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마다 제각각’ 한국식 고무줄 나이

김태훈 기자
심리 치유 프로그램에 참가한 청소년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 경향신문 자료사진

심리 치유 프로그램에 참가한 청소년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 없음) / 경향신문 자료사진

지난 11월 25일 대법원은 성인용품으로 쓰이는 인형의 수입을 제한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해당 인형의 외양이 16세 미만 미성년 여성의 모습을 닮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리얼돌’이란 이름이 통용되고 있는 이 성인용 인형은 실제 사람과 흡사하게 생겨 전부터 수입·유통을 허용할지를 두고 논쟁을 불러왔다. 당초 리얼돌 수입업자가 인천세관을 상대로 낸 이 수입 통관 보류처분 취소소송이 2심인 상고심까지 왔을 때는 서울고법이 업자의 손을 들어줬다. 때문에 원심을 깨고 사건을 환송한 이번 대법원 판결은 더욱 주목을 받았다.

논쟁은 실제 사람이 아닌 인형의 외모만 보고 ‘16세’ 이상인지 미만인지, 더 나아가 인형을 성인용품으로 사고파는 게 괜찮은지를 따지는 쪽으로 불이 붙었다. 하지만 ‘리얼돌’ 수입과 유통 여부를 따지는 논쟁과는 별개로, 이번 판결은 법으로도 판가름내기 어려운 또 하나의 애매한 경계지점을 부각시켰다. 미성년자와 청소년, 아동, 어린이 등 일부 구분되지만 혼용되는 연령 및 연령대별 지칭에 대한 용어 정의가 개별 법마다 제각각이어서 혼란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일단 해당 대법원 판결에서 16세를 기준으로 든 것은 형법 제305조 제2항에 명시된 이른바 ‘미성년자 의제강간죄’ 때문이다. 형법 제305조 제1항이 13세 미만인 사람에 대해 간음 또는 추행을 하면 처벌받는다고 한 데 더해, 제2항에선 13세 이상 16세 미만에 대해서도 똑같이 법적으로 보호한다고 밝힌 것이다. 단 제2항에서는 처벌하는 대상을 19세 이상의 성인으로 한정했다. 예컨대 15세와 18세 청소년 사이의 자발적인 동의에 따른 성관계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법률용어조차 서로 다른 기준

종전까지는 13세 미만에 대해서만 적용되던 ‘의제강간’의 기준 연령이 16세로 높아진 것은 2019년부터 드러난 ‘n번방 성착취물 제작·유포 사건’ 때문이었다. 미성년자의 성적 권리를 보다 폭넓게 보호하기 위해 지난해 5월부터 16세로 상향 개정된 보호연령 기준이 공포됐다. 여기까지만 봐선 혼동될 여지가 크진 않다. 민법상 성년 기준인 19세에 미달하는 미성년자 중 특히 16세 미만인 사람들을 더욱 강하게 보호하겠다는 취지로 보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형법을 벗어나면 나타난다. 얼핏 보면 비슷해 보이는 연령대를 각기 다른 개별 법에서 서로 다르게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대표적으로 ‘고무줄 기준’이 적용되는 연령대 용어가 바로 ‘청소년’이다. 청소년기본법 제3조에서는 청소년을 9세 이상 24세 이하로 규정하고 있지만 청소년보호법 제2조는 19세 미만까지를 청소년으로 부른다. 게다가 청소년보호법은 아예 연령을 산정하는 기준마저 다르게 잡고 있다. 일반적으로 법에서는 ‘만 나이’를 쓰지만 청소년보호법은 이른바 ‘연(年) 나이’에 가깝게 매년 1월 1일이 되면 그해 만 19세를 맞는 모두를 19세 이상으로 보고 청소년에서 제외시킨다. 가령 2002년생은 청소년보호법에 따르면 올해 1월 1일부터 더 이상 청소년이 아니지만 청소년기본법에서는 아직도 향후 5년 이상 청소년으로 남게 된다.

