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표 교수의 연극人 이야기]'시대의 작가' 선욱현 한국극작가협회 이사장

2022. 2. 1.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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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로 무대에 설 때는 휴가 기간입니다.”

(사)한국극작가협회 이사장 선욱현(55) 작가를 만났다. 작가, 배우, 연출을 하고 있는 그를 한마디로 수식하는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강원도립극단 초대 예술 감독을 거쳐 현재 (재) 춘천인형극제 예술 감독도 맡고 있다. 4개 직함으로 방대한 연극 분야의 중심에 서있는 그가 9년 만에 연극 <물고기 남자>에서 극 중 인물 이영복으로 분해 배우로 돌아왔다. <물고기 남자>가 탄력적인 무대로 읽힐 수 있는 것은 이강백 작가의 언어를 손질하지 않고도 희곡에 박혀있는 비극성을 저려오는 웃음으로 담아냈다. <물고기 남자>가 헤엄치는 동시대 한국사회를 투박하면서도 현실감 있게 채워내는 연출이 보였고, 배우들의 절묘한 앙상블이 오늘의 전경을 살려냈다.

전남 광주에서 출생해 전남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일보 하계 문예 <중독자들>(1995)로 당선된 뒤로 전투적으로 대학로 무대를 떠나지 않았던 그의 말투는 고향을 그려냈고 표정은 토속 연극 <품바>를 연기하며 450여 회 공연을 한 배우의 내공(內功)을 보여주었다. 그는 이메일로 프로필을 보내왔고 그의 연극 무대 인생은 5페이지로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에게 괴물 같다고 말하자 “천생 글을 떠나 살 수 없는 것 같다. 배우로 무대에 설 때가 휴가 기간”이라고 한다. 마주 앉은 테이블은 50센치 정도 되었고 대학로 거리는 오미크론 바이러스로 한산했다. 광주에서 대학까지 마친 선욱현은 5·18 광주민주화 당시 중학생 이였고 대학시절 연극반에서 살았다.

| 50여 편의 희곡을 쓰고 배우로 진지하게 놀 줄도 아는 연출가 선욱현

― 5·18 민주화 항쟁 당시 중학교 이었죠?

“중1 때 말로만 듣다가 대학교 1학년 때 5·18 광주 민주화 당시 상황을 또다시 들으니 이게 느낌이 또 다르더라고요. 엄청난 분노를 느꼈던 것 같아요. 당시 기억이 오죽 뚜렷했으면 서울에 올라오자마자 쓴 첫 작품이 ‘피카소 돈년 두보’(1995년)였지요. 이 작품에 나오는 가상의 도시가 ‘모항’인데 그 도시가 광주예요. 작품에 역사와 예술, 사랑을 모두 담고 싶었어요. 내가 직접 보고 들었으니 사람들에게 예술로서 당시 5·18 광주사태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작품에 역사와 예술이 들어가게 됐고 사랑과 사람을 빼면 너무 삭막할 것 같아 이 작품에 다 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지금 까지도 역사, 예술, 사랑은 평생의 화두가 되었죠.”

― 광주에서 태어나 활동은 대학로에서 했는데, 이제 강원도 춘천 사람이 되었군요. 그는 웃으면서 시선을 돌렸고, 한 마디를 던지면 5분 이상 대답이 날아왔다.

“2014년 1월에 강원도립극단에 첫 근무를 하면서 춘천에 갔어요. 그 전에는 춘천이 고향이던 연극 연출하는 후배가 있어서 공연하러 갔었고 마임축제 때 ‘물 싸움’이라는 야외공연으로 2009년에도 갔었어요. 도시를 느낄만한 여유는 없었는데 근무를 하면서 살게 되었는데 춘천이 참 좋은 도시예요. 가족은 다 서울에 거주하고 혼자 방을 얻어서 있게 되었는데 벌써 9년이 되었습니다. 제가 수많은 도시를 가 봤고 심지어 강원도 18개 시·군을 도립극단 때 두 번 이상 다 순회를 했는데 그냥 춘천이라는 조용한 땅이 기운이 너무 좋고, 춘천이라는 도시가 저와 기운이 맞아요. 지금은 별일 없는 한 계속 춘천에서 보내고 싶죠.”

―이사장으로도 (사) 한국극작가협회를 이끌고 있다. 어떤지?

