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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사람] 선의와 열정의 균형…35년 여성운동가 윤정숙

[그사람] 선의와 열정의 균형…35년 여성운동가 윤정숙
1. 지난해 자신의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네 사람이 세상을 떴다. 고령으로 타계한 스승 이효재를 빼면 박원순, 김종철, 후배 활동가의 죽음은 황망하기 그지없는 죽음이었다. 마음의 준비 없이 맞은 지인들의 죽음을 계기로 생각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래서일까, 할 말이 넘쳐나는 사람이었다. 짧은 질문에 대한 긴 답이 이어졌고 한 가지를 물으면 두 가지, 세 가지를 답했다. 이 사람 말은 진보의 대의에 대한 절절한 고백인 동시에 진보의 위선에 대한 통렬한 고발이었고 현대사에 대한 날카로운 증언도 있었다. 간간이 되돌릴 수 없는 시간에 대한 회한처럼 들리는 대목도 있었다. 누구에 못지않게 말을 많이 하며 살아온 사람일 텐데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말할 기회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답변이 너무 길다 싶은 대목도 있었는데 인터뷰 녹취를 읽어보니 버릴 이야기는 없었다. 여성민우회 창립 멤버로 사무처장과 공동대표를 역임했고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를 지냈고 지금은 녹색연합 상임대표다. 35년째 시민운동 현장을 지켜온 윤정숙을 만났다.

그사람 윤정숙

2. 아버지는 20대 때 인천 시의원을 지낸 지역 유지였다. 5·16쿠데타 이후 정치 규제에 묶여 정치에 대한 꿈을 접긴 했지만 연말이면 연하장이 가마니로 올 만큼 지역에서 이름 석 자로 통하는 사람이었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피아노가 있는 집, 처음으로 텔레비전을 산 집이었고, 서울 동부이촌동에 자녀들을 위해 아파트를 구입했다고 하니 상당한 재력가였다. 딸을 사랑하는 좋은 아버지였지만 어머니에게 좋은 남편은 아니었다고 했다. 이 사람은 아버지 때문에, 그리고 시어머니 때문에 속상한 어머니의 하소연을 잘 들어줬던 모양이다. 나중에 어머니가 '너는 남의 말을 잘 들어주면서도 그 말을 옮기지 않더라'고 말했다. 이 사람은 아버지의 비밀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아버지가 보던 신문, 잡지도 열심히 보고 고등학교 때 '창작과 비평'을 접하기도 했고 연극에 관심이 많아 연극 연출가를 꿈꾸기도 했지만 적어도 고등학교 때까지 인천 도화동 부잣집 둘째 딸의 장래 모습은 현모양처였다.

인천 도화동 부잣집 둘째 딸, 어린 시절은 이랬다.

1976년 이화여대에 들어간 이후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읽고 전태일 이야기를 들었다. 그 충격으로 며칠을 울었고 미팅과 축제가 시시해졌다. 자기 발로 봉천동 산동네 야학을 찾아가 자기 또래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쳤고 상계동 빈민촌에서 탁아 지원사업을 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경험했다. 방학 때는 공장에 들어가 노동자의 삶을 몸으로 겪었다. 위장 취업은 아니었다.

"대학교 2학년 때 아버지를 설득했어요. '제가 너무 편하게 자랐잖아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아버지 아는 사람 있을 테니 공장에서 한 달만 일하게 도와주세요' 아버지가 그걸 기특하다고 생각하셨는지 천안에 있는 남영나일론을 소개해줬어요. 거기 기숙사에서 한 달을 지내며 12시간씩 일했어요. 제게는 더할 수 없는 학습의 장이었고 껍질을 벗는 계기가 되었죠."