소관부처가 같아도 담당하는 과가 다르면 해당 연령대를 정의하는 기준이 달라지기도 한다.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에서는 19세 미만을 ‘아동·청소년’으로 정하고 있지만 한부모가족지원법은 병역의무를 이행하고 취학 중인 경우 24세라도 ‘아동’으로 포함시킬 수 있다고 명시했다. 통상적으로 청소년이 아동보다 더 높은 연령대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지만 이 두 법에서는 기준이 역전된 셈이다. 두 법의 소관부처는 같은 여성가족부다.

지난 11월 국회입법조사처에서 나온 두건의 보고서는 국내 여러 법에서 생애주기 중 연령대를 구분해 부르는 용어를 통일하지 않아 정책 시행 과정과 일상생활에서 모두 혼선을 빚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다뤘다. 박선권 사회문화조사실 입법조사관이 쓴 ‘아동 등 생애주기 단계별 정책대상 연령정의의 문제점과 개선방향’ 보고서를 보면 영유아와 유아, 어린이, 아이 등 가장 어린 연령대부터 이들을 지칭하는 법률용어가 통일되지 않고 있다. 박 입법조사관은 15개 부처 38개 법령 및 행정규칙에서 규정하고 있는 12개 법률용어를 분석한 결과, 한 용어를 쓰면서 그 연령대를 정의하는 기준이 다르거나, 반대로 연령 기준은 같은데 용어가 제각각 혼재된 양상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노인’ 기준도 달라 혼란

이렇게 법률용어조차 서로 다른 기준을 혼용하는 일이 만연해진 데는 어쩔 수 없는 현실적 요인도 작용했다. 독일처럼 법전체계를 구성할 경우엔 용어 불일치가 일어날 일이 적지만 한국에선 개별법체계를 갖췄기 때문에 용어가 서로 달라지는 일도 불가피하다. 또 각 소관부처마다 개별 법령에서 정책대상의 특성을 감안해 기준을 손볼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박 입법조사관은 “이와 같은 용어와 연령 정의 간의 중복과 혼란은 우선 정부와 국회의 법령과 행정규칙이 개별 입법의 방식으로 이뤄진 데서 기인한다”면서도 “용어의 정의를 기술하는 준칙이 미비하고, 성년 연령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성화되지 못한 점도 작용했다”고 지적했다.

‘노인’의 기준 역시 법마다 제각각인 점은 비슷하다. 아동·청소년기를 지칭하는 용어들은 서로 다른 명칭을 쓰고 있어 문제라면, 노년기를 가리킬 때는 용어는 같지만 기준 연령이 법마다 다른 점이 더 문제다. 김은표 입법조사관이 쓴 ‘노인 연령 기준의 현황과 쟁점’에서도 노년층 역시 연령대에 대한 정의가 통일되지 않은 모습이 고령화 흐름과 맞물려 문제를 보이고 있음을 지적한다. 만 60세는 농지연금을 받을 때는 노인이지만 국민연금과 기초연금은 아직 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받지 못한다. 일단 은퇴를 맞는 정년은 60세지만 이후 국민연금·기초연금을 받을 수 있는 수급 개시 연령 65세까지는 5년간 소득공백 기간이 생긴다. 도시철도 등의 대중교통수단을 무임으로 이용할 수 있는 연령도 65세부터다. 주택연금에서의 기준은 55세로 또 다르다. 자신의 나이가 해당 연령대에 걸쳐 있는 국민 입장에선 자신이 대상에 들어가는지 아닌지를 쉽게 알지 못해 혼란스럽다.

이와 같은 지적은 여러 국책연구기관에서도 나왔지만 현재까진 논의가 진척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일단 연령기준부터 정확하게 출생 후 달력상 경과한 연령을 의미하는 ‘역연령(曆年齡)’을 써야 한다는 전제조차 부분적으로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김기헌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이 쓴 ‘아동·청소년 연령 기준의 문제점과 과제‘에선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대책이 제시되어 있다. 김 연구위원은 “이러한 상황은 다른 나라에서도 종종 발견되는 현상이지만, 우리나라에선 정책대상에 대한 연령 정의의 불일치가 매우 심하다는 점에서 논의가 지속적으로 이뤄져 왔다”며 “법률을 개정해 일관된 용어를 사용하는 건 시일이 걸리겠지만 역연령을 통해 파악한 시점으로 아동과 청소년을 법적으로 정의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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