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만에 막 내리는 ‘청와대 국민청원’

윤기은 기자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 갈무리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 갈무리

‘텔레그램 n번방 가입자 전원의 신상공개를 원합니다’, ‘응급환자가 있는 구급차를 막아세운 택시 기사를 처벌해주세요’, ‘소방공무원을 국가직으로 전환해주세요’.

시민의 목소리로 가득찼던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 접수 창구가 9일 정오 약 5년 만에 문을 닫았다. 대한민국 최초로 도입된 청와대 국민청원은 사회적 발언권이 약한 일반 시민의 의견을 반영하는 ‘소통창구’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동시에 ‘가짜뉴스’를 퍼트리고 삼권분립 국가에서 행정부의 권한을 강조하는 역기능을 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는 ‘국민이 물으면 정부가 답한다’는 모토로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 만인 2017년 8월19일 개설됐다. 백악관 시민청원 사이트 ‘위더피플’을 본따 만들었다. 30일 내 20만명 이상 동의를 얻은 청원에 청와대가 답변하는 방식으로 운영됐다. 지난 2월28일까지 누적 청원 게시글은 약 111만건이며, 이 중 20만명 넘는 동의를 받은 청원은 286건이다.

국민청원 사이트는 사회적 공론장이자 정부와 시민의 소통 공간이었다. 지난달 한국리서치의 여론조사 결과 온라인 청와대 국민청원에 대해 64%는 ‘국정에 대한 시민의 관심을 높였다’고, 58%는 ‘시민 정치참여에 도움이 된다’고, 55%는 ‘민주주의 확대에 도움이 됐다’고 평가했다.

역대 가장 많은 769만명의 동의를 얻은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 청원은 정책 변화와 법 개정을 불러왔다. 대학생 기자들에 의해 처음 알려진 이 사건과 관련해 시민들은 철저한 수사 촉구, N번방 개설 용의자 신상공개, 국제 공조 수사 등 요구 청원에 동의하며 피해자들과 연대했다. 이후 온라인 성착취 대응을 위한 범정부 태스크포스가 생겼다.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판매 형량의 하한이 설정됐고 온라인상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의 광고행위를 처벌하는 조항이 신설됐다. 불법촬영물 판매뿐 아니라 소지, 구입, 시청한 사람도 처벌하도록 성폭력처벌법이 바뀌었다.

청와대 국민청원의 총 청원 수는 111만건, 누적 청원 동의는 2억3000만명이다. 청원 게시와 동의 과정이 다른 공공기관 사이트에 비해 쉬운 점이 높은 참여율의 원인으로 꼽혔다. 국회의 국민동의청원 사이트에서 청원을 올리거나 다른 사람이 올린 청원에 동의하려면 휴대전화 번호 등으로 본인 인증을 거쳐 회원으로 가입해야 한다. 반면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는 별도의 회원가입 절차 없이 네이버, 카카오톡, 페이스북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계정과 연동해 이용할 수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의 어두운 면도 있다. 사실이 아닌 내용이나 혐오표현이 게시판을 타고 확산했다. 2018년 올라온 난민 관련 청원에는 제주도에 들어온 난민 신청자들이 ‘가짜난민’이라거나, 난민은 한국 정부 지원을 받으며 놀고 먹기 위해 왔다는 내용이 담겼다. ‘난민신청허가 폐지’ 청원에는 71만명 이상이 동의했다. 2020년 ‘생후 25개월 된 딸이 이웃에 사는 초등생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청원은 가해자가 존재하지도 않는 거짓으로 드러났다.

사법·입법 기관에 제기해야 할 청원이 행정부의 대표격인 청와대로 몰린 탓에 삼권 중 행정부 권한이 우위에 있는 듯한 인상을 심어줬다는 지적도 있다. 게시판에는 수술실 폐쇄회로(CC)TV 의무 설치 법안 입법(2018), 어린이안전기본법 입법 촉구(2019) 등이 올라왔다. 경찰을 때린 남성에 대한 정당방위 무죄 판결 취소 청원(2021), 20개월 영아를 학대·살해한 피의자 신상공개 요구 청원(2021)은 사법부에서 다룰 문제였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현 청와대 국민청원 사이트 대신 권익위원회의 국민신문고, 행정안전부의 광화문1번가 등 다른 기존 민원 창구를 통·폐합해 시민과 소통하겠다고 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은 소외된 사람들의 목소리나 시민들의 하소연도 공론화하는 데 일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며 “다만 지금처럼 ‘제왕적 대통령’ 인상을 고치기 위해 행정, 입법, 사법 세 기관에서 골고루 국민청원 제도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운용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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