학교에서 배우는 것보다 운동권 교회로 유명했던 향린교회 대학생 모임에서 배우는 것이 훨씬 많았다. 그 모임에는 훗날 노동자 시인으로 이름이 알려지는 박노해, 현 국무총리 김부겸, 법정에서 사형을 구형받고 '영광입니다'라고 외쳤던 고 김병곤 등이 있었다. 혁명, 해방, 민중, 역사 같은 말들이 넘나드는 그 모임이 때로는 너무 무섭기도 하고 버겁기도 했지만 이 사람에게 세상을 보는 새 눈을 갖게 해주었다. 1979년 교내 시위와 관련해 제적되었다 복학했지만 80년 5·17 직후 다시 제적되었다. 이미 대학 졸업장 따위는 관심사가 아니었다. 운동권 학생과 부모와의 갈등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딸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예전에는 잘 보이지 않던 집안의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분위기도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런 갈등과 답답함을 피하기 위한 돌파구가 필요했다. 23살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 이유다.

그사람 윤정숙

3. 남편과는 향린교회 모임에서 만났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라며 당당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사람이 어느 순간 남자로 다가왔던 모양이다. 세미나에서 정리를 하는 능력이 탁월하고 나이도 6살 많았으니 이목희라는 이름의 서울대 출신 청년은 듬직하고 의지할 만한 선배였다. 자신을 부모와의 갈등에서 구해줄 수 있는 동아줄로 보였다.

"그때는 제가 마음에 맞는 사람과 결혼하면 조금 더 편하게 서로 격려하면서 운동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야무진 꿈을 꾼 거죠. 정말 야무진 꿈이었어요. 적어도 매일같이 부모님 힘들어하시는 것 안 봐도 되겠다 싶었고요."

양가 부모는 물론이고 주변에 있는 사람 가운데 누구 한 명도 찬성하는 사람이 없는 결혼이었다. 모두가 반대하는 결혼을 강행할 만큼 사랑에 눈멀었던 시절이었을 텐데 자신의 사랑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후회한다고 했고 너무 힘들었다고 했고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 꼴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동지이자 선배와의 결합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상은 7남 2녀 빈농 집안의 며느리가 되는 일이었고 가부장적인 의식이 몸에 밴 경상도 청년의 아내가 되는 일이었고 가난한 해고 노동자 가족이 되는 일이었다. 결혼은 고행의 시작이었다.

"결혼하고 정말 어려웠어요. 결혼할 때 남편은 해고 노동자였고 제게 옷 한 벌 해주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어요. 살면서 이렇게 힘든 것은 처음이었어요. 긴 시간 동안 상상도 못 한 가난을 경험했어요."

가난해서 오직 불행했다. 가난을 덮어줄 신혼부부의 사랑 같은 이야기는 일언반구 없었다. 결혼하고 덜컥 임신을 했고 출산을 앞두고 남편은 구속되었다. 남편 없이 혼자 아이를 낳았다.

"그때는 그게 슬픈 건지 어떤 건지도 몰랐어요. 아이 낳을 때 남편이 옆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꿈에도 못 했어요. 남편이 감옥에 있는데 어쩔 거야, 남편 없이 애 낳을 수도 있지 하는 그런 처연함이 있었죠. 울고불고한 것은 엄마였고 측은해한 것은 남들이었죠."

가난만이 불행의 원인은 아니었다. 결혼에서 임신, 출산, 육아로 이어지는 과정은 이 사람에게는 운동권 경력의 단절이기도 했다. 남편은 세상의 변혁을 꿈꾸는 운동가였지만 이 사람은 그저 운동가의 '아내'일 뿐이었다. 남편은 거의 매일 밤 동지들과 천하대세를 논했지만 이 사람에게는 함께 할 동지도 조직도 없었다.

그사람 윤정숙

"친구들은 다 자기 커리어를 쌓기 시작하잖아요. 유학을 가거나 사회생활을 시작하는데 저는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무력감, 고립감 때문에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저를 드러내고 싶지도 않았어요. 나는 자폐증인가보다, 자폐증처럼 그냥 나 홀로 내 안에 있는 것이 편했어요. 내 꿈, 내가 실천하고 싶었던 가치 있는 삶은 전혀 길이 안 보였어요. 저의 20대는 첩첩산중, 오리무중이었어요."

