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g 건우의 기적.. 숫자 뒤집으면 '팔팔이'라 용기 얻었다

남정미 기자 2021. 11. 27.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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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남정미 기자의 정말]
국내 가장 작은 아기 '조건우' 살린
서울 아산병원 신생아과 김애란 교수
지난 10월 5일 건우가 퇴원하고 처음으로 김애란 교수와 다시 만났다. 대기실에서 낯가림으로 맹렬하게 울던 건우는 신기하게도 김 교수가 진료를 보자 울음을 뚝 그쳤다. 건우의 엄마·아빠(맨 오른쪽)는 “우리 아이 살린 것 보고 다른 사람들도 포기하지 않고 (병원에) 많이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조건우는 국내에서 가장 작은 아이로 태어났지만, 생에 대한 의지를 자로 잴 수 있다면 아마 가장 큰 아이에 해당할 것이다.

건우는 지난 4월 4일 서울 아산병원에서 체중 288g, 키 23.5㎝로 예정일보다 15주나 앞선 24주 6일에 태어났다. 약 6개월만에 태어난 것이다. 어른 손바닥만 한 초극소 저체중 미숙아로, 아직 폐도 완전히 생성되지 않아 스스로 호흡하는 게 불가능한 상태. 태어나자마자 집이 아닌 신생아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그러나 1% 도 안 되는 생존 확률에 도전해, 싸워 이긴 아이가 건우이기도 하다. 코로나19로 부모와 떨어져 치료를 받으면서도, 생후 80일에 인공호흡기를 떼고 자가 호흡을 시작했으며, 생후 4개월 중반에는 몸무게가 2㎏을 돌파해 인큐베이터를 벗어났다. 지난 9월 초순엔 신생아 집중 치료를 받은 지 153일 만에 건강하게 퇴원했다. 건우는 국내에서 보고된 초미숙아 생존 사례 중 가장 작은 아기이자, 전 세계에서 32번째로 작은 아이로(미국 아이오와대학교 운영 초미숙아 사이트 기준) 기록됐다.

태어난 지 4일째 된 건우가 인큐베이터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모습. /서울 아산병원

이 용감한 사투(死鬪)에 건우와 동행한 사람이 주치의인 울산의대 서울 아산병원 신생아과 김애란(64) 교수다. 1996년 아산병원에 부임해, 내년이면 정년이 되는 국내 신생아학 분야의 권위자다.

지난 10월 초, 김 교수와 건우가 퇴원한 지 한 달 만에 다시 만났다. 이날은 건우의 첫 정기검진 날. 건우는 어느새 몸무게 2.7㎏을 돌파했고, 키는 44.3㎝로 훌쩍 커 있었다. 기저귀 역시 이른둥이용 1단계를 졸업하고 2단계를 쓴다. 김 교수가 “몸의 크기가 작다뿐이지 아이는 건강하게 잘 크고 있다”며 “건우가 아주 예뻐졌다”고 활짝 웃었다. 한창 낯을 가리느라 줄곧 앙앙거리며 울던 건우가 김 교수를 보고는 신기하게도 울음을 뚝 그쳤다. 병원에 있는 153일 동안 하루도 빼놓지 않고 자신을 돌봤던 그 얼굴임을 건우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 아산병원은 1996년 국내 최초로 신생아과를 전문 분과로 독립해 운영하고 있다. 미숙아의 경우 작은 주삿바늘을 사용하더라도 그 길이가 아기의 팔뚝 길이와 비슷해 삽입이 쉽지 않고, 단 몇 방울의 채혈만으로도 빈혈이 발생할 수 있다. 그만큼 의료진의 숙련된 노하우가 중요해, 아산병원에는 작은 천사들을 살리기 위한 발걸음이 전국에서 이어진다.

매일 또 다른 건우를 살리기 위해 어린이병원을 종종거리며 뛰어다니는 김 교수를, 서울 아산병원에서 두 차례에 걸쳐 만났다.

◇24시간 곁 지키며, 멸균 모유로 키웠다

–건우의 생존 확률이 1% 미만이었다고.

