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차 산업혁명 시대, 일자리 ‘빅 미스매치’]반도체 인력 수요 연 1만명인데, 대졸 전공자 20%도 안 돼…2차전지·로봇도 인재 가뭄 극심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786호 08면

SPECIAL REPORT

삼성전자의 화성 반도체 공장 15라인에서 연구원들이 생산 현황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 각 사]

삼성전자의 화성 반도체 공장 15라인에서 연구원들이 생산 현황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 각 사]

삼성전자는 최근 온라인의 삼성 채용 홈페이지에 로봇사업팀 경력사원만 따로 모집하는 공고를 했다. 5월 10일까지가 서류 접수 기간이다. 모집 직무를 ‘구동부 개발’ ‘서비스 플랫폼 개발’ 등 19가지로 세세하게 나눈 이 공고를 관련 업계에선 의미 있게 보고 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로봇 분야 인재 수혈에 애를 먹고 있는 삼성전자가 ‘고심한 흔적’이 역력한 공고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말 로봇사업팀을 신설했고 이후 130여 명의 직원을 배치했다. 그럼에도 인력이 부족해서 올해 로봇사업팀에서 석·박사만 100명가량, 학사까지 포함하면 더 많이 채용한다는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회사 측이 원하는 전문 인력이 충분히 몰릴지는 미지수다. 현재 국내에서 직접적으로 로봇과 관련이 있는 학과를 운영 중인 대학은 단 16곳(한양대 로봇공학과 등)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각각 두 자릿수의 소수 정원이라 졸업해서 경력을 쌓은 경우까지 더해도 인재 숫자가 많지 않다. 간접적으로 로봇과 관련이 있는 기계공학을 전공한 취업준비생들도 대부분 로봇이 아닌 다른 분야로 진로를 정한다. 그래도 취업이 잘 되고, 대우도 좋아서다. 삼성전자까지 팔을 걷어붙일 만큼 기대되는 차세대 성장 산업 분야에서 인력이 수요에 비해 공급은 태부족한 사례가 잇따르면서 ‘일자리 미스매치’가 심화되고 있는 것이다.

관련기사

배터리 관련 화학 분야
인력난 가장 심해

SK이노베이션의 미국 조지아주 배터리 1·2공장 전경. [사진 각 사]

SK이노베이션의 미국 조지아주 배터리 1·2공장 전경. [사진 각 사]

정보기술(IT)을 기반으로 한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이 본격화하면서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인재는 이공계, 특히 로봇·반도체 등 전문 분야 위주로 급격히 바뀌고 있다. 그런데 상아탑의 해당 분야 인재 양성 규모와 속도는 이런 산업 현장의 변화를 못 따라잡고 있다.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은 2020년 기준 국내 반도체 업계에서 1600명대의 인력이 부족했던 것으로 집계했다. 이는 기업들이 필요로 하는 최소 인력을 기준으로 집계한 수치라 업계가 체감하는 인력난은 더 심각하다. 소재·부품·장비 업체까지 포함해 국내 연간 반도체 인력 채용 규모는 1만 명에 달한다. 하지만 대학에서 배출되는 전문 인력은 필요 인력의 20%에도 못 미치고 있다.