밤늦도록 들어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면서 혼자 술을 마셨다. 이대로 삶을 끝내고 싶다는 충동을 수시로 느꼈다. 주변에 같은 처지의 여성들이라도 있었더라면 좀 나았을 텐데 이 사람은 인천에 고립된 처지였다. 그런 아내를 남편은 이해하지 못했다.

"나락에 떨어져 있는 그 어린 아내. 그 어린 아내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남편,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남편, 알아도 그게 얼마나 힘든지 모르는 남편. 그래서 남편에게도 이야기 안 하고 몇 년을 그렇게 보낸 거 같아요."

아내만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남편은 항상 감시와 체포, 구속을 의식하며 살아야 했다. 민주주의, 노동해방, 혁명을 위해 조직운동을 하는 사람이었으니 일신의 안위나 가정의 평화를 돌볼 여유 따위는 없었고 그런 것을 말하는 것조차 사치였다. 남편은 지금까지도 그 시절 고문당하고 수난받은 이야기를 아내에게 한 적이 없다. 남편이 동지들과 집에 오는 날이면 없는 살림에 밥을 해내고 찌개 안주를 장만하고 새우깡을 사 오는 게 이 사람의 일이었다. 이 사람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그들의 논의에 이 사람이 낄 자리는 없었다. 경북 상주에 있는 시댁은 유교적 가풍이 엄격한 집안이었고 남편은 그 영향을 받아 가부장적 기질이 강한 사람이었다. 연애할 때는 그게 매력이었을 텐데 결혼하니 달리 보였다. 남성들이 갖는 여성 차별적 태도, 가부장적 권위 의식은 이념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진보의 보수성, 운동하는 남자들이 보인 가부장적 행태에 대해 거의 치를 떨었다.

"결혼한 후배 중에는 구타하는 남편도 있고 가사 노동은 전혀 안 하고… 이런 사람들이 밖에 나가서는 노동운동이니 민주주의니 하는데 저는 전혀 존경스럽지 않았어요. 심지어 제가 아는 사람 중에는 자기들 이야기할 때는 아내에게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해서 애 들쳐 업고 모임이 끝날 때까지 문밖에 서 있기도 했대요. 왜냐하면 자기들은 너무 거룩한 일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말을 제대로 못 한 것은 이 사람들은 잡히면 고문당하고 감옥 가는 사람들이니까 여자들은 견뎌야 된다고 생각하고 따지지 못한 거 같아요."

남편과 그의 동지들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희생하는 것에는 아내와 아이, 가정도 있었다. 올해 남편이 노동운동 사건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심 과정에서 변호사는 재판에 도움이 된다며 이 사람에게 그 당시 사정을 서면으로 작성해달라고 했다. 그 시절을 되돌아보는 것이 그렇게 싫었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되돌아보기도 싫은 시절이었다. 이 사람만이 아니라 아들에게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제 아들이 비슷한 또래 민주화운동 인사들 자녀들을 만났대요. 그런데 그 친구들에게서 공통된 표정과 느낌을 받았다는 거예요. '왜 아빠들이 열심히 싸운 것만 민주화운동이야? 엄마들도 있고 아이들도 있는데.' 어른들은 대의명분이니 뭐니 그런 게 있지만 아이들 경험과 시선은 따로 있구나. 어린 가슴이 가진 멍이 있고 외로움과 슬픔이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전두환 군부독재만이 이 사람을 힘들게 한 것이 아니었다. 같은 세계관을 가진 동지와의 결합이라고 생각했던 가정 내의 가부장적 질서, 억압과 불평등, 남편과의 갈등이 이 사람을 더 힘들게 만들었던 듯 싶은데 자신이 겪은 일을 자세히 말한 것은 아니었다. 며느리로서 겪은 일은 말했지만 남편에 대해서는 보수적인 인물이라는 표현 정도에 그쳤다. 역시 가족의 일이란 다 털어놓기는 힘든 일인가 싶었는데 어쨌든 반독재, 민주주의, 인권, 혁명 같은 거창한 단어의 그늘에서 이 사람이 시들어 간 것은 틀림없다.

