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된 김창완 "그림, 진심 담아 끝까지 하려고요"

권혜숙 2022. 2. 23. 15:0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인터뷰] 데뷔 때부터 산울림 앨범 재킷 직접 그려
"그림은 순수의 세계에 나를 던지는 번지점프"
가수, 배우, 라디오 DJ, 소설가, 동시 시인, 화가…. 이 정도 이력이면 명함도 여러 장일 텐데, 그에게는 명함이 따로 없다. 그는 그저 ‘김창완’ 이름 석자, 부스스한 머리에 해맑고 순한 미소 하나로 어디에서든 통하는 한국 대중문화의 아이콘이다. 김지훈 기자


삼형제 록밴드 ‘산울림’으로 데뷔한 지 올해로 46년, 가수 김창완(68)은 새로운 이름표를 하나 더 달았다. ​지난 1월 서울 강남구 갤러리 나우에서 열린 5인 작가 기획전 ‘아트토핑’에 작품 5점을 선보이며 ‘화가 김창완’으로 첫 전시회를 치른 것이다.

그가 그림을 그린 지는 음악만큼이나 오래됐다. 산울림의 데뷔 앨범부터 콘서트 포스터까지 다른 가수들처럼 얼굴 사진을 커다랗게 넣는 대신 크레파스로 직접 그린 그림을 넣었다.

“산울림 6집(‘창문 너머 어렴풋이 옛 생각이 나겠지요’가 수록된 1980년 앨범) 재킷 그림이 계단이거든요. 레드 제플린의 ‘Stairway to Heaven’처럼 하늘로 올라가는 계단을 그렸는데 완성된 건 영락없이 지하실로 내려가는 계단인 거예요. 그때 그림이 이렇게 어려운 거구나 했죠.”

김창완의 '코 없는 엄마: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본 엄마 얼굴'(2021, 캔버스에 아크릴, 162×112㎝). 갤러리 나우 제공


그 시절 스케치북에 그리던 그림은 100호(162×130㎝)짜리 캔버스로 커졌고, 그만큼 깊이도 깊어졌다. 선 몇 개로 형상화한 엄마의 미소를 따라 저절로 웃음을 머금게 되는 ‘코 없는 엄마: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 본 엄마 얼굴’을 비롯해 검은 우주공간에 해 달 별을 담은 ‘시간’, 산등성이에 걸린 달빛의 춤을 형상화한 ‘달밤’, 알록달록 색감이 돋보이는 ‘천 피스 퍼즐’, 흰 벽 창문으로 지는 해가 보이는 것처럼 면을 나눈 ‘석양’이 그가 세상에 처음으로 내놓은 작품들이다.

“그림은 꼭 번지점프를 하는 기분이에요. 순수의 세계에 나 자신을 던지는 거죠. 그림을 그리면 내가 얼마나 나에게 갇혀 있는지 깨닫게 돼요. 그래서 캔버스 앞에 앉는 건 나를 가리고 있던 것들을 걷어내고 감각적으로 완전히 발가벗겨지는 시간이에요. 캔버스 앞에서의 저의 당황스러움, 부끄러움, 달아나고 싶은 마음, 또 그런 것들에 반(反)하는 저의 유치한 반항, 그런 것들을 캔버스에 옮기고 싶었어요.”

김창완의 '달밤'(2021, 캔버스에 아크릴, 97×162㎝). 갤러리 나우 제공


화가라는 새 정체성을 얻었지만 그의 이름 앞에는 이미 가수 외에도 배우, 라디오 DJ, 동시 시인, 소설가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음반 20여장의 금자탑을 쌓았고, 배우와 라디오 진행자로 수차례 수상했으며, 에세이집 ‘이제야 보이네’와 소설집 ‘사일런트 머신, 길자’, 동시집 ‘무지개가 뀐 방이봉방방’ 등 10여권의 책에 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예술이라는 큰 틀에서 음악 미술 연기 글이 모두 하나로 연결되는 것일까. 열두 가지 재주에 저녁거리 없다는 옛말이 무색하다.