“죽을 맛이죠(웃음). 춘천인형극제 일도 그렇고 개인적인 일도 그렇고 항상 바쁘게 살아오다보니 극작가협회 일까지 맡아 많이 버겁지요. 근데 제가 사랑하는 극작가들이 어떤식으로도 오해 받는 게 너무 싫어서 나서게 되었어요. 협회 회원들이 다 중임하라고 하는데 나한테 죽으란 거지요. (웃음) 그 정도로 힘들긴 하지만 책임감을 가지고 하고 있어요.”

― 9년 만에 남해 바다 양식장을 사들여 적조 현상으로 망해버린 극 중 인물 이영복으로 분해 <물고기 남자> 배우로 돌아오셨는데, 페이스북을 보니 팬들이 많더군요.

“배우도 했던 내가 도립극단에 있었을 때는 늘 남이 하는 것만 객석에 앉아서 보는 예술 감독의 입장에서 무대를 볼 때 마다 올라가고 싶었어요. 김성진이라는 젊은 연출이 작년부터 작품을 같이 하고 싶다고 했는데, 축제 일정하고 겹쳤어요. 안된다고 했더니 “저와 하지 않으면 이번 공연 의미가 없습니다”라고 해서 인형극 비수기인 1월 정도가 좋다고 얘기를 하고 지난해 11월부터 연습 일정을 잡으면서 출연을 하게 되었죠. 대학로 연출들은 전혀 나를 부르지 않는데 연출 제의를 뿌리치면 10년을 넘기겠구나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실은 제가 좀 움켜쥔 게 있었고 기회를 놓치지 말고 무대 위에 꼭 서야 되겠다고 욕심을 좀 부린 거죠.”

| 저는 전형적인 ‘구조주의자’ 입니다. 직업 1순위는 작가죠.

선욱현은 <피카소 돈년 두보>(1995) 로 첫 희곡을 발표한 후 <고추 말리기>(2001),<의자는 잘못 없다>(2002), <장화홍련실종사건>(2002),<거주자 우선 주차구역>(2006), <황야의 물고기>(2008), <돌아온다>(2015), <허난설헌>(2014), <바나나>(2020) 등 50여 편의 작품을 썼고 <몸>, <오필리어의 들판> 등 10여 편의 무용대본 창극, TV드라마까지 써왔다. 그가 걸어가는 이야기 세계는 방대했고 4권의 선욱현 희곡집과 시집도 펴냈다. <2001 한국대표희곡선>(집문당)에는 대표작 <고추말리기>가 수록되었다. 2015년 <돌아온다>라는 작품으로 제36회 서울연극제 우수작품상(극단필통)을 수상했고 영화 원작이 되어 제41회 몬트리올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서 금상을 받았다. 때로는 그가 쓴 희곡을 연출하고 배우로도 출연한다. <미스터 쉐프>를 비롯해 25여 편을 연출을 했고 <즉흥굿>(1993)으로 시작된 그의 배우 인생은 국내 대표적인 1인극 <품바>를 450여 회 공연했다. 극단 ‘모시는 사람들’ 활동 시절에는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 사건>등 다양한 작품에 배우로도 활동을 했는데 영화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를 비롯해 20여 편의 영화와 TV에 배우로도 활동하고 있다.

― 프로필에는 작가·연출·배우 활동으로 동선이 방대하더군요. 연극의 전 분야를 다 섭렵한 것 같다. 모든 분야를 석권하려고 전투적으로 달려온 것 같은 느낌이다. 정체성에 대해 혼돈스러울 것 같은데.

“사실 대학로 배우들이 많이 물어봅니다. 선욱현은 정체성이 뭐냐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어요. 극작가가 내 몸에 편하고 잘 맞는 옷이라고. 두 번째가 연출인 줄 알고 있는데요, 저는 연출이라는 일이 3순위도 아니고 4순위입니다. 2순위는 배우죠. 그 정도로 배우를 사랑합니다”(커피 한 모금을 입에 털어 넣고는 말을 이어갔다) 지금은 저희 세대에 비해 장르가 섞이는 부담감은 훨씬 덜 해진 것 같아요. 제가 아는 배우들도 극을 쓰고 연출을 하고 이제는 출연도 하면서 섞여가고 있어요. 저를 돌아보면 배우로 출발 했다가 작가로 간 경우라고 말 할 수 있겠죠.”

