가 확인된다.
 
《'22.3.29., 연합뉴스》 '제1회 의용소방대의 날 기념행사가 의용소방대의 의용봉공정신을 기리기 위해 소방청과 전국 시·도본부에서 일제히 열렸다.'
 
《'22.3.29., 전북도민일보》 '○○소방서는 전년도 활동실적이 가장 우수한 ○○여성의용소방대에게 의용봉공 깃발을 전달했다.'
 
《'21.12.29., 아시아경제》 '○○소방서는 의용소방대원을 대상으로 유공자 표창과 의용봉공패를 수여했다.'
 
그러면 어감도 낯선 이 '의용봉공'은 무슨 말일까? 먼저 의용(義勇)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의용(義勇)은 말 그대로 '의로운 용기', '옳은 일을 하기 위한 용기' 정도로 풀어 쓸 수 있다. 이 표현은 한·중·일 역사 사료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데 그 사용 연원이 꽤 깊어 논어 위정편 24장에 공자가 말했다고 하는 '견의불위 무용야(見義不爲 無勇也: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하지 못하는 것은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에서 기원을 찾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일찍이 1369년 고려의 의용좌우군(義勇左右軍), 1403년 조선의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 1418년 의용위(義勇衞) 등에서 주로 관군(官軍)이나 관청의 이름으로 사용하였고 때로는 임금에게 간언하는 신하의 충의와 용기를 칭찬하는 표현으로도 썼다. '의용'의 대상은 대개 임금이었기에 '충용(忠勇)'과도 바꾸어 쓸 수 있는 말이었고 간혹 반란(반정)군이 거사의 정의(正義)를 내세우며 쓰기도 했으나 근대 이전의 역사를 통틀어 사용 빈도가 그리 높은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1876년 개항 뒤에 일본의 무사도에 뿌리를 둔 근대적 개념의 '의용'이 수입되면서 조선에서도 일상에서 많이 쓰는 단어가 된다. 

그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무사 계급이 성립된 헤이안 시대(794-1192)부터 임진왜란 이전까지 일본에서 사무라이의 가장 중요한 행동규범은 주군과의 계약상 의무인 '충(忠)'과 직업상 자질인 '용(勇)'이었다. 물론 사회 지배계층으로서 '의(義)'도 중요시하였으나 덕목 수준에 그쳤다. 

일본에서 '의용'의 쓰임은 이때까지만 해도 무사 개인의 덕행(정의로운 행동)을 칭찬하는 정도였는데 에도시대(1603-1867)에 접어들어 도쿠가와 막부 정부가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고 간 강항과 같은 조선인 유학자를 통해 들여온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하고 전쟁 없는 평화 시대가 지속되면서 문무양도(文武兩道)라고 하여 무사들도 주자학 등의 학문을 좇게 된다. 이러한 과정에서 전통적 '용'과 유교적 '의'를 합친 '의용(義勇)'이 무사의 핵심 윤리로 등장하는데 이때의 '의'는 대개는 주군에 대한 성리학적 '충의(忠義)'를 뜻했고 사무라이 계급이 철폐되는 메이지 유신(1968) 때까지 무사도 이념으로 중시된다. 

이러한 근세(에도시대)의 '의용' 정신은 1875년에 출판된 우타가와 요시츠야(歌川芳艶)의 '근세의용전(近世義勇伝)'이라는 목판화집(니시키에)에 그 사례가 잘 나와있다. 23가지 일화로 구성되어 있는 이 판화집의 상당 부분은 메이지 유신(1868년) 직전 존왕양이(尊王攘夷)를 위한 막부 타도 과정에서 목숨을 바친 무사들의 영웅담이다. 아래의 <자료 1>은 그 가운데 하나로서 '타카하시 다이치로(高橋多一郞)'라는 미토번(현재의 이바라키현)의 상급 무사에 관한 이야기인데 급진개혁파였던 그는 에도막부 정권에 대항하다가 거병에 실패하자 천황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서 할복자살한다. (※ 자료: https://commons.wikimedia.org/wiki/Category:Utagawa_Yoshitsuya_II).
 
 자료1 - 근세의용전(近世義勇?)
ⓒ 우타가와 요시츠야(歌川芳艶)
  
주군(천황)에게 죽음으로 충성하는 이러한 무사도 정신은 메이지 유신 이후 니토베 이나조(新渡戸稲造, 1862-1933)라는 학자가 저술하여 일본의 사무라이 문화를 세계에 알린 『BUSHIDO: The Soul of Japan』이라는 책에서도 언급된다. 외교관이기도 했던 그는 1899년 미국 뉴욕에서 영어로 출간한 이 책에서 사무라이가 지켜야 할 7가지 규범을 일본의 혼이라며 소개했는데 그 가운데 첫 번째와 두 번째로 꼽은 것이 '의(義, rectitude or justice)'와 '용(勇, courage)'이다.(※ '부시도'는 무사도의 일본식 발음이다.)  
 자료2 - 니토베 이나조
ⓒ WIKIPEDIA
  
