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곽용희 기자
사진=곽용희 기자
근로자가 회사와 고용관계를 종료하는 과정에서 합의금을 받기로 하고 '회사를 상대로 한 모든 청구권을 포기한다'는 약정을 맺었어도, 국가로부터 실업급여를 받을 권리까지 포기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는 법원 판결이 나왔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단독 김상근 판사는 최근 글로벌 종합인사관리대행업체 G사가 근로자A를 상대로 낸 약정금 청구 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

G사는 한국시장 진출을 원하는 글로벌 기업의 종합인사관리 대행(PEO, Professional Employer Organization Model) 업체다. 즉 고객사인 글로벌 기업을 위해 일할 전문가를 G사의 이름으로 고용하고 4대보험 처리나 퇴직금 등 고용·인사와 관련한 법률 사무를 대행하는 형태의 아웃소싱 업무를 한다.

G사는 고객사인 한 글로벌 기업(고객사)을 위해 컴퓨터 보안전문가 A와 고용계약서를 작성했다. 그런데 갑자기 고객사가 실적 부진을 이유로 한국지사 철수를 결정 하면서, G사는 2020년1월 A에게 퇴사를 권고하게 됐다. 이 과정에서 A는 직접 고객사와 권고사직에 따른 보상조건을 협상했고, 결국 최종 합의금을 지급받는 조건으로 '자발적 퇴직' 형태로 고용관계를 종료하기로 합의했다.

양자는 퇴직 약정서를 작성하면서 "A는 합의금을 받는 조건으로 G사나 고객사를 상대로 한 모든 청구권을 포기(청구권 포기)하고, 해고와 관련된 모든 분쟁절차·보상 등의 책임을 면제(책임면제)시키는 데 동의한다"는 조항을 집어 넣었다. 이에 따라 G사는 A에게 최종합의금을 지급했다.

그런데 A는 돌연 서울지방고용노동청에 "회사가 자발적 퇴직으로 신고해야 위로금을 지급하겠다고 했다"며 자신이 해고당했다고 주장하고 실업급여를 신청했다. 근로복지공단의 '이직사유' 확인 요청에 G사는 "정리해고에 의한 것"이라고 확인해줬고 결국 이직사유는 변경됐다. 이에 G사는 "A가 청구권 포기와 책임 면제 약정을 위반했다"며 "자발적 퇴직을 조건으로 지급한 합의금 중 일부인 3750만원을 반환하라"고 청구했다.

결국 이 사건에서는 G사와 A사가 맺은 청구권 포기 약정과 책임면제 약정이 유효한지, 청구권 포기 약정에 실업급여 청구 포기도 포함됐는지가 쟁점이 됐다.

법원은 A의 손을 들어줬다. 김 판사는 "추가 합의금을 받는 조건으로 해고와 관련한 어떤 불복·이의제기도 하지 않는 내용의 약정은 근로자의 권리를 부당하게 박탈하는 것으로 효력을 인정하기 어렵다"며 "계약 위반시 합의금 반환의무도 법에 따라 지급받을 수 있는 금액을 초과한 부분에 한해서만 유효하다"고 제한 해석했다.

실업급여 청구권은 포기 약정에 포함되지 않는다고도 판단했다. 김 판사는 "책임면제 약정은 당사자들 사이에서 불복이나 이의 제기를 하지 못하는 것"이라며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고용보험법에 따른 실업급여를 청구하는 것은 약정에서 정한 금지사항에는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시했다. 이어 "청구권 포기 약정에 실업급여 청구가 포함됐다고 해도, 실업급여 제도는 근로자의 생활안정과 구직 활동을 촉진하기 위한 강행규정이므로 이를 포기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한편 법원은 종합인사관리(PEO) 형태로 맺은 고용계약도 유효하다고 판단했다. PEO는 최근 한국지사나 법인이 없는 해외기업들이 한국에서 근로자를 고용할때 종종 사용하는 형태로, 새로운 사업모델로 떠오르고 있다. 실제 사용주가 아닌 사람이 자신의 명의로 고용하는 형식이라 적법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김 판사는 "인사관리대행업무는 강행법규에 위반되는 내용이 아니라면 법적 구속력이 인정된다"며 "무효라고 볼 경우 한국에 자회사나 지점이 없는 국외기업체와 계약을 맺은 근로자들이 부당노동행위를 당하거나 정당한 근로 대가를 받지 못해도 사실상 구제를 받지 못하는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용문 법무법인 덴톤스리 변호사는 "최근 해외법인들이 많이 사용하는 종합인사관리 대행이 유효한지에 대해선 논란이 있었다"며 "적법성 여부를 판단한 드문 판결"이라고 말했다.

곽용희 기자 ky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