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판석, 신원호, 봉준호..이들의 선의에만 기댈 수는 없다

권순택 2021. 12. 10.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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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왕국의 어두운 그림자⑦] 'K드라마'의 성공을 견인한 건 시청자 몫이 9할

[권순택 기자]

[수정 : 2021년 12월 13일 오전 11시 45분]

"16부 쪽대본 받아 찍고 있다고, 내 배우가!"

SBS 드라마 <온에어>의 대사 중 하나다. 드라마 제작 시스템을 그대로 보여줘 호평받았던 드라마. 2008년도에 방영됐으니 지금은 달라졌겠지 싶겠지만, "글쎄요"다. 물론, '쪽대본'은 많이 사라졌다는 얘기가 들리긴 한다. 그러나 드라마 <온에어>에서조차도 주목받지 못했던 영역이 있다.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일하는 스태프들의 열악한 노동환경은 참으로 여전하다.

개선이 전혀 없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근로기준법 상 노동 특례에서 '방송업'이 제외되면서 이제는 주 12시간을 초과하는 연장근로가 불가능해졌다. 지난 7월 1일부터 사실상 드라마 제작 현장은 주 52시간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법이 바뀌니 현장도 조금은 달라졌다. 적어도 주 140시간 노동했다는 말들은 나오지 않게 됐으니 말이다. 그러나 본질적인 문제는 남아있다. 노동 및 휴게 시간, 임금 등 기본적인 내용이 들어가게 되는 '근로계약서' 미작성은 드라마 스태프들에게는 여전히 뼈아픈 부분이다. 

KBS 드라마 고발, '공영방송'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드라마 스태프들이 고발한 KBS 방영 예정 드라마. <국가대표 와이프>, <꽃피면 달 생각하고>, <신사와 아가씨>, <연모>, <태종 이방원>, <학교2021> 포스터
ⓒ KBS
KBS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라도 해도 다를 게 없다. 지난 9월, 복수의 드라마 스태프들이 공영방송 KBS와 드라마 제작사 몬스터유니온 등을 고용노동부에 고발했다. KBS에서 방영 예정이던 드라마 <국가대표 와이프>, <꽃피면 달 생각하고>, <신사와 아가씨>, <연모>, <태종 이방원>, <학교2021> 등이 근로계약서 미작성 등 근로기준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지난 10월 KBS시청자위원회 회의에서 관련 질의가 있었다. 진선미 시청자위원은 "드라마 스태프들의 노동자성이 확인된 뒤에도 현장에서는 지속해서 노동법을 위반하고 있다"라며 "스태프들의 요구는 KBS가 제작하고 방송하는 드라마 현장 모든 스태프의 근로계약을 체결하거나 지침을 내릴 것, 근로기준법에 따른 노동시간 준수와 실질임금 보장, 연장근무 측정, 주휴와 연차수당 보장, 계약 기간 특정, 임금 지급 시기 특정, 제작사 일방 계약 해지 금지 등 기본적인 노동인권 사항"이라고 꼬집었다.

그러자 KBS 이건준 드라마센터장은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드라마 편성시스템을 개선해 조기 라인업이 가능하게 했다"라면서 "조기에 대본을 마련하고, 촬영 일수를 늘리며, 촬영팀을 2팀 체제로 운영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통해 쪽대본, 밤샘 촬영 등의 관행을 근절시켰다"라고 답했다. 이어, "외주제작사와의 협력을 통해 모든 스태프가 문체부가 제시한 표준계약서를 체결하도록 지속해서 관리하고 있다"라고 덧붙였다.

'쪽대본'이 사라졌다는 건 분명 좋은 일이다. 그러나 분명히 해둘 게 있다.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위법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라는 주문에 'KBS 드라마 제작환경이 개선되고 있다'라는 말은 그 자체로 동문서답이라는 점이다.

KBS에서 방영 예정인 드라마 제작 현장만을 콕 짚어 고발한 것을 두고도 말이 나온다. KBS 한 관계자는 '왜 KBS만 가지고 그러냐'라고 항변했다. 아주 빤한 답일지 모르겠으나, KBS는 수신료를 받아 운영하는 공영방송이기 때문에 타 방송사들보다 공적 책임이 더 크다. 그런데,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다.

KBS 드라마 제작 현장이 가장 열악하다는 스태프들의 증언 때문이기도 하다. '주 52시간제'를 지키기 위해서 드라마 제작비 상승은 일정부분 감수해야 한다. 타 방송사들은 이를 고려해 제작사 측에 추가 제작비 지원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KBS만이 제작비 상승분에 눈을 감았다는 게 그 증언의 핵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KBS 드라마 제작 현장에서 일하는 스태프들은 더 열악한 환경에서 일할 수밖에 없다는 진술이었다. KBS 드라마에서 이 같은 일이 벌어진 것 자체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K드라마 성공 뒤에는 시청자들의 깐깐함이 있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게임>과 <지옥> 포스터
ⓒ 넷플릭스
드라마 제작 현장은 여전히 '열악'함에도 한국 드라마는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넷플릭스 <킹덤>을 시작으로 <오징어게임>, <마이네임>, <지옥>이 큰 인기를 끌었다. 'K드라마'는 이제 하나의 문화현상처럼 분석되기도 한다. 이 같은 한국 드라마의 인기 요인은 다양한데, 탄탄한 대본과 몰입감 높은 연출, 뛰어난 배우들의 연기력은 빠지지 않고 거론된다. 그런 '웰메이드' 드라마를 견인한 이들이 있다. 바로 깐깐한 시청자들이다.