KBS 시청료 거부 운동 시민연합의 간사, 그 일이 인연이 돼 여성민우회 창립 회원으로 참여했다.

4. 생계를 위해 출판사를 다니다가 1986년 우연히 KBS 시청료 거부 운동 시민연합의 간사로 일하게 되었다. 나도 할 일이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나서 일했고 그게 인연이 돼서 1987년 여성민우회가 만들어질 때 창립 회원으로 참여했다. 이효재, 한명숙, 이경숙, 김상희 등 훗날 한국 여성운동을 대표하는 인물들이 포진했던 이 모임의 실무 간사였다. 창립 당시 이 사람이 받은 활동비는 한 달 5만 원이었다. 내가 원하는 일, 의미 있는 일을 찾았다는 생각에 몸이 힘들어도 힘든 줄 몰랐다. 물 속에만 있다가 수면 위로 올라와 온몸으로 호흡하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제가 그때 시청역에서 덕수궁 주변을 주로 다녔는데요, 우울할 때는 가로수가 그냥 초록색 한가지로 보여요. 그런데 내 일을 하고, 내가 기획한 일을 해나가는 시절에는 초록색이 열 가지, 백 가지라는 것을 그때 느꼈어요. 그때 누구한테인지 모르지만 '감사합니다, 살았습니다'라는 표현을 했어요."

윤정숙 그사람
윤정숙 그사람

여성운동이라는 자신의 영토 안에 꽃도 심고 야채도 심기 시작하면서 자신이 살아나는 느낌을 만끽했다. 집에 돌아가면 아이는 엄마를 붙잡고 "엄마 민우회 가지 마, 민우회 끊어"라는 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을 때면 가슴이 아팠지만 과거로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내 역할, 엄마 역할, 활동가 역할 모든 것을 잘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아들과 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했다. "엄마가 돈이 없고 시간이 없어서 너한테 관심 못 가져줘 미안해" 아들이 답했다. "괜찮아. 다 지난 일인데…."

열정과 확신으로 가득 차 일했고 매일매일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밥보다 라면을 더 자주 먹어도 행복했다. 지방 강연을 마치면 차가 끊길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새벽 첫차로 서울에 돌아와 인천 집에 가서 아침밥을 해놓고 다시 사무실로 출근한 일도 있었다. 그 시절 이 사람 다이어리에는 1년 12달 365일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다. 누가 시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노조, 시민 단체, 총학생회 소속 여성들을 상대로 한 교육과 홍보, 상담이 주로 한 업무였다. 초기 여성민우회는 지금 돌아봐도 환상적인 조직이었다. '여성 해방구'에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자매애가 넘쳐흘렀고 일의 성과가 매일 눈으로 확인되었다. 이슈를 만들고 돈을 만들고 캠페인을 조직하며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것을 깨달았고 자신이 여리고 약한 존재가 아니라 힘이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 즐거웠어요. 아무도 불평하지 않고 행복했어요. 양말도 팔고 된장도 팔고 밤새워서 딸기잼 만들어 팔아서 돈을 벌었어요. 우리는 못 만드는 게 없었어요. 남성들은 이런 거 절대 몰라요. 무서울 게 없었어요. 뭐가 무서워? 이 신나는 일을 하는데… 모두가 깨어나는 과정이었어요."

