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를 인정하는 작은 실마리

한겨레 2022. 1. 2.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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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사의 어쩌다 마을]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장태희

[김여사의 어쩌다 마을]

전에는 집집마다 배달되던 신문이 요즘엔 아파트 1층 우편함에 꽂힌다. 공동배달센터에서 여러 신문을 한꺼번에 배달한다. 어쩌다 자정 넘어 귀가해 우편함을 보면 어느 집이 무슨 신문을 보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신문 배달이 수지 안 맞는 사업이 된 시절의 새로운 풍경이다.

둥글이는 한겨레를 구독하는 이웃이다. 최근 재미난 일을 겪었단다. 둥글이가 사는 아파트는 12층으로 같은 라인의 스물네집 중 신문을 보는 집은 세집인데, 한겨레, ㅈ일보, ㄷ일보가 각각 한부씩이라고. ㅈ과 ㄷ은 대표적인 보수 일간지다. 출근하는 막내를 버스 정류장에 데려다주려고 새벽 6시쯤 집을 나서는데, ㅈ일보를 보는 같은 층 앞집의 우편함은 거의 비어 있단다. 새벽잠 없는 어르신이 일찌감치 챙겨가신 것이다. 어쩌다 시간이 겹쳐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날이면 들고 있는 신문의 상반되는 헤드라인을 서로 힐끔거리기도 한다고. 답답한 마음이야 서로 마찬가지겠거니 한단다.

얼마 전 둥글이가 밤 12시 넘어 집에 들어오는 길이었다. 신문을 챙기다가 그날따라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ㅈ일보도 함께 챙겨서 앞집 현관 앞에 놓았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현관을 나서는데 한겨레가 놓여 있었다. “그 뒤로 거의 매일 아침 우리 집 현관 앞에 한겨레가 놓여 있는 거예요. 어쩌다 제가 늦게 귀가할 때 한번씩 챙길 때도 있지만 어르신이 챙겨주는 경우가 많지요.”

ㅈ일보를 구독하는 어르신과 한겨레를 보는 둥글이의 정치적 입장은 아마 상극일 것이다. 대선이 다가오면서 불편한 마음은 더 강해질 수도 있다. “그래도 앞집 어르신과 서로 신문을 챙겨주면서 거리가 조금은 좁혀진 듯한 느낌이에요. 7층까지 신문을 가지고 올라오다 보면 궁금해서라도 어르신이 한겨레를 들춰보지 않을까요?” 살짝 기대도 걸어본다는 둥글이다.

둥글이는 이 이야기를 우리 마을 잡지 <디어교하> 이번 겨울호에 실었다. 그는 <디어교하>의 마을기자로 기획부터 취재, 교정까지 참여하고 있는 열성 멤버다. 3년 전 직장을 그만두고 지금은 막걸리 양조장 우리술연구소를 차렸고, 개업 준비에 한창이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을 재료로 지역의 물과 공기, 바람으로 빚어 지역에서 마시는 술이 좋은 술이라고 믿는다. 지역에 기반을 둔 다양한 술이 많이 나와야 한국의 획일적인 술 문화도 바뀔 수 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지역이 ‘작은 실마리’가 되는 사례 중 하나일 것 같다.

둥글이는 한겨레의 창간 주주이기도 하다. 삼십년 넘게 구독하다 조국 사태 때 구독을 끊었다. 그러다 큰딸의 권유로 다시 구독하게 됐다. 큰딸 진희는 올해 27살, 얼마 전 출판사에 북 디자이너로 취직했다. 종이신문과 거리가 멀 것 같은 세대인 진희가 한겨레를 선택한 이유가 궁금해졌다. “조국 사태 때 아버지는 한겨레가 이러면 안 된다며 배신감을 느끼신 것 같았어요. 하지만 저는 불공정이나 청년층의 분노를 다루는 기사들에 공감이 갔어요.” 진희는 한겨레가 젠더를 다루는 방식에도 호감을 표했다. “차별금지법을 계속 물어봐주고 페미니즘 시각에서 남성 정치인의 여혐 발언 꼬집는 기사도 속이 시원해요.”

한겨레를 바라보는 아버지 세대와 딸 세대의 시각이 이렇게 다르다. “저도 아버지의 영향으로 한겨레를 보고 크면서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투표권이 생긴 이래 선거철마다 ‘뽑을 사람이 없다'고 생각해왔는데, 올해 처음으로 아버지가 공감해 함께 웃었어요. 하지만 딱 여기까지고 정치 얘기 꺼내면 피곤해지니 진지한 얘기는 안 해요.”

진보를 지향해도 추구하는 내용은 다를 수 있다. 둥글이의 가족도 그걸 체험하는 중이다. 요즘 진희는 주중에는 서울에서 자취하고 주말에만 집에 온다. 신문 대신 이메일 뉴스레터로 뉴스를 접한다. 딸도 자취를 나갔으니 조만간 한겨레를 끊으려던 둥글이는 다시 고민이다. “한겨레도 마냥 마음에 드는 건 아니지만 계속 구독할까 해요.” 딸과 교감할 화제들이 좀 더 생기고, 앞집 어르신에게 적어도 ㅈ일보와 다른 이야기가 있다는 걸 알려드릴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도 해본다.

대선의 계절이다. 역대급 비호감 선거라고들 한다. 언론에 대한 신뢰가 떨어진 지도 오래다. 진보(언론)에 대한 기대도 저마다 다르다. 작은 차이로 서로 갈등하고 등지기도 한다. 결국 서로의 생각과 입장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 외에 뾰족한 해답이 있을 것 같지 않다. 한겨레와 ㅈ일보를 서로 챙겨주는 이웃들이 ‘작은 실마리’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지역이 해답은 못 돼도, 실마리는 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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