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영의 드라마토피아] 망각의 시간을 넘어서

김선영 TV평론가 2021. 9. 10.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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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드라마 <D.P.>의 한 장면.

김보통 작가의 탈영병 소재 만화 <D.P 개의 날>이 연재될 무렵, MBC에서는 연예인들의 병영 체험을 그린 리얼 버라이어티 예능 <일밤-진짜 사나이>(이하 <진짜 사나이>)가 방영 중이었다. 똑같이 군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둘의 문제의식은 정반대편에 놓여 있다. 군의 협조를 얻은 <진짜 사나이>가 군대를 밝고 친근한 얼굴로 그려낼 때, <D.P 개의 날>은 그렇게 애써 포장한 군의 잔혹한 이면을 정면으로 고발했다. 두 작품은 대한민국 군대의 가장 어두운 역사 중 하나로 기록된, 2014년 ‘윤일병 폭행 사망사건’에 대한 우리 사회의 대조적 두 반응이기도 하다. <D.P 개의 날>이 ‘윤일병 사건’의 교훈을 계속해서 환기할 때, <진짜 사나이>는 그 역사를 빠르게 망각시키는 데 일조했다. 군 당국이 표면적으로는 병영문화 개선에 적극적 의지를 표명하자, 사회적 관심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김선영 TV평론가

2021년, 우리 사회는 그 망각의 시간에 대한 쓰디쓴 대가를 치른다. 공군과 해군에서 성추행 피해 부사관이 잇달아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군대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공교롭게도 올해는 2014년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가짜 사나이> <강철부대>와 같이 군대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는 예능들이 큰 인기를 끌던 차였다. 유튜브 예능 <가짜 사나이>는 <진짜 사나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가혹한 훈련 과정을 통해 불굴의 군인정신을 강조했고, <강철부대> 역시 특수부대의 강인한 신체와 정신력을 예찬하며 화제를 모았다. 군대 예능 열풍의 한가운데서 다시금 목격한 부조리한 군의 실태는 더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리고 매우 시의적절하게도, <D.P 개의 날>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D.P.>가 지난달 27일 세상에 공개됐다. 넷플릭스를 통해 190여개 국가에 방영된 드라마는 우리 사회의 체감 시간을 2014년 ‘윤일병 사건’ 발생 당시로 되돌려놓으며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드라마는 전근대적 군대 문화를 향한 원작의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이어가는 한편 한층 매력적으로 각색된 캐릭터와 탄탄한 완성도로 대중적 재미까지 충족시킨다. 원작에서 상병이던 주인공을 이제 막 군에 입대한 신참으로 재탄생시켜 군 문화에 낯선 시청자들까지 쉽게 유입하는 전략도 주효했다.

주인공 안준호(정해인)는 자대배치를 받자마자 포악한 선임의 표적이 된다. 그런 준호를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은 디피, 즉 군무이탈체포조라는 보직이다. 남다른 관찰력과 복싱을 한 이력으로 디피가 된 준호는 선배 한호열(구교환)과 환상의 콤비를 이뤄 탈영병 추적에 나선다. 그 과정에서 그가 목격하는 것은 군에 적응하지 못한 ‘낙오자’들의 일탈이 아니라 그들을 극단으로 내모는 폭력적인 군 시스템이다. 2회에서, 코골이를 한다는 이유로 지속적인 가학행위에 시달리면서도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했던 탈영병 최준목(김동영)과 체포조의 대화는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지하철이 종착역에 멈출 때까지 움직이지 못하던 준목은 준호와 호열을 발견하고 “여기가 어디”냐 묻는다. “종점”이라는 준호의 대답에 준목은 체념하듯 말한다. “더 갈 데가 없네요.”

이 대화 신은 <D.P.>의 이야기가 글로벌 시청자까지 사로잡은 이유에 대한 단서이기도 하다. 이는 단지 군대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군대는 현실의 차별 기제를 그대로 반복하는 우리 사회의 축소판일 뿐이다. 가령 준호의 선배 디피였던 박성우(고경표) 상병은 정치인인 부친의 권력을 이용해 군 생활을 편하게 할 수 있었다. 반면 먹이사슬 피라미드의 밑바닥에 쉽게 노출되는 이들은 사회에서도 차별받는 위치다. 부모의 재산과 배경, 학력, 외모, 취향 등 사회가 인간의 ‘등급’을 나누는 모든 서열 구조가 군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어디든 출구 없는 지옥도다.

보편적 공감대로 글로벌 시청자까지 사로잡은 <D.P.>는 이를 통해 군대 개혁 공론화의 추진력을 더 얻을 수 있었다. <태양의 후예> <사랑의 불시착> 등으로 대한민국 군인에 대한 환상을 품었다가 이 작품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는 한류 팬들의 반응이 꽤 의미심장하다. 요컨대 <D.P.>의 가장 큰 성과는 그동안 미디어가 망각시켜온 군대의 어두운 실상을 세계에 알리며 공론화의 폭발력을 증폭시켰다는 데 있지 않을까.

김선영 TV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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