93년도 대학로서 활동하던 무렵 극단 <가가>에 들어가 포스터를 붙이는 생활을 했고 막내 단원으로 배우를 하는 동안에도 희곡을 써내려 갔다. 그의 습작은 대학연극반 시절에도 희곡쓰기를 멈춘 적이 없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글쓰기가 좋았다. 신혼 시절 신춘문예에 네 번 떨어지고 1995년도에<중독자들>이 문화일보 하계단막희곡에 당선되면서 희곡작가로 데뷔하게 된다. 그 이전까지 선욱현은 작가를 꿈 꿨던 적인 단 한 번도 없다고 말했고 배우나 감독이 되고 싶었다.

― 50여 편의 희곡을 쓴 작가의 꿈이 배우와 감독이었군요.

“지금은 지원금 아니면 공연을 안 하지만 그때는 연극 제작자가 있던 시절이에요. 편 당 300만 원을 주고 창작 희곡을 의뢰를 하는 거예요. 그것도 지원금을 넣겠다가 아니라 ‘300만 원을 줄 테니까 써주면 나는 이걸로 공연을 하겠다’였죠. 제가 그렇게 등단하자 마자 첫 해에 원고료로 번 돈이 1200만원이에요 희곡으로만. 눈이 획 돌았죠. 무명 배우만 하다가 ‘아니 희곡이 이렇게 돈이 된다고?’ 그래서 다른 알바를 안 하고 희곡에만 매진해서 3~4년을 한 거예요.”

― 희곡을 쓰는 작가 수업은 독학(獨學)으로 체득했는데 배우의 감각보다는 희곡 작가로 습득이 빨랐군요.

“작가 수업은 처음에는 혼자서 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가 이재명, 김창환, 한상철 선생님이 주도하셨던 한국극작가워크숍에서 4년을 함께 공부했어요. 저는 그때가 제 대학원 시절이라고 추억하는 데 연영과를 전공하지 않았고 국문과 문예 창작을 전공하지 않았던 제가 그냥 연극반 생활하고, 늘 방학 때면 서울 교보문고 종로서적에 와서 연극 책 사서 혼자 독학하고 이랬던 공부를 조금 체계화 시킨 시기가 그 4년이었거든요. 사실 무명 배우일 때는 자존감이 상승을 안 하잖아요. 근데 작가를 하니까 갑자기 존중 받고 뭔가 하는 것 같고 그러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거기에 너무 많이 매진하면서 작가로 달려온 거죠.”

극단 <가가> 활동을 접고 1995년부터 극단 <모시는 사람들> 단원이 된 선욱현은 무대에서는 배우가 되었고 돌아오면 희곡을 썼다. 1999년도 배우이자 신인 작가 시절 그의 작품 악몽(2000)이 서울연극제 참가작으로 공식 선정되면서 이 작품에 작가·연출을 하게 된다. 작품 ‘악몽’에 이어 극단 민예의 <고추말리기>(2001), <장화홍년 실종 사건>(2002)등 3년 연속 서울연극제에 공식 출품되면서 선욱현을 작가로 각인(刻印) 시켰다. 그의 대표 작품이 된 <돌아온다>(2015,극단 필통)로 제36회 서울연극제 우수작품상을 받았다.

― 희곡 <돌아온다>는 영화의 원작이 됐고 넷플릭스에도 볼 수 있더군요.

“허철 감독님이 연극을 3번을 보러 오시면서, 고민을 많이 하셨죠. ‘돌아온다’는 지나치게 연극적이에요. 영화는 리얼인데 연극을 영화로 옮기다 보니 시나리오 각색이 붙었고 그러면서 호불호가 있어요. 작가로서 봤을 때 영화 만족도는 전반적으로 만족이긴 하지만 욕심이 있긴 하죠. ‘돌아온다’가 넷플릭스에 올라왔다는 소식을 듣고 제작사 대표와 연이 있어서 전화를 했어요 ‘좋은 일 있으신 거 아니에요?’ 이렇게 물어 봤더니 웃더라고요. 넷플릭스에 올라갔다고 해서 제작사가 돈을 버는 구조가 아니더라고요. 작가한테 득이 되는 건 없었지요.” (웃음)

― <피카소 돈년 두보>(1995)를 시작으로 연극 연출도 25편 이상 하셨더군요.