 자료3 - ‘BUSHIDO: THE SOUL OF JAPAN’ 책 표지
ⓒ Bibliotech Press
 
 자료4 - ‘BUSHIDO’에서 언급한 사무라이의 7가지 규범
ⓒ WORDPRESS.COM
그런데 이때까지만 해도 주로 '무사의 목숨을 건 충의(忠義)의 실행' 정도를 뜻하던 일본의 '의용'이 근대 시민사회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출현하며 '보통 사람의 충의와 인의(仁義, 이웃에 대한 어진 도리)의 실천'으로 확대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일본의 근대화 시기에 서양의 의병인 'volunteer army(자원군, 시민군)' 개념을 일본 국내에 소개할 때 기존 무사도의 '의용'을 가져다 쓴('의용군'으로 번역) 결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1863년 일본 조슈번(현재의 야마구치현)에서 당시 20대였던 이토 히로부미 등의 존왕양이(尊王攘夷)파가 정한론을 처음 주장한 스승 요시다 쇼인의 '서양보병론(西洋歩兵論)'을 참고하여 조직한 '의용대(義勇隊)'라는 이름의 민병대가 막부 타도에 큰 역할을 한 바도 있다. 이로부터 일본에서는 '의용'의 개념적 행동 범위가 기존의 무력(武力) 중심에서 비군사적 부문의 일반인의 무보수 자원봉사활동(volunteer work)까지 확대되는데 '의용 소방'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근대적 '의용'의 다른 사례로는 만주 지역 개척을 위해 일본과 조선 청년을 이주시켰던 만주개척청년의용대(1938), 대만 원주민으로 태평양전쟁에 동원되었던 다카사고의용대高砂義勇隊(1942),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의 본토 결전에 대비한 국민의용대(1945) 등이 있었으나 전제주의에서 민주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대 상황 탓으로 여전히 '충의'적인 성격이 강해 겉으로는 '자원(自願)'을 내세워도 속으로는 강제 동원의 성격을 띠었다. 1960년대까지도 일본에서는 자발적 공익봉사활동을 '의용'으로 표현해 오다가 1970년대에 들어와서야 'ボランティア(보란티아, volunteer)'라는 외래어로 대체해 쓰기 시작한다.

'충의'를 바탕으로 '인의'로 확장된 근대적 '의용'은 식민지 조선과 대만, 중국에도 전파되어 널리 쓰이는데 한 예로 1920년 6월 17일 자 조선일보를 보면 '미국에서 40만에 달하는 석탄 갱부가 하루 여섯 시간, 일주일 30시간제 노동을 위해 총파업을 벌이자 캔자스 주지사가 국민의 자발적 애국심에 호소하여 수만(數萬)의 의용탄갱부(義勇炭坑夫)를 모집하였다'라는 기사가 나온다.

우리를 위해 나를 버리기도 하는 것이 사람의 본성 중 하나인지라 우리 역사에도 자발적 공익추구 성격의 '의용' 기록이 있다. 고구려와 백제 유민의 부흥 운동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의병 활동이 한 예인데 임진왜란 때인 1592년에는 왜군이 현재 부산의 수영성에 주둔하며 온갖 만행을 저지르자 수영성 수군과 백성 25명이 결의를 맺고 7년간 뭍과 바다에서 항일 유격 투쟁을 벌이다가 모두 순절하였다. 1608년 동래부사로 부임한 이안눌이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이들의 집 대문에 '의용'이라는 글을 붙여 그 정신을 기리고 자손들에게 포상하였는데(숙종실록) 이는 우리나라에서 백성의 자발적인 구난(救難, 救亂) 행위를 '의용'으로 부른 최초의 사례로 보인다. (철종 이후에는 이를 기려 비석(의용단)과 사당(의용사)을 세웠으며 부산시에서는 '의용25인'이라고 하여 지금도 해마다 이들의 제사를 지낸다.)

병자호란과 정묘호란 때 잠깐 주춤했던 의병 정신은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 촛불 신세이던 조선 말기에 다시 불붙는데 1907년 대한제국군의 해산으로 일어난 정미의병이 1919년 고종황제 승하 전까지 명맥을 이어갔으나 3.1 운동 이후 설립된 상해 임시정부가 공화정을 표방하면서 근왕(勤王)과 충의(忠義)의 성격이 강했던 '의병'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 뒤로 나라를 잃은 조선사람들은 자신들의 항일무장투쟁을 일본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근대적 '의용' 개념으로 표현했는데 1920년 평안북도에서 결성된 벽창의용대를 시작으로 대한의용군사회(1921), 병인의용대(1926), 조선의용대(1938), 조선의용군(1942)이 있었고 분단 이후에는 남과 북을 통틀어 혁명의용군(1948), 인민의용군(1950), 대한학도의용대(1950), 의용경찰대(1951), 독도의용수비대(1953) 등이 있었다. 비군사 부문에서는 의용소방대(순종실록, 1925)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이 가운데 현재까지 쓰임새가 남아 있는 것은 '의용소방대' 정도인데 한국전쟁 이후 더 이상의 용례 추가가 없는 것을 보면 이 '의용'이라는 말은 한글 전용으로의 빠른 전환과 전쟁없는 평화 시대의 지속, 주권재민의 확대로 현대적 생명력 확보에 상당 부분 실패한 근대적 어휘로 구분할 수 있겠다. (※ 2022년 5월 현재 대한민국과 일본 언론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돕기 위한 외국인 '자원군(自願軍, international legion)'을 '국제 의용군'으로 부르고 있다.) 

(다음 편 "'의용봉공', 일본 제국주의 망령이 짙게 밴 말"에서 계속됩니다. http://omn.kr/1ys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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