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을 위한 '지연증명서'

이승준 2022. 2. 2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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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장애인 이동권 보장]

서울·인천장애인차별철폐연대와 노들야학 등 장애인권단체 회원들이 지난 22일 낮 서울 지하철 2호선 시청역 승강장에서 이동권 예산 보장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한겨레 프리즘] 이승준 |이슈팀장

2001년 여름, 휠체어를 타는 장애인 대학 친구 ㄱ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를 가기로 했다.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승강장에 내렸는데 그때 처음 알았다. 광화문역 승강장에서 교보문고까지 엘리베이터를 통해 이동할 수 없다는 것을. 지하 2층에서 지상까지는 엘리베이터가 있지만 지하 4층(승강장)에서 지하 2층 사이에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ㄱ은 장애인 리프트 작동을 위해 직원 호출 버튼을 눌렀다. 그는 리프트 타는 걸 두려워했다. 그해 1월 지하철 4호선 오이도역에서 노부부가 수직형 리프트를 이용하다 추락해 사망한 사고가 있기도 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광화문역을 무심코 지나칠 때가 많았다. ㄱ은 늘 ‘이동’을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의 세계와 나의 세계는 평행선을 달렸다.

광화문역 엘리베이터는 무려 18년 뒤인 2019년 9월에 생겼다. 장애인단체·시민단체들이 ‘출퇴근 리프트 타기 투쟁’ ‘1인 시위’ 등을 통해 줄기차게 이동권 보장을 요구해 이뤄낸 성과였다. ㄱ은 교보문고를 안전하게 갈 수 있게 됐다. 유아차를 미는 양육자들은 계단 앞에서 고민할 필요가 없다. 대형 서점에 가는 걸 즐기는 일흔의 장모님도 계단을 힘들게 오를 필요가 없어졌다.

2022년 2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여전히 승강장과 거리에서 ‘이동권 예산 보장’을 요구한다. 아침 출근길 지하철 운행 지연에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서울교통공사는 지난 22일 보도자료를 내어 시민 불편 민원이 총 2559건이라고 밝혔다. 분노는 엘리베이터 설치를 20년 가까이 유예하는 정부와 국회 대신, 눈앞의 장애인들에게 향한다.

지하철이 고장이나 연착으로 운행이 지연되면 역무실이나 전철 노선을 운영하는 누리집에서 ‘지연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열차 이용에 불편을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귀하께서 승차하신 열차가 지연되었음을 증명합니다.’ 회사에 ‘지하철 때문에 지각했다’고 제출할 수 있는 증빙자료다.

“나는 지각해도 지연증명서를 뗄 수가 없는데….” 회사에 다니는 ㄱ에게 아침 출근길은 매일이 전쟁이다. 일찍 나와도 지하철역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엘리베이터를 찾아 환승하다 보면 늘 시간이 빠듯하다. 환승역 엘리베이터가 출근 시간에 고장 나는 날엔 눈앞이 하얘진다. 다른 역을 찾아 돌아가다 보면 10분이면 이동할 거리가 1시간을 훌쩍 넘긴다.

비장애인들에게 지하철 운행 지연은 우발적 사건이지만, ㄱ을 비롯한 장애인들에게 이동권 보장 지연은 일상이다. 서울·수도권 지하철에 설치된 휠체어 리프트는 2001~2017년 사이 장애인 5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죽고, 다치고 난 뒤 ‘안 된다’던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생겼다. 저상버스 도입은 저조하다. 지난해까지 전국 시내버스의 42%를 저상버스로 보급한다는 게 정부 계획이었지만, 실제 보급률은 28%에 그친다. 장애인 콜택시는 여전히 호출이 몰릴 때 1시간 이상을 대기해야 한다. 장애인들의 개선 요구엔 늘 “예산이 없다” “나중에” 같은 답만 돌아왔다.

지난 23일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이동권 예산 보장을 약속한 뒤 전장연은 시위를 일단 멈췄다. 이들은 “3월2일 사회 분야 대선 후보 토론회에서 이재명, 윤석열, 안철수 후보가 답을 하지 않으면 시위를 재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갈등을 조직하고 공론화해 법이나 정책으로 다듬는 것이 정치의 역할이다. 이상론이지만 선거는 갈등을 도마에 올려 우리 사회가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장이다. 여성, 외국인 등에 대한 혐오를 잔뜩 부추기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갈등하는 상황을 강 건너 불구경 하는 정치가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대비할 수 있을까. 대선 후보들의 약속은 장애인들에게 ‘지연증명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귀하의 불편은 정부와 정치가 수십년간 방치해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증명합니다.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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