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김대중'은 호남의 명예 회복이었다
몇 달 전 제6공화국의 첫 대통령인 노태우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다. 알다시피 당시 국가장 시행을 두고 말이 많았어. 그런데 아빠는 이해할 수 있는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는 직접선거로 당선돼 6공화국의 문을 연 대통령이었으니까. 하지만 6공화국의 첫 번째 정부는 독재의 망령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 막바지에 일어났던 구로구청 점거 농성 진압 사태가 그랬지.
1987년 12월16일 대통령 선거 날, 부정투표함이 서울 구로구청 현관 앞에서 반출되고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현장조사 결과 트럭에 실린 빵 상자 안에서 봉인이 되지 않은 투표함이 발견됐어. 선거관리위원회는 개표소로 이송 중인 부재자 투표함이라고 주장했지만 왜 그걸 빵 상자에 담아 옮겼느냐에 대해서는 궁색한 답변만 늘어놨지. 시민들은 이를 부정의 증거로 여기고 구로구청 점거 농성에 들어갔고, 그날 밤 경찰 수천 명이 진압작전에 투입되면서 유혈 사태가 빚어졌어.
선관위에서 밀봉된 채 보관되던 투표함은 29년 뒤인 2016년에야 뚜껑이 열렸다. 예상과는 달리 과거 이승만 정권 때의 부정선거, 즉 투표용지 조작이나 투표함 바꿔치기의 흔적은 없었어. 기표 용지로만 살핀다면 ‘정상적’이었지. 그런데 내용을 들여다보자 이상한 점이 드러났어. 구로구는 야당, 즉 ‘민주당’ 계열의 강세 지역으로 지금까지 정평이 난 곳인데 그 지역 부재자 투표함에서 여당 후보 노태우에게 72% 넘는 몰표가 쏟아진 거야. 무언가 수상하지?
당시 부재자 투표의 주류는 군인들이었다. 그리고 당시 군대에서는 투표권 가진 병사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압박했어. 공개투표를 한다거나 “보안대에서 누구 찍었는지 결국엔 다 알게 된다. 알아서 해라”라고 협박하는 식이었지. 투표 자체에 부정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선거 과정에서 자행된 불법의 단면을 암시하고 있는 셈이야.
그로부터 5년 뒤. 1992년 4월 제13대 총선이 치러지기 며칠 전, 젊은 육군 중위 한 사람이 군대 내의 공개투표, 특정 후보 강요 등 부정선거 관행을 폭로한다. 국방부는 펄쩍 뛰었지만 이지문 중위 앞에서 떳떳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 이 양심선언으로 군대 내 부재자 투표는 영외 투표, 즉 부대 밖에서 선관위의 통제하에 진행되는 방식으로 바뀌게 돼.
양심선언 직후 실시된 총선에서 두 야당을 포섭해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을 이룬 민주자유당은 과반을 얻지 못하고 패배한다. 하지만 그해 말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의 후신인 신한국당의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지.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5년의 임기를 마칠 즈음,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신한국당의 후신)의 이회창 후보와 대선 4수생 새천년민주당 김대중 후보가 맞붙었어.
40대 기수론으로 파장을 일으키며 1971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던 김대중은 치매 운운하는 흑색선전의 대상이 될 만큼의 고령(일흔셋)이었어. 아빠 개인적인 의견으로,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인이라고 평가하는 그가 험난한 정치 역정을 헤쳐온 데에는 호남 출신이라는 사실이 한몫을 했어. 역으로 그가 네 번씩이나 대통령 선거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호남이라는 배경 덕분이라고 본다.
3당 합당 이후 거대 여당은 대구·경북 지역을 기반으로 한 여당과 부산·경남 지역을 대표하는 야당, 충청 지역을 근거지로 한 야당의 야합이었고 자연스럽게 호남 포위망을 형성했다. 여기에 더해 “정신질환(유시민 작가의 말)”에 가까운, 호남에 대한 타지 사람들의 편견은 상처를 더했어.