전기차 확산으로 수요가 폭증한 2차전지 분야도 마찬가지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을 맞아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분야라 인력난이 더 심각하다. 신산업 특성상 경력자는 거의 없고, 관련 학과가 드물어 맞춤형 인재를 찾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대학과 연계해 인재를 육성하기도 쉽지 않다. 시장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당장 연구소를 운영하고 공장을 지어 제품을 생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배터리를 가져다 전기차를 만들어야 하는 현대자동차 등 완성차 업체도 배터리 인재 확보에 나서고 있다. 배터리를 알아야 더 나은 전기차를 만들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다 보니 배터리 업체들은 이공계에서도 공대를 나왔으면 일단 뽑고 보자는 식이다. 업계 관계자는 “배터리는 연구·개발부터 배터리 제조에 이르기까지 화학·재료·전자·컴퓨터·기계공학이 연관돼 있다”며 “특화된 인재를 구할 수 없으니 공대를 나왔으면 일단 뽑고 재교육 등을 통해 배치하자는 목소리가 높다”고 전했다. 2020년 말 출범 당시 7524명이던 LG에너지솔루션 직원 수는 1년여 만에 2000명 이상 늘었다. 지난해 10월 1400명으로 출범한 SK온은 반년 만에 500명을 추가 채용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지난해 산업기술진흥원에 따르면 2020년 기준 12대 주력 산업의 기술인력 부족률은 평균 2.5%로 제조업(2.3%)이나 영상제작·통신서비스업(1.1%), 기타 서비스업(1.1%)을 크게 웃돌았다. 주력 산업 중에서도 2차전지와 관련된 화학이 3.3%, IT 기술 개발 관련 소프트웨어 분야가 4%에 달했다. 10대 그룹 계열사의 한 인사 담당자는 “이공계 내에서도 2차전지처럼 기업이 많은 투자를 해야 하는 분야는 따로 있는데 이쪽을 전공한 인재가 수요에 비해 너무 부족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당장 올해만 해도 그렇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설문조사에 따르면 500대 기업은 올 상반기 신규 일자리 중 61%를 이공계 출신으로 채울 예정이다.

취업정보사이트인 캐치에 따르면 10대 그룹사와 네이버·카카오는 이공계 졸업자 수요가 많은 ▶IT·통신 ▶건설·토목 ▶제조·생산 등 업종의 채용 공고를 지난해 3월 252건에서 올 3월 298건으로 대폭 늘렸다. 이미 주요 기업들은 지난 수년간 신입사원의 대다수를 이공계 출신으로 채운 상황이다. 재계에 따르면 삼성전자·SK하이닉스·현대차·LG전자·카카오는 3년간(2018~20년) 신입사원의 80%가량이 이공계 출신이었다. 네이버는 86%, LG에너지솔루션은 90% 수준에 달했다.

이 같은 산업 변화 속에 인문계 출신들은 극심한 취업난을 겪고 있다. 캐치가 최근 취준생 500명을 대상으로 지난해 대비 올 상반기 채용 분위기를 설문조사한 결과 문과 전공 취준생들은 ▶비슷하다(40%) ▶침체됐다(31%) ▶활발해졌다(28%) 순으로 응답했다. 지난해보다도 취업이 어려워졌다고 보는 응답자가 더 많았다. 하지만 이과 전공 취준생들은 ▶활발해졌다(36%) ▶비슷하다(35%) ▶침체됐다(28%) 순으로 응답해 지난해보다 취업하는 데 유리해졌다고 보는 분위기가 우세했다. 김정현 진학사 캐치본부 잡콘텐츠랩 소장은 “코로나19 팬데믹 여파가 어느 정도 진정됐는데도 문과의 취업 문턱은 오히려 더 높아진 것”이라며 “일자리의 미스매치 심화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이 더 시급히 필요해진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통상 취업 전선에서 인문계 출신에게는 ‘최후 보루’로 인식되던 영업·마케팅·인사·재무 등의 직군에서도 이공계 선호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이 또한 문과생들을 옥죄고 있다. 예컨대 영업에선 발로 뛰는 전통적인 방식보다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 기반의 맞춤형 방식이 중요해졌다. 거시적인 영업 전략을 세우는 마케팅에서도 마찬가지다. 소비자나 거래처의 선호도와 관심도를 객관적으로 파악해 영업하는 게 실적 증대는 물론 시간·비용 절감에도 효율적이라고 기업들은 보고 있다. 이왕이면 이에 능할 것으로 기대되는 이공계 인재를 뽑는 게 낫겠다고 기업들이 판단하고 실행에 옮기고 있는 이유다. 자동화 프로그램 발달로 데이터 분석의 중요성이 커진 인사·재무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과거와 달리 이공계 인재를 뽑는 경우가 급증했다.

