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동에 폭력과 뇌물로 점철된 '도둑정치'가 어른거린다

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2021. 10. 16.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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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노정태의 시사哲]
넷플릭스 드라마 '나르코스'
도둑정치인 파멸시킨 국민

파블로 에스코바르. 가난한 집에 태어났지만 총명한 두뇌로 대학에 갔다. 그런데 대학을 중퇴하고 밀수업자가 되었다. 담배부터 온갖 것을 밀수하며 돈을 벌어 고향인 메데인의 경찰 중 절반을 매수했다. 그러던 중 마약 업계에 뛰어들었다. 메데인 지역의 조직을 규합해 이른바 ‘메데인 카르텔’을 결성하고 미국으로 코카인을 수출하면서 상상도 못 할 돈을 벌었다. 범죄자의 재산이니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지만 당시 기준으로 세계 10대 부호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80년대, 콜롬비아는 오랜 내전과 지독한 부패에 시달리고 있었다. 깊은 정글 속에는 공산주의 게릴라들이 진을 치고 ‘혁명’을 하겠다고 돌아다니며 ‘군자금’ 마련을 위해 납치와 강도 등 온갖 범죄를 일삼았다. 코카인이라는 새로운 마약에 홀딱 반해버린 미국인들은 밤이면 밤마다 파티를 벌이며 흰 가루를 흡입했고, 그 돈은 고스란히 메데인 카르텔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피카소와 달리의 작품을 구입하고 동물원을 만들어 코끼리와 하마를 키워도 남아도는 돈을 주체하지 못할 지경이었다.

일러스트=유현호

에스코바르는 그 막대한 재산 중 일부를 자신의 고향인 메데인 지역에 뿌려댔다. 주민들의 숙원 사업을 해결해주고 지역 축구단을 후원해 우승컵을 들어 올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얻은 인기에 힘입어 1982년 콜롬비아 하원 의원으로 선출됐다. 마약을 팔아서 번 돈으로 국회의원이 된 것이다. <오징어 게임>보다 몇 년 앞서 전 세계인을 열광시켰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나르코스>의 주인공, 파블로 에스코바르의 이야기다.

<오징어 게임>의 데스 게임만큼이나 황당한 소리다. 하지만 <오징어 게임>과 달리 <나르코스>는 실화에 기반한 작품이다. 밀수 트럭을 붙잡아 세운 경찰을 향해 에스코바르는 당당히 선포한다. “언젠가 나는 콜롬비아의 대통령이 될 몸이다. 난 거래를 업으로 삼고 있지. 침착하게 내 거래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대가를 치르든지 해. 은(銀)이냐 아니면 납(鉛)이냐. 너희가 선택해.” 뇌물을 받거나 총 맞아 죽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소리다.

은이냐 납이냐. 폭력과 뇌물로 점철된 도둑정치(kleptocracy)의 본질을 보여주는 말이다. 도둑정치는 19세기 초 영국에서 만들어진 신조어다. ‘훔치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klepto와 정치를 뜻하는 접미사 cracy를 결합한 것으로, 말 그대로 ‘도둑놈들이 하는 정치’라는 뜻이다.

도둑정치는 금권정치(plutocracy)와는 다른 개념이다. 대부분 범죄자는 자기 돈을 감추려 하고, 정치판에 나서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금권정치의 유혹에 빠지는 건 대체로 스스로 부를 일궜거나 상속받은 사람들이다. 재산을 지키고 더 늘리려 정치의 힘을 동원하거나, 재산을 이용해 권력을 손에 넣고자 하는 경우가 금권정치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도둑정치는 범죄와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권력을 쥔 자가 그 힘을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거나 법 질서를 왜곡하여 자기 주머니를 채울 때, 그것은 금권정치가 아니라 도둑정치다. 때로는 ‘나르코스’처럼 범죄자가 범죄 수익을 밑천 삼아 정치판에 뛰어들어 휘젓고 다니는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 또한 단순한 금권정치가 아닌 도둑정치로 분류될 수 있다. 범죄자에 의한, 범죄자를 위한, 범죄자의 정치. 그것이 바로 도둑정치인 것이다.

도둑정치는 이른바 ‘후진국 현상’이다. 천연자원이 풍부하고 산업이 발전하지 못한 국가에서 곧잘 발생한다. 중국에 석탄을 팔아 스위스 시계를 구입해 당 간부들에게 나눠주는 북한에서 벌어지는 일 또한 도둑정치라고 할 수 있다. 부당한 방법으로 권력을 손에 넣은 자들은 국가를 사유화하여 제 이익을 챙기고, 그 돈으로 다시 권력을 움켜쥔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든 도둑정치의 늪이다.

‘대장동 특혜 분양 의혹 사건’은 당시 성남시장이던 이재명 경기지사를 꼭짓점으로 하여, 이 지사의 측근인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 화천대유자산관리 대주주 김만배씨, 심지어 권순일 전 대법관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초대형 스캔들이다. 국민들은 지금까지 드러난 것만으로도 황당함을 넘어 공포를 느끼고 있다. 도둑정치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인정했다시피 대장동 개발은 이 지사가 ‘설계’한 것이다. 공영 개발의 명분으로 토지를 값싸게 수용해 민영 개발하여 비싸게 팔았다. 수사 중인 사안이긴 하나, 범죄 혐의가 조금이라도 드러난다면 이건 명백한 도둑정치다. 권력을 이용해 불법으로 돈을 벌었으니 말이다. 일각에서 의혹을 제기하듯 화천대유의 천문학적 이익 중 일부가 이 지사의 변호사비 대납을 위해 쓰였거나, 혹은 그의 정치 생명을 구한 대법원 판결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줬다면, 이는 한층 더 심각한 도둑정치의 사례가 된다.

너무도 어이없는 현실 앞에 요지부동이던 더불어민주당 지지층의 민심마저 크게 흔들렸다. 대선 후보 경선 3차 선거인단 투표에서 이낙연 전 대표가 득표율 62.3%로 28.3%를 얻은 이 지사에게 압승을 거두는 이변이 연출된 것이다. 그러나 이 지사는 여전히 당당하다. 유례를 찾기 어려운 권력형 개발 비리에 연루된 장본인이 대선 후보 당선 연설에서 ‘부동산 대개혁’을 외치며 “개발 이익 완전 국민환원제” 등을 공약하고 있다. 그야말로 초현실적인 광경 앞에 할 말을 잃을 지경이다.

<나르코스>에 따르면 파블로 에스코바르는 정치에 입문하며 스스로를 ‘빈민의 로빈 후드’로 이미지 메이킹했다. 대중에게 푼돈을 나눠주며 대놓고 매표 행각을 벌였다. 어디선가 비슷한 모습을 본 것 같은데, 그냥 내 기분 탓일까. 아닌 게 아니라 <나르코스>의 매 에피소드가 시작될 때마다 뜨는 자막이 있다. “이 드라마는 실화에 기초했지만 일부 등장인물 이름, 기업체, 사건과 지역은 모두 허구입니다. 실제 이름, 인물 및 역사와의 유사성은 우연이며 의도하지 않은 바입니다.”

에스코바르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다. 국회에서 탄핵당한 후 법무장관과 대통령 후보 등을 상대로 복수하겠다며 온 나라를 피바다로 만들었다. 협박에 굴하지 않는 강직한 대통령이 선출된 후에야 그 범죄 행각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도둑정치가 빼앗아간 것을 되찾으려면 국민 스스로 눈을 떠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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