언젠가 학교에서 술을 마시고 지하도로 가기 귀찮아서 학교 앞 도로를 무단횡단한 적이 있어. 그런데 한 후배는 기어코 지하도를 건너오더라. 그 후배는 이렇게 말했어. “어른들이 서울에 가면 공중도덕 절대로 지키라고 했어요. 전라도 사람들은 욕먹는다고.” 더 놀랐던 것은 이런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을 그 뒤에도 여러 번 만났다는 거야. 부산에서 학교를 다녔던 아빠는 꿈에도 들어본 적 없는 소리. 호남 본적지를 통째로 바꿔버린 집안도 있단다. 서울로 이사 오면서 자식들이 피해를 본다고 돈과 시간, 공을 들여 본적을 바꿔버린 거였지. 그 마음을 이해하겠니?
수십 년 동안 이유도 없고 근본도 없는 차별에 시달려왔으며, 다른 지역은 다 숨을 죽였던 1980년 유일하게 일어섰다가 잔인하게 진압된 광주의 한이 더해진 호남이 3당 합당으로 정치적 포위망까지 씌워지며 고립된 상황이었지. 정치인 김대중은 그들의 희망이자 비빌 언덕이었고, 김대중에게 호남은 십자가이자 보루였던 거야.
개인들의 결단과 희망으로 흐르는 역사
1997년의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은 과감한 선거 연합을 펼쳤어. 포항제철 회장이었던 박태준과 산업화 세력을 대변하는 김종필을 망라한 DJP 연합을 구성하며 한 번은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지. 하지만 보수의 벽, 그리고 김대중과 호남을 비토하는 이들의 벽은 만만치 않게 높았다. 사실 15대 대통령 선거도 정상적으로 진행됐다면 김대중은 승리할 수 없었을지도 몰라. 여당 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 의원이 경선 결과에 불복하고 출마를 강행하면서 여당 표가 크게 갈렸음에도 겨우 39만 표 차이로 여당의 이회창 후보를 누를 수 있었으니까.
개표가 진행되던 날 밤, 아빠는 일하느라 회사에 있었어. 그런데 함께 근무하는 후배들이 어디론가 사라진 거야. 아빠 눈에 TV 앞에 못 박힌 채 개표방송을 지켜보는 후배들이 포착됐어. 여자 후배 한 명은 눈물을 흘리고 있었고, 남자 후배는 덥석 아빠 손을 잡았어. “선배님 김대중이 이겨요(아빠는 김대중을 찍겠다고 공언하고 다녔거든).” 그 기쁨을 이해하면서도 이건 오버 아닌가 싶어서 “그렇게 좋으냐?” 한마디 뱉었을 때 돌아온 답을 잊을 수가 없구나. “선배님은 김대중 찍는다고 대놓고 얘기하셨잖아요. 우리는 한마디도 못했어요. 전라도 애들이라 저런다는 말 들을까 봐.”
아빠와 한두 살 차이였을 후배들. 당시 20대 중반이던 그들의 가슴속에는 얼마나 시퍼렇다 못해 시커먼 멍이 들어 있었을까. 그 멍은 얼마나 많은 이들의 가슴에 맺혀 있었을까. 눈물 흘리는 후배의 어깨 너머로 미친 듯 환호하며 김대중 후보 자택 앞으로 몰려든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에는 물론 김대중을 정치적 동지로, 리더로 받아들인 타 지역 사람들도 많았겠지만 아빠한테는 환호 깊숙이 용솟음치는 한의 출렁임이 보였다. 그들의 억울한 과거를 김대중의 승리로 보상받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목 놓아 외쳤던 ‘대통령 김대중’의 등장은 명예 회복으로, 발버둥의 응답으로 받아들여졌을 테니까 말이다.
여기서 잊지 말아야 할 역사. 김대중과 2위 이회창 후보 간 표 차이는 39만 표. 박정희와 윤보선이 맞붙었던 제5대 대통령 선거의 15만 표 차 이후 최고의 박빙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60만 대군을 자랑했다. 만약 전역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이지문 중위가 예정돼 있던 삼성그룹 입사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양심선언을 위한 서울행을 포기했다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겠니. 이지문 중위 개인이 역사를 바꿨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야. 그런 개인들의 작은 결단, 수많은 이들의 경험 속에서 다져진 기대와 희망, 그리고 이를 실현하려는 하나하나의 노력이 모여서 역사는 자신이 가야 할 방향으로 흘러가는 거란다. 반대로 결단이 미진하고 희망이 덧없다며 포기할 때 역사는 가지 말아야 할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어. 살아가야 할 날이 많은 너희들이 앞으로 살아갈 날이 적은 아빠 세대보다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할 이유겠지.
김형민(SBS Biz PD)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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