“건우를 처음 봤을 때 두 가지 면에서 용기를 얻었다. 첫 번째는 체중을 재니까 288g이었다. 거꾸로 하니 882다. 이 숫자를 소리 나는 대로 읽으니 날 듯이 활발하고 생기가 있다는 뜻의 ‘팔팔이’가 되더라(웃음). 또 하나는 건우가 태어난 날이 부활절(4월 4일)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뜻이 있다고 믿었다.”

김 교수를 비롯한 아산병원 의료진은 실제 치료하는 내내 건우를 ‘팔팔이’라고 불렀다. 전공의와 전임의는 24시간 건우 곁을 지켰고, 간호팀은 매일 건우가 먹을 모유를 안전하게 멸균 처리해 먹였다.

–건우 부모님이 일주일에 2번, 10시간을 왕복하며 모유를 날랐다고 들었다.

“건우가 살았던 이유 중 하나에는 분명히 모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특히 이렇게 작은 아기를 키울 때는 모유가 필수다.”

지난 9월 서울 아산병원에서 건우의 퇴원을 앞두고 건우와 부모, 주치의인 김애란(가운데) 교수가 사진을 찍었다. /서울 아산병원

건우는 경남 함안에 사는 조필제(39)·이서은(38)씨 부부가 결혼 6년 만에 가진 첫 아기다. 엄마 키 174㎝, 아빠 키 191㎝로 장신(長身)인 부부에게서 얼마나 큰 아이가 태어날지 주변의 기대와 축복이 쏟아졌다. 그러던 중 임신 17주 차에 태아가 자궁 내에서 잘 자라지 않는 ‘자궁 내 성장 지연’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다니던 산부인과를 포함해 인근 대도시 대학병원 2곳을 방문했지만 태아가 살 가망이 없다고 했다. 이대로 아이를 포기할 수 없어 부부가 마지막으로 달려온 곳이 서울 아산병원이다. 이씨는 아산병원 고위험 산모 집중관찰실에 입원해 태아 폐 성숙을 위한 스테로이드와 뇌 발달에 도움이 되는 황산마그네슘을 투여받다가, 응급 제왕절개로 건우를 출산했다.

출산 이후 부부는 코로나로 아이를 볼 수 없었지만, 매일 모유를 짜서 얼린 다음 일주일에 2번 경남 함안에서 서울까지 이를 배달했다. 회사원인 건우 아버지는 3개월 육아휴직을 했다. 유축기로 모유를 짜느라 건우 엄마 가슴엔 피멍이 들었다. 행여 코로나 바이러스에 노출될까, 새벽 3시에 출발해 서울로 오는 5시간 동안 휴게소도 한번 들르지 않았다. 그래도 내 자식 밥 먹이는 일이라 힘들다는 생각 안 들었단다. 너무 좋아서, 산후우울증 올 틈도 없었다. 이씨는 “이렇게 건강하고 씩씩한 아이를 포기했으면 어쩔 뻔했나, 아찔하다”며 “귀하게 살려주신 아이니 정말 잘 키울 것”이라고 했다.

–미숙아의 경우 모유를 먹이고 싶어도 ‘거대 세포 바이러스’ 때문에 먹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거대 세포 바이러스는 포진 바이러스의 일종으로, 모유 수유를 통해 출생 후 신생아에게 감염을 가져올 수 있으며, 특히 미숙아일수록 증상 발생의 위험이 크고 심한 감염을 일으킨다.)

“사실 건우 어머니 모유에서도 거대 세포 바이러스가 높게 나와서, 그걸 특수 처리해서 먹였다. 내 개인적인 관심이 거대 세포 바이러스다. 미숙아들에게 모유를 먹이긴 해야겠는데, 바이러스가 높게 나와 먹이질 못하니까. 고열에 잠깐 노출하는 식으로 특수 처리를 했더니 아이에게 먹여도 바이러스에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다들 바쁜데 누가 이걸 특수 처리해주겠느냐는 것이다. 다행히 나와 같이 연구했던 간호사님이 도와주시기로 해서, 특수 처리한 모유를 건우에게 먹일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먹일 만큼 모유가 아기에게 좋다. 미숙아를 출산한 부모들도 겁내지 말고, 담당 의사의 지침에 따라 모유 먹이기를 권한다.”