“작가로 입지가 굳어지게 되고 극단을 창단하다 보니까 연출도 안 할 수가 없었어요. 신인 작가 시절에는 제 작품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욕심으로 연출을 했었지만 해 보니 제 몫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그래서 사실은 놨던 건데 2007년에 창단을 하면서 또 연출을 해야 되잖아요. 창단까지 했으니까 몇 년 간을 연출을 했죠. 근데 그때도 ‘역시나 연출은 제 몫이 아니다’라는 생각을 늘 했어요. 물론 작년에 ‘미스터 셰프(2021년도)’를 재공연 하면서 재밌게 했어요. 하지만 극작이나 배우를 할 때만큼 흥겹지는 않아요. 연출은 제가 4위로 밀렸다라고 얘기하는 게 연출은 저한테는 그냥 ‘일’인 것 같아요.”

― 어떤 장르를 하면 무대를 잘 살려낼 수 있나.

“ 연출은 다 잘 할 수 있는 건 아니고요. 코미디, 코믹호러 장르적인 것들이 맞는 것 같아요.<이발사를 살해한 한 남자에 대한 재판>(2008) 같은 영화적인 작품은 글도 쓰고 연기도 하고 하다 보니까 저만의 작품 색깔이 있는 것 같아요. 연출하는 작품은 연극제 작품은 아니고 그냥 관객들과 함께 흐뭇하게 재밌게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 같아요. 배우할 때는 너무 편해요. 저는 그냥 한 인물만 책임지면 되잖아요. 저는 배우할 때 노는 거예요. 한 인물에 몰입하고 또 상대 배우들하고 만나서 아이 컨택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놀다 오는 게 저한테는 놀이예요. 배우를 할 때에는 진짜 휴가 기간이에요. 물고기 남자가 들어왔을 때 고민을 했어요. 캐릭터와 안 맞는다 생각했는데 잘 맞았어요. 연출이 제가 가지고 있는 이면들을 잘 살리고 잘 봤던 것 같아요.”

― (사)한국극작가 협회이사장과 예술 감독, 배우를 하고 연출을 하면서 희곡을 쓸 시간이 있던가요.

“이 와중에 일주일 만에 탈고를 했어요. 1년을 못 쓰고 지난 겨울을 넘기면 안 될 것 같아서 정말 괴물이 돼 썼어요.(36페이지 장막극) 무당이 신 들어오듯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는 걸 느낄 때 하얀 종이 위에 하고 싶은 얘기를 그리고 인물들을 이용해서 소설도 시도 아닌 극의 형태로 만들어내는 시간들이 너무 재밌는 것 같아요.”

― 일주일 만에 희곡 한편이 탈고될 정도면 선욱현 만의 특별한 방법이 있죠.

“저는 전형적인 구조주의자예요. 집을 세워 놓지 않으면 글을 못 쓰는 사람입니다. 모티브만 설정하고 일단 출발시키는 작가들도 많은데 저는 기승전결을 따라 갑니다. 시작해서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어떤 고비를 맞고 마지막에 결국은 이렇게 끝나지 않을까라는 큰 틀이 정해지지 않으면 출발하지 않아요. 일단 집을 지어 놓고 시퀀스 별로 고민을 하고요. 트리트먼트를 최소 12~14페이지 정도 설계를 한 다음에 대사 지문을 쓰기 시작해요. 이제 그런 구조로 하다 보니까 트리트먼트 만들기가 어려운 거지 실은 희곡의 구조가 지어지기만 하면 10일 이내에 대부분 쓰죠.”
그는 천생 작가이자 무대에서는 광대였다. 글을 써 내려가는 장면들을 낭독희곡 처럼 들려주었고 소리의 톤은 감정을 담아 인터뷰도 연극적인 장면처럼 느껴졌다.

― 희곡을 10일 만에 쓴다고요?

“아니요. 그런 작품도 있다는 겁니다. ‘돌아온다’(2005년) 같은 경우는 7년 걸렸어요. 어떤 작품은 그렇게 7~8년 걸리기도 하고요. 이번에 쓴 작품 구상은 1년 동안 했지만 정작 쓴 거는 또 일주일 만에 그냥 쓰기도 하고 대중 없는 것 같아요. ‘의자는 잘못 없다’(2001년도)는 가장 초 단시간에 3주 만에 썼죠. 그때가 삼십 대 초반이거든요. 20대 때는 뭔가 되고 싶은 기간이었다면 30대가 되고 나니까 뭔가 갖고 싶은 거예요. 집에 소파보다 더 좋은 소파가 눈에 보이고 집도 소유라는 화두로 몸 안에 들어와 생각을 한 거죠. 그래서 ‘소유라는 게 뭘까, 뭔가를 갖는다는 게 뭘까’ 계속 되풀이 하다가 제가 항상 희곡을 구상하고 발상이 떠오르면 논의하는 게 제 아내거든요. 그래서 아내한테 생각을 들려주면서 물어봤어요.”