어느 날 행사를 마치고 늦게 귀가한 이 사람에게 남편이 '그깟 여성 운동한다고…'라고 한마디 했다. 그 말에 이 사람이 폭발했다. 7시간에 걸친 이 사람과의 대화 중에서 가장 통쾌한 대목이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발바닥부터 온 힘을 동원해서 저항하기 시작했어요. 그때 조그마한 아파트에 살고 있을 때인데 책꽂이에서 책을 하나씩 꺼내 찢기 시작했어요. 찢으면서 한마디씩 한 거죠. '그래 너희들은 그 대단한 운동을 하느라고….' 남편이 너무 충격을 받았을 거예요. 그 뒤에 그 방에서 그대로 기절했어요. 그러면서 저는 마음속으로 굉장히 기쁘지 않았을까요. 나는 이제 저항할 수 있다. 내가 왜 이렇게 바쁜지, 이 일이 나에게 왜 꼭 필요한지, 이 운동이 얼마나 여성들에게 중요한지 그렇게 말한 거 같아요. 그 이후에는 남편이 이야기 안 하더라고요. 집안일도 많이 하고… 청소, 빨래, 특히 다림질은 남편 일이 된 지 20년쯤 됐어요."

29살 윤정숙은 이 모임에서 간사로 시작해 사무처장, 공동대표 등으로 17년을 일했다. 맨 밑바닥에서 시작해 이 모임의 정상까지 오르면서 여성 운동은 물론 한국 진보운동의 이면을 그 누구보다 많이 알게 됐다. 귀로 듣는 게 많아도 입으로 옮기는 것은 적은 사람이다. 슬쩍슬쩍 다른 사람 험담도 듣기 싫지 않게 할 만도 했는데 10대 시절 어머니의 하소연을 잘 들어주면서도 남에게 말을 옮기지 않던 그 미덕은 나이가 들어도 변하지 않았다.

덴마크에서 열린 국제회의 참석 당시


5. 2004년 여성민우회 대표를 그만둔 이 사람에게 박원순이 손을 내밀었다. 아름다운재단을 같이 하자는 제안이었다. 박원순과는 얼굴을 알고 지내는 사이였지만 친분이 있는 관계는 아니었다. 경험도, 능력도 없다며 거절하는 이 사람을 박원순은 몇 달에 걸쳐 집요하게 설득했다. 박원순의 설득도 있었지만 새로운 공간과 만남을 찾는 이 사람의 생각이 없었다면 성사될 리 없는 일이었다. 1997년부터 2년 동안 영국 유학을 통해 본 넓은 세상에 대한 경험, 십수 년 동안 같은 일을 같은 방식으로 하고 있는 것 같은 답답함, 여성들의 정치 세력화를 두고 빚어진 갈등, 여성단체 대표 다음 행보는 정치권 진입으로 여기는 분위기에 대한 반발 등이 이 사람을 다소 결이 다른 단체로 향하게 만든 배경이었다.

-여성운동과 아름다운재단 일은 전혀 다른 일 아닌가요.
"다르기도 하지만 비슷한 면도 있지요. 페미니즘 가치 중에 보살핌, 돌봄이라는 게 있잖아요. 저는 여성운동을 과거 같은 방식으로 더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유학 갔다 와서도 여성운동을 한참 더 한 상태였고요. 그리고 대표가 되면 그다음 길이 별로 없어요. 어디 마음대로 갈 수도 없고, 정치인을 하든지 새롭게 공부해서 박사가 되든지 이런 일인데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2006년 1월부터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로 일했다. 우리 사회에서 가장 잘 사는 사람부터 가장 못사는 사람들까지 두루 만나며 선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박원순 그늘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을 만나면 박원순 동정부터 먼저 물었고 박원순과의 관계를 궁금해했다. 마치 이미자 뒤에 노래 부르는 가수 같은 느낌이었다. 재단으로 온 지 7개월 만에 병이 나서 일주일을 쉬었다. 아는 스님을 만나 자신의 고민을 털어놨다.

"그분과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했어요. '나 너무 힘들다, 여기에 잘못 온 거 같고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난 성격도 소심하고 누구한테 기부하라는 말도 잘 못 한다' 그랬더니 그 스님이 그래요. '이사님. 그게 보살님의 강점이에요. 그런 자세가 보살님의 개성이고 특색이에요.' 그 말 듣고 '좋아 내 스타일대로, 내가 느끼는 대로, 나의 언어와 이유를 가지고 해봐야지' 싶었어요. 그렇게 마음먹으니 훨씬 가벼워지고 편안해지고 비교해도 상처받지 않고 내 스스로 비교하지 않는 상태가 되더라고요."