–건우가 퇴원할 때 건우를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경험을 하게 해준 작은 선생님’이라고 표현하셨더라.

“책에 나오지 않는 것들을 환자들이 얘기한다. 그걸 알아듣는 게 의사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건우는 너무나 좋은 선생님이었다. 책에서 읽은 걸 재발견하게 해주고, 책에 나오지 않은 문제점들을 찾게 하고, 남들은 어떻게 했나 수많은 문헌을 뒤져보도록 인도해주는 선생님.”

–건우의 지금 상태는 어떤가.

“열심히 잘 크고 있다. 지난 4일에 마지막으로 외래를 봤는데, 이제 눈도 잘 맞추고 옹알이도 한다. 몸무게도 3.3㎏을 돌파했다. 건우 부모님은 다른 아이에 비해 많이 안 커서 조바심이 날 수도 있겠지만, 너무 욕심 내지 말고 ‘거북이 걸음’으로 걸어가자고 말했다. 어느 순간 아이가 너무 뚱뚱해서 고민일 때가 올 것이다, 하하!”

최근 3.3kg을 돌파한 건우의 모습. 눈도 잘 마주치고 옹알이도 시작했다고 한다. /이서은씨 제공

◇말 못하는 아기에 대한 애정이 나를 이끌었다

김 교수는 연세대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의대에서 소아과 전공의를, 같은 대학에서 신생아 전임의를 했다. 이후 1996년 서울 아산병원 신생아과에 부임했다. 신생아 중에서도 임신 37주 미만 또는 출생 시 체중 2.5㎏ 미만의 신생아를 뜻하는 미숙아 치료에 전념하고 있다.

–신생아학이라는 게 아직 낯설다. 어떻게 이 분야를 선택하셨나.

“말 못하는 아기들에 대한 애정이 나를 이 길로 이끌었다. 언어라는 것이, 사람과 사람의 소통이라는 게, 비단 말로만 하는 건 아니더라. 진찰하다 보면 아기들은 말은 못하지만 손짓·발짓·눈빛으로 말한다. 아기들에게서 무언(無言)의 무언가가 느껴졌다. 태어나서 생후 4주까지를 신생아라고 하는데, 인간의 생애에서 굉장히 특수한 시기다. 체내의 생리적 현상이나 정상 수치에 대한 기준 등이 완전히 다르다. 전혀 다른 구간에 사는 인간이랄까. 이런 특수성에 대해 학문적 매력도 느꼈다.”

–1990년대만 해도 신생아과 의료진이 맞닥뜨리는 최대의 난관이 일찌감치 아기를 포기하는 보호자를 설득하는 문제였다고 한다.

“내가 처음 아산병원에 왔을 때만 해도, 32주에 태어난 아이를 보호자가 포기하고 간 일도 있었다. 지금은 32주면 웬만하면 아주 잘 자란다. 당시엔 미숙아도 잘 키울 수 있다는 인식이 부족했고, 경제적인 어려움도 많았다. 신생아학이 발전함에 따라서 이른둥이들도 잘 살 수 있다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많이 퍼졌고, 또 저출산 현상과 맞물리면서 정부에서도 관심을 가져 신생아 중환자실 비용 등이 엄청나게 경감됐다.” 지금은 미숙아 출생 시 보건복지부에서 체중별 최고 1000만원까지 지원되며, 선천성 이상아의 경우 본인 부담금 100만원 미만의 경우는 전액, 100만원 초과하는 경우는 본인부담금 중 100만원을 제외한 금액에 대해 80% 추가지원이 이뤄진다.

–반면 만혼으로 인한 난임, 고위험 산모 등으로 미숙아나 중증 질환 신생아는 더 많아졌을 것 같다.

“산모가 고령화가 되면서 미숙아 출산이 많아지고 조금 덜 건강한 아기들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인간은 다 때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기를 낳는 때와, 키우는 때. 아이의 건강 측면에서는 임신부의 나이가 젊을수록 더 건강하다. 의사 입장에서만 이야기하자면, 어차피 아이를 낳을 생각이라면 젊을 때 건강하게 낳는 게 좋겠다.”

–신생아 중환자실을 거쳐 간 아이들이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까지 진료를 보신다고.