디지털 전환으로 은행에서도
이공계 선호

문과 내에서 인문계에 비해 상대적으로 취업에 유리하던 상경계마저 타격을 입고 있다. 전통적으로 상경계 인재 수요가 많던 금융권에서 ‘디지털 전환’ 열풍에 따라 공채 규모를 대폭 줄인 한편, 이공계 위주의 수시채용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어서다. KB국민·신한·하나·우리 등 주요 시중은행들은 최근 수시채용으로 IT 개발자를 뽑는 데 힘쓰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2015년 7281개였던 국내 시중·지방·특수은행 오프라인 점포 수는 지난해 상반기 6326개로 급감했다. 그사이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 등 비(非)대면 채널 이용을 선호하는 소비자가 급증하면서 은행들은 이처럼 오프라인 지점을 줄이고 있다. 그 대신 앱 개발·유지·개선을 위한 이공계 인재 채용에 힘쓰면서 이들을 상경계 출신보다 우대하고 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 때문에 한국은 해외 주요국에 비해서도 일자리의 미스매치가 두드러지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의 청년 대학졸업자 고용률은 75.2%에 그쳐 미국(84.2%)과 독일(88.4%), 영국(90.6%), 프랑스(85.2%) 등보다 크게 저조했다. 물론 단순 고용률보다는 고용의 질이 중요하지만 한국은 여기서도 전공별 양극화가 두드러진다. 박사 학위를 받아도 취업하면 문·이과 간 연봉 격차가 확연히 벌어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서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지난해 박사 학위 취득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국내 인문학 박사의 37.3%는 취업 후 2000만원 미만의 연봉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최저임금(시간당 9160원) 적용 대상 근로자가 190만원대의 월급을 받는 것을 고려하면 인문학 박사의 37.3%가 이보다도 박한 급여를 받고 있다는 얘기다. 2000만~3000만원의 연봉을 받는 경우도 20.5%로 인문학 박사의 과반이 3000만원에 못 미치는 연봉을 받는 것으로 집계됐다. 이와 달리 공학 박사의 58.6%는 5000만원 이상 연봉을 받고 있다고 응답했다. 공학 박사 중 3000만원 미만의 연봉을 받는 경우는 15.5%뿐이었다.

4년제 대학에서 최소 총 수천만원의 등록금을 내고 졸업해야 하는 문과생들은 이와 별개로 취업하기 위해 IT 관련 자격증 취득 등을 목표로 한 사교육에도 내몰리고 있다. 취업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기업들이 채용 때 중시하는 코딩(컴퓨터 프로그래밍) 등의 능력을 기르고자 학원 문을 두드리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어서다. 코딩 교육 스타트업 코드스테이츠의 김인기 대표는 “지난해 수강생 중 70%가량이 인문계 출신”이라고 전했다. 컴퓨터 그래픽 관련 자격증 취득을 위한 수강에도 연일 인문계 출신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컴퓨터 관련 자격증 없으면
인턴도 어려워

우아한형제들이 운영하는 개발자 양성 프로그램. [사진 각 사]

우아한형제들이 운영하는 개발자 양성 프로그램. [사진 각 사]

취준생 유모(28)씨는 “영어영문학을 전공했지만 취업에 도움이 될까 싶어 컴퓨터 관련 강의를 듣고 있다”며 “요즘엔 취업하려면 인턴 경력이 필수인데 컴퓨터 관련 자격증이 없으면 인턴이 될 기회조차 잡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이공계 내에서도 세부 전공에 따라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물리·수학 등 순수학문에 가까운 자연계열, 건설 등 업황이 침체된 분야에 속하는 일부 공학계열 출신들은 상대적으로 낮은 취업률과 뒤떨어지는 고용의 질 등으로 고전 중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 상반기에 비해 지난해 상반기 IT 분야 전공 취업자는 24% 증가한 반면 자연계열 취업자는 5% 증가에 그쳤다. 인문학 전공 취업자 증가율은 -2.4%였다.

유일호 대한상공회의소 고용노동정책팀장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많은 기업이 공채 규모를 축소하면서 일자리의 미스매치 문제가 좀처럼 해소되기 쉽지 않은 상황으로 흘렀다”며 “팬데믹이 더 진정되면 취업난 자체는 완화될 수 있지만 디지털 전환 등으로 급변한 채용 트렌드가 예전처럼 돌아가긴 힘들 것”으로 내다봤다. 유 팀장은 “대학들이 학과별 정원 조정 등으로 산업 현장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 양성에 좀 더 힘쓰면서 일자리의 미스매치를 줄이는 데 나서야 한다”면서 “전공을 불문한 실질적인 고용의 질 향상을 위해 노동시장의 경직성은 최소화하되 유연성은 강화하려는 재계의 노력도 필요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