아름다운재단, 거기서 선한 의지를 갖고 세상을 좋게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만났다.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라고 하면 누구나 알아줬고 누구나 인정해줬다. 만나자고 하면 거절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것이 힘이구나 싶었다. 더 큰 단체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은 물론이고 정치권 영입 제안도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선한 의지를 가지고 세상을 좋게 만들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재벌 회장도 있었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도 있었고 자신의 전 출연료를 기부하는 연예인도 있었고 돈 대신 자신의 재능을 기부하던 사람들도 한두 명이 아니었다. 사람을 만나는 게 일이었고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것이 성과였다.

"이 사람은 진정으로 하는구나, 자기 마케팅하는구나 구분되죠. 진정으로 하는 사람은 기획사랑 사진 찍을 사람을 데리고 오지 않아요. 기부하는 이유를 자기 언어로 분명하게 말한다는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이효리, 이적, 김제동, 유지태 씨 등이 기억이 나요. 유재석 씨는 고액 기부자인데 만날 필요 없다며 죽어도 얼굴을 안 보여줬어요."

윤정숙 그사람

2011년 박원순의 서울시장 출마는 예상 못 한 일이었다. 사전상의 같은 없었다. 박원순은 출마 선언 직전 전화 한 통화로 통보했을 뿐이다. 그 이후 벌어지는 일은 온전히 이 사람과 재단이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출마 선언 다음 날부터 재단을 향해 온갖 공격이 쏟아졌다. 비난과 항의 전화가 빗발쳤고 재단은 쑥대밭이 되었다. 기부자들이 우수수 떨어져 나갔다. 무엇보다 고통스러웠던 것은 이런 상황에서 아무도 이 사람을 방어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재단의 입장을 밝히는 성명서에는 재단 이사들조차 이름을 올리기를 거부했다. 한 달에 한 번 아름다운재단에 오는 것이 영혼을 세탁하는 것 같다, 자신이 갖고 있는 직함 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게 이 재단 이사 타이틀이라고 말하던 사람들, 박원순과 함께 사진 찍는 것을 기꺼워하던 사람들의 놀라운 변신이었다. 박원순이나 그의 캠프에서도 단 한 통의 전화도 없었다. 고립무원이던 그때 손석희가 자신이 진행하던 <시선집중> 인터뷰를 제안했다. 이 사람이 기억하는 유일한 지원 사격이었다.

"질문 5개를 보내더라고요. 거의 밤을 새워서 답변을 준비했어요. 예정된 인터뷰 시간 5분이 넘었는데 제지하지 않더라고요. 제가 빼먹은 것이 있었는데 그것을 질문해서 제가 답을 할 기회를 주었어요. 너무 고마웠어요."

임기가 2년 남았지만 그다음 해 3월 아름다운재단을 그만두었다. 위기상황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자책도 컸지만 가까이 있던 사람들, 믿었던 사람들의 민낯을 보고 나니 더 이상 일할 기력도 의욕도 없었다. 그 뒤로는 재단 홈페이지를 방문하거나 관련 기사를 찾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 일로 인한 내상이 깊고도 깊었던 모양이다. 아름다운재단과의 이별은 아름답지 않았다.

6. 지난해 박원순 장례위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로 인해 후배와 동료들에게 적지 않은 공격을 받았다. 박원순의 죽음을 두고 속죄 중에서 죽음 만한 것이 있느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죽음은 그 자체로 가해라는 시각도 있다. 이 사람은 어떤 입장인지 물었다. 추도는 추도대로 하고 진상은 진상대로 밝혀야 하는 것이고 진상은 이제 드러난 것 아니냐고 말했지만 이 사람에게도 '박원순'은 정리가 명쾌하게 되지 않는 숙제처럼 보였다.