“다른 선생님보다 길게 끄는 편이다. 보고 싶고, 궁금해서 1년에 한 번은 꼭 오라고 한다. (신생아과 진료) 졸업하는 만 6세들에게는 내가 꼭 하는 말이 있다. 나중에 청첩장 보내라고(웃음). 내가 살아있을지 모르겠지만, 걸어 다닐 수만 있으면 너희 결혼식 꼭 가겠다고. 이제 국내 신생아 중환자실은 수준이 많이 높아져서 아이들이 살 수는 있다. 이제는 그냥 사는 게 아니라 잘 살아야 한다. 나의 개인적인 최종 목표는 아주 미숙하게 나온 애들이 다 커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1996년부터 진료를 보셨으니, 이제 성인이 된 아이들도 있겠다.

“얼마 전 외래로 고3 학생이 엄마와 함께 찾아왔더라. 내 진료를 받았던 미숙아였는데, 의과대학에 가서 의사를 하고 싶다고 하더라. 너무 기뻤다. 어떤 아버님은 나를 가족 온라인 커뮤니티에 초대해주셔서, 그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사진을 계속 볼 수 있게 해주셨다. 요즘 보니 걔가 엄청 어려운 수학 문제도 막 풀더라. 내가 이런 재미에 일한다, 하하!”

–반대로 가장 힘들 때는 언제인가.

“말 안 듣는 보호자가 있을 때 가장 속상하다. 기형아라서 치료를 안 받는다고 하는 보호자도 있다. 보호자들에게 이 얘기는 꼭 한다. 나중 일은 모르겠지만, 아이가 지금 이 세상에 있을 때는 최선을 다하는 게 맞겠다고.”

–그래도 보호자가 주장을 꺾지 않으면 어떡하나.

“생명에 관한 문제이니 윤리위원회도 소집되고, 법무팀도 나서지만 그래도 보호자가 치료를 안 받겠다고 하면 방법은 없다. 보호자 동의 없이 치료하다가 잘못되면 그 원망을 들을 자신도 없고…. 거기까지 수준 높은 의사는 아니다. 그게 고민이다, 아직도.”

–그만두고 싶을 때도 있으셨나.

“아니. 한 번도 여기서 후퇴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어렵다는 생각은 했다. 선택지를 많이 두지 않고, 뭐든 ‘이게 내 거다’라고 마음먹고 오래하는 편이다.”

김애란 교수는 자신이 치료한 환자 얘기를 할 때 가장 많이 웃었다. 그는 “얼마 전엔 건우 이전에 국내에서 가장 작았던 아기(302g) 사랑이가 그네 타는 영상을 봤다”며 “얼마나 야무지게 잘 움직이는지 너무 기특했다”고 했다.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아이들은 나의 ‘온리’이자 ‘올인’ 대상

김 교수는 주변 동료에게 ‘고지식하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의 원리원칙주의자에 워커홀릭(일중독)이다. 스스로도 “나는 비정상적인 사람”이라며 “아이들 치료에 거의 올인(all in)했고, 이게 나의 온리(only)”라며 웃었다. 내년 정년퇴임을 앞둔 국내 신생아학 분야 권위자이지만, 지금까지 언론 인터뷰는 한 차례도 한 적이 없다.

–인터뷰에 응한 이유가 따로 있으시다고.

“1.5㎏ 미만으로 태어난 이른둥이 부모님들이 신문을 보고 아이가 만 세 살 때까지는 태어난 병원으로 꼭 와주길 바라서다. 물론 일부는 아이가 좋아져서 안 오고, 일부는 인근 다른 병원에 다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학동기에 가서 수학 능력이 떨어진다거나, 부모가 지금은 예상하지 못한 다른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인지·운동·행동발달 등을 예방접종하듯 정기검진을 받아야 한다. 또 미숙아로 태어났지만 건강하게 지내는 아이에 대한 자료는 다른 미숙아를 치료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우리 병원에 오지 않고 다른 소아과에 다니는 아이들의 발달 사항에 대해선 우리가 알 수가 없다. 정부가 연구 목적에 한해 이 부분에서 융통성을 발휘해주면 좋겠다.”

–수많은 아이를 치료했지만, 정작 자신의 아이를 낳아 키운 경험은 없으시다던데.