“그런데 제 친구는 저더러 오리래요. 저 상처받았어요. 오리는요, 걷죠. 수영도 하죠. 날아다니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잘하는 게 없대요. 그러면서 오리라고 놀려요, 참.”

그럴 리가. 그야말로 경계가 없는 르네상스맨 아닌가.
“그건 이쁘게 보면 그렇고요. 저는 이번에 같이한 작가님들이 진짜 훌륭하시고 아주 치열하게 작품을 하는 분들이라 많이 배웠어요. ‘록은 애티튜드’라는 말이 있지만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무릇 다 자세, 태도 아닌가 싶어요.”

김창완의 '시간'(2021, 캔버스에 아크릴, 193.5×130㎝). 갤러리 나우 제공


태도만으로 설명하기에는 기타부터 그림까지 모든 걸 정식으로 배우지 않고 혼자 익히고 해내는 그의 다재다능함이 놀랍기만 하다. ‘산울림’을 함께한 동생 김창훈과 후배 신해철 장기하, 드라마 ‘원더우먼’에서 만난 이하늬의 증언처럼 그는 타고난 천재인 건가 싶었다. 비결을 물었더니 “인생은 배우는 게 아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무리 꼼꼼하게 계획하고 트랙에 딱 맞춰 살아도 인생은 그저 흘러가는 거예요. ‘렛 잇 비(Let It Be), 렛 잇 고(Let It Go)’인 거죠.”

그를 ‘한국의 밥 딜런’이라고 하고 산울림을 가리켜 ‘한국의 비틀스’라고도 한다. 그러고 보니 밥 딜런과 존 레논도 그림을 그렸다. 곡 작업과 그림 작업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궁금했다.

“최근에 곡을 쓸 때는 가사보다 멜로디만 있는 곡을 좋아하게 됐어요. 가사라는 틀에 정서가 제한되는 것 같아 피하게 돼요. 미술은 제 의도가 한 획에 다 드러나 버리기 때문에 숨길 수가 없어요. 음악은 어떻게든 리본을 단다든지 색을 입힌다든지 위장하고 감출 수가 있는데 그림은 그게 불가능해요. 그래서 어렵기도 하고, 그래서 더 가보고 싶은 세계이기도 해요.”

그는 “캔버스가 내 마음을 읽는다”고 했다. 전시회 팸플릿에는 ‘마음이 서둘러 시키지도 않는 그림을 그려댄다. 그림이 원하는 걸 그리도록 내버려두고 싶다’고 썼다.

“캔버스가 커다란 벽처럼 느껴질 때는 없냐고요? 벽은 어디에나 있죠. 제일 큰 벽이 자기 자신 아니겠어요. 그건 미궁이죠. 그런데 흔히 그 벽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아요. 아니면 답에 접근했다고 오해하죠.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알고 있는 건 거의 없어요. 제 시발점은 거기예요. 눈을 조금만 떠봐도 아는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김창완의 '천 피스 퍼즐'(2021, 캔버스에 오일 파스텔, 72×91㎝). 갤러리 나우 제공


그가 데뷔하는 데에는 평단과 대중 모두의 지지를 받고 있는 황주리 작가라는 신뢰할 만한 주선자의 역할이 컸다. 그의 그림을 본 황 작가가 적극적으로 전시를 추진한 것이다. 황 작가 외에도 최석운 성동훈 다발킴 같은 쟁쟁한 중견들이 그를 위해 그룹전 자리를 내주었다.