―“작가의 영감을 어떻게 들려줍니까.” 선욱현은 <의자는 잘못 없다> 구성 당시를 5분 모노로그 1인극 처럼 재현했다.

“‘의자가 하나 있어 그런데 이게 만든 사람이 있고 사려는 사람이 있고 팔려는 사람이 있고 그걸 사는 걸 반대하는 사람이 있어 이렇게 해서 이야기를 좀 써보려고 하는데 어때요’ 그랬더니 아내가 재밌는 발상이라고 해 보라고 해서 쓰기 시작한 게 정말 3주 만에 탈고를 뚝딱했어요. 당시 문예진흥원에서 하는 창작 활성화 기금이라고 있었어요. 지금의 창작 산실 같은 건데 당선되면 1천만 원을 작가에게 주고 공연할 극단에게 2천만 원을 주는 제도였어요. 한마디로 희곡 하나가 3천만 원을 가져오는 공모였는데 그게 덜컥 된 거죠. 그래서 초연을 20021년에 하게 된 거죠. <의자는 잘못 없다>는 저한테는 선물처럼 다가 왔던 작품 이었어요.”

― 작가 작품에서는 배우들이 좋아 할 만한 매력적인 극 중 인물이 많더군요.

“작가로 연극은 배우 예술이라는 것에 동의합니다. 배우는 무대에 올라가면 무조건 즐겨야 한다 생각하고요. 작가로 배우가 극 중 인물로 분해 어떻게 하면 놀 수 있는지 배우가 이야기를 연기로 잘 풀어갈 수 있는지 항상 고민해요. 제가 연출을 할 때에는 배우가 얼마나 즐겁게 노는지 봐요 제 작품에는 그냥 엑스트라는 절대 없는데 배우들이 내 작품에서 반짝반짝 빛났으면 좋겠어요. 반대로 싫어하는 작품은 배우들을 꼭두각시로 쓰는 연극, 너무 연출의 그림이 앞선 작품들은 조금 부담스러워요.”

| 배우로 무대에 설 때는 한 가지에만 집중하고 몰입할 수 있는 최고의 휴가 기간입니다.

― 연극 무대에서 알려진 연출가이자 희곡 작가이면서 제1회 서울연극인 대상 연기상 수상(작품, 카모마일과 비빔면)을 한 배우로 TV와 영화에서 활동하면 PD도 부담스러울 수 있을 텐데요.

“꿈은 영화였어요. 92년도에 서울 처음 올라와서 감독이 되겠다고 한국영화아카데미 시험을 봤어요. 떨어지고 93년에 대학로로 온 거에요 그때 붙었으면 영화 일을 하고 있었겠죠. 우연히 배우가 된 건 아니에요. 사실 연극보다는 영화에 가서 배우로써 많이 쓰였던 것 같아요. 캐릭터가 있다고 감독들이 보면 한 번씩 이렇게 쓰니까 따로 오디션을 보지 않아도 그냥 연락이 와서 간 경우도 있었거든요.”

― 희곡을 쓸 때는 작가로 그만의 이야기 세계를 구축했고, 배우로 무대에 설 때는 역할에만 집중했다. 배우 활동을 생업을 위한 단순한 활동을 아니었다. 선욱현은 배우의 감각으로 극중 인물의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그는 극 중 인물과 자신을 ‘접착제’로 표현했고 역할을 맡으면 제대로 살아보고 싶었다. “배우로 무대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배우로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그 역할이랑 딱 접착 되는 것이죠. 그냥 논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아요. 재미있었던 게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 사건’(2003년도) 초연을 제가 했는데 염소팔이라는 배달부 역할을 했어요. 그때 처음으로 느낀 게 하나가 있어요. 보통 분장실에서 기다리면 뭐 이영복도 그렇지만 사실은 긴장되거든요. 충분히 연습을 했다 해도 모자라는데 이번에는 뭐 연습량도 부족한 것 같고 워낙 배우들이 바쁘니까 긴장되잖아요. 그런데 연습할 때 공연을 기다리고 있으면 무대가 더 편한 거예요. 기다리는 것보다 무대로 나가서 극 중 인물의 삶을 사는 게 더 편해요. 역할을 맡았을 때 내가 아니니까 처음에는 부대끼죠. 연출과 상대 배우를 통해서 그 인물이 되어가고 인물의 호흡으로 어떤 말투가 형성돼요. 상대 배역을 만나고 관객을 만날 때 배우가 인물이 되어가는 것을 느끼고 저는 그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한 번 그 인물이 되어보고 그 인물로 제대로 살아보는 게 제가 배우를 하는 이유이고 그게 좋은 거죠.”

