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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 달간 웹디 교육, 카페서 QR체크"…이게 '자활 2030' 현주소

중앙일보

입력

노동자. 사진 픽사베이

노동자. 사진 픽사베이

“속칭 ‘삐끼(호객꾼)’나 ‘폰팔이’도 해봤고 전국을 떠돌며 안 해본 일이 없어요. 제 나이보다 더 많은 아르바이트를 해봤는데 가난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았죠.”

서울에 사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A씨(38)의 말이다. IMF 외환위기 때 학생이었던 그는 교직원으로 일하던 부모가 빚보증을 잘못 선 탓에 집안은 풍비박산 났고 줄곧 생활고를 겪었다. 한때 40㎏이 빠질 정도로 하루에 3~4시간만 자면서 일했고, 막노동하다 사고로 오른쪽 눈이 실명되는 등 건강도 나빠졌다.

“너 이렇게 살다가 ‘인생극장’ 나오겠다.” 친구의 농담에도 웃을 수 없었던 그다. ‘이런 삶을 살 바엔 차라리 죽겠다’라는 생각이 들던 때 찾은 동사무소에서 자활근로사업을 소개받았다. 1년 동안 카페 등 자활근로사업단에서 일한 결과 내린 결론은 “나라의 도움을 받아도 가난의 굴레는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A씨는 “자격증 준비할 시간도 없이 매장 매출 압박만 받고 있다. ‘자활’은 없고 ‘사업’만 있다”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기초수급 2030들의 탈(脫) 빈곤 이야기

내일키움통장 설명 이미지. 사진 하나은행 홈페이지 캡처

내일키움통장 설명 이미지. 사진 하나은행 홈페이지 캡처

저소득층의 자립·자활을 돕는 자활근로사업에서 2030 대상자들의 ‘자활’ 성공률이 낮은 것으로 나타나 제도 보완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11일 한국자활복지개발원에 따르면 최근 5년간 ‘내일키움통장’ 2030 가입자는 3044명이었던 반면, 지원 조건을 채워 만기 해지한 청년은 514명으로 파악됐다. 통장 가입자 약 16%만이 자립할 수 있는 목돈 마련에 성공한 셈이다.

내일키움통장은 자활근로사업단에 한 달 이상 참여하는 수급권자 또는 차상위 계층이 매월 일정 금액을 적립하면 정부가 최대 45만원까지 지원해주는 제도다. 3년 만기를 채우면 2000만~2300만원에 이르는 자산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중앙일보가 만난 2030 자활근로사업자들은 “중간 이탈 유혹을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제도”라고 입을 모았다.

서울 한 자활센터에서 1년째 일하고 있는 30대 이모씨는 ‘청년자립도전사업단’ 소속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자립’에 대한 의구심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나’를 위한 자활이 아니라 사업단 잇속을 챙겨주는 부품이 된 듯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어서다. 이씨는 “한 달에 한 번 근로자 상담이 있는데 미래 대비에 관한 내용이 아니라 사업단(카페) 매출 이야기만 한다”며 “여기가 자활센터인지 프랜차이즈 센터인지 모르겠다”고 불만을 나타냈다.

“미래 위한 일 하고 싶다”

지난달 10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 일자리 정보 게시판의 모습. 연합뉴스

지난달 10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고용복지플러스센터 일자리 정보 게시판의 모습. 연합뉴스

서울 내 한 자활사업단의 사업단 목록을 살펴보면 자활기업으로는 편의점·카페 등이 참여하고 있다. 카드·양곡 배송이나 무료 이불세탁 등 단순 노동도 많다. 다른 자활사업단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청소대행·학교건물청소·소독방역 등이 주 업무다. “저소득층 청년들이 미래를 위해 투자할 만한 분야와 거리가 멀다”는 볼멘소리가 현장에서 나오는 이유다. 한 자활센터 관계자는 “청년 자립을 위한 맞춤형 기술을 배우기 힘든 환경이 맞다”고 말했다.

서울 한 자활센터에서 일하는 강모(21)씨는 ‘취업 성공패키지’를 통해 웹디자인 교육을 넉 달 받았다. 정작 자활센터에서 배치받은 업무는 카페 일이었다고 한다. 운영 사업의 선택 폭이 편의점·카페 등으로 한정돼있어서다. “저는 애니메이션 관련 적성을 살리고 싶었는데 카페에서 일하라는 거에요. QR 체크나 하다가 2주 만에 그만뒀어요.”

서울 한 자활센터근무자 박모(23)씨는 편의점 사업에 참여하고 있다. 고등학교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그의 장래희망은 편의점 직원이 아니었다. 박씨는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 위축이 되기도 하고 가끔은 ‘현타(현실 자각타임 줄임말)’가 온다고 한다. 박씨는 “번듯한 회사에 다니면서 ‘힘들다’고 불평하는 친구들을 보면 ‘나도 그런 일을 해보고 싶은데’라는 부러운 마음이 든다”며 “‘이 나이에 이러고 있으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도 한다”고 말했다.

“실효성 있는 대책 필요”

관련 실무자들은 2030 차상위계층의 ‘빈곤 탈출’을 위한 실효성 있는 대책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종수 서울 송파지역자활센터 실장은 “기술도, 자본도 없는 청년들이 사회에 나가봤자 자활 이전의 삶과 달라진 게 없을 것”이라며 “자활을 통해 당장 수급자 조건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수급 해지 유예기간을 두는 등 ‘탈(脫) 수급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활보다는 ‘수급 유지’가 목적인 청년도 문제로 지목된다. 내일키움통장 해지 조건에는 탈 수급 등이 포함된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아니라면 의료급여·주거급여 등 여러 지원을 받지 못한다. 한 자활센터 관계자는 “희망을 가지고 시작했던 청년들이 각종 지원이 끊기는 탈 수급에 일단 두려움을 느낀다”고 전했다. 한국자활복지개발원 경영기획부 송현정 차장은 “현재 자활근로사업 참가 자격은 근로 의지와 상관없이 ‘조건부 수급자(기초수급자 가장 하위단계)’에게 가장 먼저 주어지고 있다”며 “근로 의욕과 자립 의지가 있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더 많이 열어주는 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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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수급자·차상위계층=소득과 재산(소득인정액)이 기준중위소득의 30~50%에 못 미치는 빈곤층. 생계·의료·주거·교육급여가 나오며 소득인정액이 30%(1인가구 54만8349원) 이하이면 넷 다 나오고 소득인정액이 올라갈수록 급여 종류가 계단식으로 줄어든다. 수급자 바로 위 저소득층이 차상위계층이다. 네 가지 급여는 없고 자활에 참여할 수 있다.

◇자활사업=수급자나 차상위계층의 자립을 돕기 위해 근로 기회를 제공하고, 기능습득 지원과 취창업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창업 지원이나 자산형성 지원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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