자연스럽게 화제가 페미니즘으로 이어졌다. 혹시 후배들이 '꼰대'라고 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렇게 표현은 안 하지만 그렇게 느낄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여성운동의 역사이자 증인인 이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1세대 여성운동 리더들이 정치권으로 가지 않고 여성운동 현장을 지키고 있었더라면 페미니즘운동 양상도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거 같고 그럴 필요도 없을 거 같아요. 운동은 시대의 산물이고 사회 환경에 따라 사회적 감수성도 바뀌고 그러면서 이슈의 우선순위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봐요. 우리 세대의 가치관과 방법으로 계속 페미니즘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봐요. 지금 젊은 세대는 페미니즘이 자기 삶의 등뼈 같은 역할을 하는 세대 같아요."

여성운동을 하던 선배들의 정계 진출에 대해서 비판적인 의견을 가졌던 사람이다. 여성운동을 정계 진출의 발판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 때문에 오해와 갈등도 적지 않았다. 여성운동 선배들이 지금도 자신을 잘 부르지 않는다는 말을 농담처럼 했다. 같이 일한 선배 중에 호흡이 잘 맞는 사람이 누구였냐고 묻자 선배보다는 후배들이 일하기 편했다고 했다. 현 정부 들어 두 차례 입각 제의를 받았다. 두 번 모두 별 고민 없이 거절했다. 환경 분야를 맡아달라는 말이 나왔을 때는 평생 환경운동을 한 사람들이 많고 나는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적임이 아니라고 거절했다. 여성 분야 제안을 받았을 때는 내가 여성운동 떠난 지 오래됐다며 고사했다.

"장관을 4-5년 한다면 고군분투하며 뭔가라도 하겠다는 마음이 들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런데 1-2년 만에 바뀌어서 이름도 기억 못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잖아요. 그런 것이 제게는 의미 부여가 안 됐어요. 오히려 밖에서 일해도 내가 어떤 자세로 하는지에 따라서 장관이나 국회의원보다 못할 게 없다는 생각도 있고요."

여러 단체와 조직을 맡아 일했지만 그 조직 안에 녹아드는 쪽이었지 조직을 자신의 색깔로 바꾸는 리더는 아니었다. 모임에서 홀로 우뚝한 존재도 아니었다. 35년 동안 여성민우회, 아름다운재단, 녹색연합, 안철수재단 등 주요 단체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것에 비하면 존재감이 뚜렷하지 않다. 여성운동을 할 때는 이효재, 한명숙 같은 카리스마 강한 선배들에게 가려졌고 아름다운재단 시절에는 박원순의 그늘이 짙었다.

-경력이나 활동 폭에 비하면 언론 노출이 많거나 인지도는 높지 않은 거 같습니다.
"아름다운재단에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재단을 알려야 되니까 언론 접촉이 있었지만 사람들이 저를 잘 기억 못 할 수 있어요…. 사실 기자회견 하거나 사진 찍을 일 있으면 가운데 앉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끊임없이 해바라기처럼 자리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는 게 사실이지요. 저는 사람보다는 일이 보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지만 저 역시 자기 드러냄의 욕심과 뒤에 서 있기의 겸손이 교차하던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가치를 알아보고 함께 일하기를 원한 사람 가운데는 안철수도 있다. 청춘콘서트로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던 2012년 안철수는 자신이 재산을 기부해 만든 안철수재단 상임이사 자리를 윤정숙에게 제안했다. 상임이사 자리는 거절했지만 자신이 스승으로 생각하는 박영숙과 함께 안철수재단 이사로 참여했다. 이 때문에 안철수 측근 인사라는 말도 들었다. "재단 이사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시라"는 안철수의 말을 믿고 참여했지만 실망 끝에 1년 만에 그만뒀다.

"여기 역시 그냥 돈 낸 사람의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어요. 이사회에서 몇 달을 고민해 결정한 사안이 한 순간에 와서 한마디 하면 뒤집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런 구조라면 내가 무슨 역할을 할 수 있겠나 싶은 생각이 들더라구요… 회의할 때는 토론도 하고 논쟁도 하고 이래야 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제가 경험했던 시민운동, 아름다운재단 경험과는 달랐어요."