― 극단 <모시는 사람들>에서 활동하고 극단 <필통>을 창단했다.

“극단 모시는 사람들은 품바를 공연할 때 아는 형이 모시는 사람들 극단이랑 친해서 뮤지컬을 보게 되었고 반해서 입단해서 배우 겸 조연출로 95년도에 입단하게 됐죠. 내가 스텝 일도 알기 때문에 병행했지요. 필통은 2007년에 창단했어요. 내 작품을 하고는 싶은데 극단 모시는 사람들에는 이미 김정숙이라는 큰 작가가 계셨고 대표님께 말씀을 드리고 내 작품을 하고 싶어서 만들게 된거지요. 아들 이름 짓기보다 극단 이름 짖기가 힘들었어요. 창문 너머로 히딩크 당구장이 보이 길래 히딩크 극단이 될 뻔했어요.(웃음) 그러다 필통이 나왔고 그냥 필통 하기엔 아쉬워서 의미를 붙여서 ‘필(feel)이 통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세상과 통하려 한다.’ 라는 중의적인 의미로 이름을 지었죠.”

그의 표정은 다양했다. 묻고 말을 뱉어 낼 때는 속도를 조절하며 정확한 감정을 나타내는 배우였고 질문을 들을 때는 작가의 태도를 보였다. 작가의 희곡을 연출 하는 경우는 있어도 그는 3종 경기 달인처럼 자신이 그려낸 <황야의 물고기>(2009년) ‘카모마일과 비빔면’(2012년도) 에서는 작가· 배우로 무대에 섰고 <빙하기, 2042>(2012년도)에서는 작가·배우·연출·제작까지 했다.

― 활동이 특이하군요.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연출하는 경우는 있어도 배우로 무대에 선다는 게.

“그렇게 좋아하진 않아요. 내 작품 망치고 싶지 않고(웃음) 나를 훌륭한 배우라고 생각을 안 하기 때문에 좋아하진 않아요. 욕심이었겠죠. 작가·배우·연출·제작을 하게 된 <빙하기, 2042>는 제가 그 때 마음이 욱해서 만든 작품이었고, 완전 망했다가 빚도 어마어마하게 지고 춘천을 간 거예요. 꽤 만석으로 공연을 올렸지만 천 몇 백만 원 빚을 지고 상당히 어려웠어요. 그러던 중에 ‘강원도립극단’이 생겼고 서류를 접수했는데 되고 나니 후문에 강원도에서 당시 창단 공연을 직접 써줄 수 있는 작가 능력이 있는 예술 감독을 원했다고 들었습니다. 처음에 두 번 거부를 했어요. 첫 번째 황당한 이유를 내세웠죠. “내가 너무 젊다” 그때 마흔 여섯이었는 데 무슨 마흔 여섯에 공공 극단 예술 감독이냐 그리고 필통을 창단한 지 이제 7년밖에 안 되었고 극단을 챙겨야 된다고 버텼어요. 망해서 벼랑 끝에 있으면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가 그 때 희한하게 절친한 연출이 한번 원서라도 넣어보라고 강권해서 서류를 넣었고 면접까지 가게 되었죠 그러다가 덜컥 된 거죠.”

| ‘춘천인형극축제’를 공연예술축제로 발전시키고 싶습니다.

(재) 강원도립극단 초대 예술 감독(2014~2018)이 된 선욱현은 강릉이 고향인 조선중기 여류시인 <허난설헌>(2014)을 희곡으로 옮겼고 강원도 탄광지역을 배경으로 한 <아버지 이가 하얗다>(2017)를 집필했다. 연희극 <메밀꽃 필 무렵>을 기획하면서 강원도립극단이 지역콘텐츠를 개발하고 공연 할 수 있도록 도립극단의 방향을 잡았다. 그는 도립극단을 그만 둔 후에도 춘천을 떠나지 않았다. 춘천인형극제 사무국에 근무하던 한 지인이 제안해 춘천인형극제 예술 감독을 맡게 된다.

―일들이 운명처럼 다가오는군요. (재)춘천인형극제 예술 감독도 하시는데, 운을 받아들이는 타이밍과 감각이 절묘하게 느껴진다.