그런데 데뷔 시점이 공교롭다. 미술 활동을 하는 가수나 배우들의 작품에 대한 논란이 일었던 게 불과 몇 달 전이다. 연예인들이 인지도를 이용해 미술계에 쉽게 진입하고 고가에 작품을 판매한다는 곱지 않은 시선이 있는가 하면 미술계가 지나치게 배타적일 뿐 이들이 미술의 대중화에 보탬이 된다는 주장이 맞섰다. 그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록 명언 중에 ‘누구나 노래할 수 있다’는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 누구나 그릴 수 있어요, 잘 그리든 못 그리든. 누구나 춤출 수 있어요, 잘 추든 못 추든. 그럼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는 뭘까요. 산울림으로 데뷔했을 때 평론가들은 우리 음악을 아마추어리즘이라고 했어요. 오래 고민한 끝에 제 나름대로 정리했어요. 끝까지 하면 프로, 끝까지 안 하면 아마추어라는 거예요. 끝까지 했지만 성공 못하는 프로도 많죠. 그러나 저는 취미가 아니에요. 끝까지 그림을 하고 싶은 거예요.

조심스러운 건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것 때문이에요. 모든 작가가 최선을 다해 작품 활동을 하지만 전부 발언할 기회를 얻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작품에 대한 제 진심을 보여드리고 싶은 건데 자칫 잘못 전달될 수도 있고요.”

김창완의 '석양'(2021, 캔버스에 아크릴, 130×162㎝). 갤러리 나우 제공


그는 여러 번 ‘진심’에 대해 말했다. 그의 서울 서초구 자택은 여느 갤러리 못지않게 그의 작품으로 가득하지만 그림과 함께 사진 촬영하는 것을 완곡하게 거절한 것도 같은 이유였다.

“사실은 진심 하나예요. 잘하는 것도 좋지만 진심이 담기는 게 제일 중요한데, 진심은 알기가 어렵죠.”

그림으로 시작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그의 본령인 음악으로 흘러갔다. 그가 요즘 푹 빠져 있는 건 뜻밖에 클래식이었다. 콕 집어서는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월광’이다.

“클래식이 정말 좋은 거예요. 예술가들이 고맙고, 연주가 할아범들도 사랑스러워요. 월광 1악장을 매일매일 쳤어요. 드라마 촬영 중간에 차 안에서 쉬면서도 악보를 뜯어봤죠. 힘들어서 안 될 줄 알았는데 어젯밤에 드디어 외워서 쳤어요. 하니까 되더라고요.”

김창완의 노래에는 유통기한이 없다. 아이유가 부른 ‘너의 의미’, 김필이 부른 ‘청춘’, 이승윤이 부른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처럼 후배들이 그의 곡을 재해석하고 리메이크하면서 그의 노래는 새로운 팬들을 만나 생명력을 더하고 있다. 그는 23년째 진행하고 있는 아침 라디오 방송 ‘아름다운 이 아침, 김창완입니다’를 위해 매일 출근하고, 오후에는 방송을 앞둔 새 드라마 ‘왜 오수재인가’를 촬영하며, 틈나는 대로 이면지에 스케치를 해뒀다가 귀가해 그림을 캔버스에 옮기고 또 여전히 매일 기타 연습을 한다.

아이 같은 웃음이 사라진 그의 얼굴은 때로 매섭다. 선한 역할만 해오던 그를 악역으로 변신시킨 ‘하얀거탑’(2007)의 안판석 PD가 그의 이런 모습을 포착한 게 아니었을까. 이후 그는 악한 의사나 변호사 역할을 자주 맡으며 ‘전문직 악역 배우’로 불리기도 했다. 새 드라마에서 또 악역을 맡았냐고 물었다가 “그런 스포일러가 어디 있어요?”라고 혼쭐났다. 김지훈 기자


“일본 산울림 팬이 얼마 전 발렌타인데이 선물로 초콜릿과 라디오 오프닝 멘트를 받아쓰기한 스무권 넘는 노트를 보냈어요(그는 오프닝 멘트를 직접 쓰곤 한다). 제가 그렇게 사랑받고 살아요. 그러니까 매일 열심히 해야 돼요.”

그 사랑은 그의 짓궂은 친구들의 표현을 빌면 ‘40년 넘게 지긋지긋하게 오래 해온’ 노력의 결과물이다. 그가 또 한 발 더 내디뎌 미술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섰다. 그의 진심이 잘 전해졌으면 한다.

권혜숙 기자 hskwon@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Copyright © 국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