“내 시간을 일에 완전히 할애한 셈이다. 만약 부모가 돼 봤다면, 훨씬 더 도움이 됐을 거라고는 생각한다. ‘소아과 의사는 자기 자식을 키워봐야 진짜 의사가 될 수 있다’는 우리끼리 얘기가 있다. 양육에 대한 정보를 주는 그런 면에선 아무래도 내가 부족할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돌보는 아이들은 99.99%가 태어나자마자 아프기 시작한 아이들이다. 내가 아이를 낳았다고 해도 미숙아나 아픈 아이를 낳았을지 그건 모르는 일이니까, 아픈 아이를 둔 부모들의 마음을 완벽히 알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도 아픔이라는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고 겪어야 하는 것이기에, 그런 면에선 충분히 환자 부모들과 함께 느끼고 공감한다고 생각한다.”

–이제 내년이면 정년퇴임인데, 아쉬운 점은 없으신지.

“많지, 왜 없겠나(웃음). 내가 좀 늦게 깨닫는 타입이라, 이제 조금 우리가 하는 일이 궤도에 오른 것 같은데···. 후배들에게 전수를 좀 더 잘할걸, 그런 생각도 들고. 펠로들을 만날 다그치기만 한 건 아닌지 후회도 된다. 또 우리가 해왔던 여러 가지 실적이 많은데, 논문화를 못 했다. 그게 좀 많이 아쉽다. 그렇지만 세월은 흘러가야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사실이다.”

–정년 이후 계획은?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세우지 못했지만, 머리가 잘 돌아갈 때까지는 환자를 보고 싶다. 개인적으로는,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퇴원했지만 가정에선 돌보기 어려운 그런 아이들을 봤으면 좋겠다. 일부 아이는 신체 기능이 다 정상이 아닌데도 지금 의료 환경에선 퇴원해야 한다. 가정이 깨질 정도로 힘든 경우도 있다. 아이가 인공호흡기를 끼고 있으면, 엄마는 무슨 일이 날까 봐 화장실도 못 간다. 노인만 해도 요양병원이나 요양보호사 등 관련 시스템이 잘돼 있는데, 어린아이들에 대한 시설은 거의 전무하다. 시립 아동병원 정도가 유일한데, 들어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신생아 중환자실에서 치료받고 퇴원했지만 여전히 남의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이 돌봄을 받을 수 있는 체계적인 운영 시스템이 필요하다.”

–제자들에게 ‘우리가 떠나보낸 아이들을 언젠가 하늘나라에서 만나게 됐을 때, 그 앞에서 진짜 떳떳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더라.

“건우를 만나기까지 몇 명의 작은 아가들을 먼저 보내야 했다. 의료 지식이 부족해서 보낸 아기들도 있고, 아예 나와서 못 사는 아기들도 있었다. 의료진의 한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했지만, 여기 이 세상에 남지 못 하는 경우가 생기면 아무래도 마음이 힘들다.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지만, 인간인 관계로 그런 마음이 든다. 그때 후배들을 위로하며 한 이야기였다.”

–한 생명을 살리는 것이 이렇게 힘든데, 신생아 유기나 학대 등 생명을 쉽게 저버리는 사람들을 볼 때 어떤 마음이 드시나.

“최선을 다했는데도 못하는 건 할 수 없지만, 그게 아닌 상황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버려진 아이도 상처받겠지만, 버린 사람도 온전하게 못 살 것이다. 그런 일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

김 교수에게 마지막으로 의사라면 누구나 받아 봤을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왜 의사가 됐나?” 정년을 앞둔 노교수는 평생 들었을 이 흔한 질문에 뜻밖에도 한참을 머뭇거렸다.

“예전 젊었을 때라면 ‘남을 도와주고 싶다’ 그런 얘기를 했겠지만, 지금은 함부로 얘기를 못 하겠다. 모를 때는 그런 답이 척척 나왔는데, 하하! 지금은 내가 정말 이 사람을 도와줄 수 있을지, 내가 할 일이 있을지 그 말의 무게를 아니까…. 그렇지만 다시 생각해도 여전히 답은 똑같다. 남을 도와주고 싶다는 것. 내게 달리 다른 답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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