“돌아보면 제가 인형극에 인연이 많아요. 대학 연극반 시절에도 그렇고요. 인형극제하고 인연은 2014년에 춘천을 갔는데 유명한 축제가 춘천 인형극제와 마임 축제가 있잖아요. 그때는 아는 사람 없는데도 그냥 가게 됐어요. 구경을 가서 사람도 만나고 그러다가 연극계 후배가 인형극제 기획팀장으로 들어간 거예요. 저 보고 오라고 할 생각은 못 했는데 어느 날 제가 도립극단을 그만 둬 버리고 서울로 안 올라가고 춘천에 있을 거다 하니 ‘도립극단보다 대우는 안 좋지만 형님 그럼 우리랑 일하면 어때요’라고 저를 초대를 해준 거죠. 그래서 가게 된 겁니다.”

― 관객으로 바라보던 ‘춘천 인형극제’에 예술 감독으로 어떤 변화를 주고 있나.

“2019년에는 활성화를 넘어서 침체기 가까울 정도로 조금 다운돼 있었죠 조직 붕괴도 됐고 극장도 뺏기고 예전처럼 시민들도 많이 안 온다는 느낌이었고요. 지금 이제 3년이 흘렀는데 3년 만에 급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죠. 제가 들어올 때 직원이 다섯 명 이었던 게 지금은 30명 가까이 되고 예산도 늘어나고 완전히 활성화 되면서 춘천인형극제는 옛날처럼 분위기가 형성되었죠. 춘천시장도 인형극제를 아끼시고 지역의 대표적인 축제로 육성시키시려고 하는 것 같아요. 감사하고, 고마운 일이죠.”

― 국내 인형극 작품이 국제적인 작품들과 비교하면 어떤가요?

“춘천인형극제에 근무하며 해외는 3번을 다녀왔어요. 우리나라 인형극 역사도 긴 편에 속하고 인형 제작 실력과 작품 수준도 높은 편입니다. 하지만 숙제는 있습니다. 솔직한 얘기를 드리면 해외 축제(몬트리올, 스페인 등)를 다니면서 작품을 한 60~70개를 봤는데 글로벌 스탠다드를 살짝 맛 봤어요. 단순한 비교는 어렵지만 한국이랑 비교하면 한 20개 팀 정도만 글로벌 스탠다드와 조금 붙어도 될 만큼이고 많은 팀들이 아직은 소박한 규모이고 방문 공연을 목적으로 제작되는 공연이 많습니다. 춘천인형극제가 이러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노력중이인데 신작 지원도 하고요. 레퍼토리 지원이나 제작 지원들을 통해서 눈높이가 오를 만큼 오른 어린이관객들 그리고 성인관객들이 봐도 감동을 줄 수 있는 공연예술축제로 발전시키려고 노력중입니다.”

| 나한테 아내는 슈퍼우먼이고 철인이다.

―선욱현은 배우 아내와 결혼해 아들 둘을 낳았다. 첫째가 두 살 무렵이 되어도 걷고 말을 안 했다. 늦는구나 생각을 했다. 부부는 아들을 데리고 병원에서 염색체 검사를 받았고 ‘선천성 염색체 질환’ 판정을 받았다.

“이게 ‘다운증후군’처럼 어느 정도 IQ가 있어서 사회생활이 가능한 정도가 아닙니다. 평생 케어 해야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아이가 신의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선생님 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요. 그 아이가 없었다면 난 살아가면서 고민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처음엔 당황했지만 지금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요. 아내는 나보다 한 등급 위예요. 철인이죠. 아이를 27년 케어하면서 연기 활동하고 춤을 좋아해서 춤 레슨도 다닙니다. 그리고 집안일 까지 세심하게 다 해내지요. 정말 철인이고 슈퍼우먼이에요.”

― 아내한테 할 말이 많겠군요. “아내는 중견 배우 김곽경희로 연극 무대와 영화 활동을 하며 개성 있는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다.”

“결혼식 전날 프러포즈를 했는데 이렇게 얘기 했다. ‘보통 결혼이 꿈의 무덤이라고 하더라. 결혼을 하면 꿈을 포기 한다고 하는데 우리는 앞으로 서로의 꿈을 이야기하고 지켜주자’ 라고 약속했어요. 그랬더니 아내는 흰머리가 날 때까지 무대에 서있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지금도 그 약속을 지키고 있고 앞으로도 그 약속은 꼭 지켜주려고 합니다. 나는 우리 아내가 나이를 먹을수록 많이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쓰임 당하는 모습이 자랑스러워요.”