한국 드라마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시청자'의 역할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배우들의 '발연기'는 시청자들에게 곧바로 지적받는 대상 중 하나다. 산만한 연출은 즉시 외면받는다. 개연성이 떨어지는 드라마는 '막장'이라는 꼬리표가 붙지 않던가. 시청자들의 이 같은 평가는 톱스타, 거물급 배우와 감독, 작가라고 해도 비껴갈 수 없다.

시청자들의 깐깐함은 한국 드라마의 많은 것들을 바꿔 놓았다. 최근 드라마가 끝나고 올라가는 타이틀롤에는 '자문'이라는 게 뜬다. 법 혹은 의학, 수사 등 장르물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대본에서부터 연기까지 리얼리티를 살리는 조치다.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의 5명의 배우도 자신이 맡은 배역에 따라 전공의들이 배정돼 그들로부터 사소한 습관들까지 캐치해가며 연기를 했다고 하지 않던가.

CG는 또 어떤가. KBS 드라마 <꽃보다남자> 수영장에 떠 있던 허술한 오리 CG는 지금도 '안타까운' 장면으로 거론된다. tvN 드라마 <화유기> 또한 이승기의 복귀작이라는 점에서 주목받았지만, 1회 방영 후 화제가 된 건 엉성한 CG였다. 역사물에 있어서 이제 '고증'은 필수가 돼 버렸다.

시청자들의 꾸준한 지적에도 바뀌지 않는 부분도 있다. PPL이 그것이다. 최근 가장 논란이 된 PPL은 tvN 드라마 <지리산>에 나오는 에그드랍이었다.  SBS 드라마 <용팔이>는 '직방' 어플 PPL로 인해 "방팔이"라는 비난받기도 했다. 넷플릭스 등 OTT를 통해 광고 없는 콘텐츠를 접해본 K시청자들의 불만은 더욱 거세질 것이다. 시청자들이 한국 드라마를 또 어떻게 변화시켜낼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더 이상 감독의 재량이나 선의에 맡길 문제가 아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1 대본 리딩 현장의 모습
ⓒ tvN
무엇보다 드라마의 '완성도'를 중시하는 시청자들이 있다. 그런 시청자들이 더 관심 가져줬으면 하는 곳이 있다. 드라마 제작 현장이 그곳이다. 창의노동의 핵심적인 요인은 현장 분위기이다.

드라마 제작 현장 분위기는 드라마의 완성도에 영향을 미친다.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촬영 현장은 여느 드라마보다 훈훈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배우 손예진과 정해인은 "인권이 있는 드라마 현장", "휴식을 취하면서 미니시리즈를 찍을 수 있다는 걸 처음 경험했다"라고 표현했다.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은 어떤가. 제작진은 시즌1이 끝나고 시즌2가 방영되는 기간 유튜브 <채널십오야>를 통해 이른바 '하드털이'를 감행했다. 배우들의 오디션 현장, NG장면, 배우들의 악기 학습 영상, 배우들의 여러 연기 버전 등을 엿볼 기회였다. 그 영상들을 보며 흥미로웠던 건, 스태프들의 웃음소리였다. TV를 통해 시청자들에게 좋은 영상을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 조명, 마이크 담당 스태프들이 고난도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장면도 담겨 있었다. 그런 스태프들을 배우들이 응원하기도 한다. 과연, 52시간 노동이 적용되는 현장이 아니었다면 가능했던 장면이었을까?

안타까운 점은 그것이다.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연출을 맡은 안판석 감독이 노동인권을 중시했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연출을 맡은 신원호 감독이 "주어진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우리 뇌가 만들어내는 것도 바뀌지 않을 것"이라며 "여러 제작환경을 고려했을 때 주 2회 드라마가 계속 제작될 수 있을까 싶다"라고 '주 1회 편성'을 과감하게 결정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아동 연기자가 무더운 날 촬영을 하지 않아도 됐던 이유 또한 같다. 봉준호 감독의 결단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언제까지 감독의 재량이나 선의에 기댈 수는 없다는 점이다. 드라마 스태프들이 KBS를 고발하고 나선 이유다.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을 해왔다. 방송사와 제작사에 꾸준히 호소했다. 그리고 국회와 정부를 찾아가 봤다. 그러나 여전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럴 때 시청자들이 스태프들에게 손을 내밀어주면 어떨까. 당신들의 그 깐깐함으로 한국 드라마가 제작되는 현장을 봐달라. 그리고 'K드라마'라고 하면 "웃음이 가득한 현장"이 떠오르도록, 그것이 진정한 'K드라마' 원천이 되도록 만들어 달라. 

[바로잡습니다] 애초 기사 중 tvN <지리산>에서 PPL로 사용된 식음료 브랜드는 서브웨이가 아니라 에그드랍입니다. 서브웨이로 잘못 표시된 점 독자 여러분과 서브웨이 측에 사과드립니다.
 
 KBS 드라마 근로기준법 위반 처벌 촉구 기자회견
ⓒ 희망연대노동조합 방송스태프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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