7. 후쿠시마원전 폭발사고를 보면서 환경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2013년 녹색전환연구소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환경운동에 뛰어들었다. 지난해 타계한 녹색평론 대표 김종철과의 인연도 이 운동에 발을 들여놓는 데 한몫했다. 2017년 녹색연합 공동대표를 맡은 데 이어 올해부터는 상임대표로 일하고 있다. 여성운동, 나눔운동에 이어 환경단체 대표까지 맡자 직업이 대표냐는 말도 들었다. 실핏줄 같은 풀뿌리 시민운동이 느리긴 해도 결국에는 훨씬 힘이 세다고 믿는 이 사람에게 녹색운동은 꽤 잘 어울리긴 하지만 전문성이 필요한 환경단체의 대표를 맡는 것이 조금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윤정숙 그사람

"좀 불안했죠. 내가 혼자 과도한 일을 하고 있나? 한 1년쯤은 사람들 만나고 활동가들한테 이야기 듣고 배우는 과정이었죠. 다 제 선배잖아요. 그다음부터 겁이 좀 덜 났어요."

환경을 오감으로 느끼기 위해 부지런히 현장을 찾아다니고 있고 얼마 전에는 미래세대를 노년층이 지켜주자는 이른바 그레이그린(Grey Green) 운동도 시작했다. 600명의 회원들이 있는 환경단체 출범을 주도하며 여전히 바쁘다. 그렇지만 이제는 물러날 시간과 자리를 찾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부터 각종 직함들을 내려놓고 있다. 이제 새로운 자리는 더 이상 가지 않을 생각이다.

"최근에 탄소중립위원회가 만들어졌잖아요. 거기 위원으로 들어오라고 하더라고요. 안 하겠다고 했더니 제안한 쪽에서 놀라요. '이거 왜 안 해요? 장관급이예요' 그래서 '장관급이 아니라 총리급이라도 해도 제가 가서 역할을 할 게 뭐 있을까요?' 그랬어요."

다양한 경력만큼 다양한 표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처음 봤을 때는 수더분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다 싶었다. 인터뷰 중간에 잠시 휴식을 가졌는데 그때 본 옆모습은 날카로운 이미지의 인텔리처럼 보였다. 카메라가 없는 상황에서는 독설을 마다하지 않는 싸움닭 같기도 했고 종교 이야기를 할 때는 마음공부 제대로 한 수도자 같기도 했다. 35년 시민단체 외길을 걸어온 사람의 내공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다.

한때 높은 자리에 올랐던 사람들은 높이 오른 만큼 깊게 추락하였고 젊은 날의 헌신과 진정성을 의심받는 처지에 빠지기도 했다. 젊음이 사라진 얼굴에 날 것의 욕망만 남은 듯한 인사들을 보면서 허탈함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 사람에게 그런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한겨레 이인우가 이 사람을 두고 "선의와 열정이 균형을 이루는 데 성공한 사람에게서 풍기는 아름다움이 있는 사람"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십몇 년 전의 평가이지만 이인우의 평가는 여전히 유효하다.

'자리'는 내려놓더라도 할 일, 하고 싶은 일은 많다고 했다. 20대에 그랬던 것처럼 일이 없으면 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이니 살기 위해서라도 일을 할 사람이다. 동네 성당에서 피아노 반주하는 것, 동네에서 이주여성들에게 한글 가르치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마음 아픈 아이들에게 시간을 쏟는 것도 하고 싶은 일이라고 했는데 자기 아이 자랄 때 시간을 충분히 나누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이렇게 갚으려는 것인가 싶기도 했다.

그사람 윤정숙

<이 인터뷰는 지난 9월 24일 목동 SBS에서 양만희 논설위원과 2대1 대담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 윤정숙 녹색연합 상임대표와의 인터뷰 풀영상은 SBS뉴스 유튜브 채널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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