― 선욱현 작가한테 극단 모시는 사람들 김정숙 선생이 인생의 ‘멘토’라고 하더군요. 배우로는 누굴 닮고 싶나.

“나침반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할 때 ‘대표님은 이럴 때 어떻게 가셨지?’ 생각하며 갑니다. 대표님은 마음 그릇이 어마어마하신 분이에요. 작품 <강아지 똥>으로 일본 공연을 갔다 오시면 극단 배우들 선물을 사시는데 15명 선물을 다 따로 사오시죠. 사랑의 그릇이 정말 크신 분입니다. 배우로서는 최민식 배우, 김혜자 배우를 존경하죠. 확실히 완전 몰입형 배우들이 좋아요. 동물처럼 몰입이 쌘 배우들. 나도 그러고 싶어요. 영화 ‘생일’ 촬영 갔을 때 전도연 배우를 처음 만났는데 촬영장에 3일 울다가 온 사람으로 오더라고요. 그 정도로 몰입하는 배우들이 좋아요. 작가로서는 난 이렇게 얘기 해요. 난 선생이 많다고요. 내가 독학으로 글 쓰는 걸 공부 했는데 여러 선생님들의 글을 읽으면서 그 소스들을 나한테 입히는 작업을 했어요. 영향을 많이 줬던 선생님은 이만희 선생님이고요. 선생님의 글은 깊고 편안하고 달디 달아요. 닮으려고 노력했던 거 같아요.”

― 술과 일을 좋아해서 선욱현의 작업은 ‘알콜 홀릭’, ‘워킹 홀릭’이라던데.

“올해 55세인데, 아직 남들 말로 당신만 하루가 32시간이라는 얘기를 들어요. 그 정도로 일만 하고 술도 좋아해요. 그래서 워킹홀릭, 알콜홀릭이지요. (웃음) 앞으로 꿈은 내 일상을 단순화시키는 겁니다. 한 분야만 몰입할 수 있는 것이 꿈꾸는 인생이지요. 지금은 너무 가지 수가 많지만 줄이고 싶어요. 지금은 희곡한테 미안하지요. 희곡으로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내가 희곡에게 쏟는 시간이 너무 없어서 미안한 거지요. 남은 인생은 최대한 희곡을 공부하고 고민하고 희곡과 찐하게 연애하고 싶은 마음이죠.”

밖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인터뷰 장소를 나와 <물고기 남자>가 공연되고 있는 선돌극장으로 600미터쯤 걸었다. 관객은 만석이였고 배우로 돌아온 선욱현을 보려고 관객들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무대는 잔잔한 물길도 삼킬 것 같은 양식장 내부가 보였다. 후면은 대형 바다그물로 폐사되어 가고 삶에 물기가 말라버린 분위기를 희곡을 따라 투박하게 살려내고 있었다. 야전 침대 두 개가 보이고 선욱현은 극중 인물 이영복으로 분해 전파가 잡히지 않는 고장 난 라디오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양식장을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김진만은 “며칠 째 죽은 물고기만 건져냈더니 씨발. 나도 이젠 죽겠어.(중략) 다 죽은 거야! 한 놈도 남김 없이. 수십 만 마리가 한꺼번에 다 뒈져버렸어!” 파라다이스 호를 타고 죽음의 적조 현상을 구경나온 관광객들은 암초에 부딪쳐 적조의 죽음으로 빠져들고 생명을 구원할 수 있는 잠수부들은 죽은 자를 건져내 보상금에 목 말라 있는 거대자본승자독식주의 아수라를 보는 것 같다.

9년 만에 작가·연출가에서 배우로 이영복을 그려낸 선욱현은 자본에 함몰되지 않는 인간의 체온을 묵직하게 채워냈고 그의 연기는 무대의 텅 빈 수조를 내면으로 채울 정도로 깊어있었다. 그의 말이 떠올랐다. “이게 20년 전 작품이지만 이 작품을 본 관객들이 요즘 작품인가 물어볼 정도로 여전히 유용한 작품이죠. 그것이 이 시대의 작가 이강백 선생님의 탁월함인 것 같아요.” 공연이 끝난 뒤 슬리퍼를 신고 극장 입구로 나온 그에게 20여명이 기다렸고 그와 사진을 촬영했다. 그 틈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 뒤 극장 앞 장면들은 그의 페이스북으로 생중계 됐다.

대경대 연극영화과 교수(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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