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눈 안 보여도 사는 건 더 재밌어"송승환의 인생 리부트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2021. 9. 4.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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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부터 연극 '더 드레서' 다시 올리는 송승환
"평창올림픽은 최고의 경험, '내려놓음'의 선물안겨"
"시각장애인으로 살아보니.. 기술보다 배려 절실해"
"행복은 스케일 아냐, 낚시대 여러 개 드리우고 살뿐"
"코로나로 난타 극장 닫고, '영상자서전' 회사 만들어"
"삶은 짧아, 일장춘몽.. 재밌게 살아야 후회 안해"
고난 탐구가 송승환/사진=장련성 기자

코로나 바이러스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떠날 수 없고 모일 수 없자 외식업계, 관광업계, 공연업계는 비명을 질렀다. 지난 가을, 거리가 온통 을씨년스러운 가운데도 배우이자 평창동계올림픽 개폐막식을 총지휘했던 송승환이 정동극장에서 공연을 올린다고 알려왔다. 그는 몇 년 전부터 눈이 멀어가고 있었고 이즈음 뿌연 안개 속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평창올림픽 이후 인연을 이어가던 나는 그의 시력 저하 과정을 가까이서 찬찬히 지켜보게 되었다. 어느날 레스토랑에서 메뉴를 읽을 수 없었고, 그 다음엔 접시에 놓인 샐러드를 집을 수 없었으며, 그 다음엔 목소리로만 사람을 구별했다. 평창에서 찬란한 빛의 드론을 띄우며 감격해하던 그는, 빛의 세계에서 어둠의 세계로 빠른 속도로 진입했다. 놀라운 것은 그가 시력을 잃어갈수록 더욱 명랑해지고 낙관적으로 변했다는 사실이다.

식사 자리에선 낭만적인 제스처로 와인잔을 부딪혔고 세련된 농담으로 좌중을 웃겼다. 시야가 흐릿한 채로도 대본을 외워 드라마에 출연했고, 정동극장에서 ‘더 드레서’라는 인생 역작을 무대에 올렸다. 그 옛날 연극무대 ‘에쿠우스’에서 말의 눈을 찔렀던 찌른 소년은, 자라서 위엄과 치기가 범벅된 괴팍한 노배우를 실감나게 연기했다. 눈 먼 배우의 공연이라니! 그러나 연극을 보는 도중 누구도 그가 흑먹같은 어둠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공연이 끝났을 때 관객들은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해 기립 박수를 쳤다. 그가 반듯한 몸가짐으로 객석을 향해 말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제가 7살 아역으로 연기할때부터 저를 봐오신 분들입니다. 여러분들 덕에 잘 자랄 수 있었고 여러분들 덕에 잘 늙어갈 수 있었습니다.” 눈물방울이 마스크 위를 타고 굴러떨어졌다. 실명 위기라는 절망 앞에서도 인생은 저렇게 찬란하게 피어날 수 있구나…

믿을 수 없을만큼 놀라운 송승환의 회복탄력성에 대해 나는 오래 생각했다. 시각장애인 4급이라지만, 어째서 그의 활동반경은 더 넓어지는 걸까.

문화소통 포럼(CCF)의 패널로 참가하고 돌아온 송승환을 대학로 PMC 프러덕션에서 만났다. 평창올림픽은 그에게 ‘내려놓음’이라는 위대한 선물을 안겼다고 했다. “앞이 안 보이니 몰랐던 세상이 보이더라”며, “힘든 한가운데서도 재미를 찾으라”고 현자처럼 말했다.

최근 그는 KBS의 도쿄 올림픽 개폐막식 중계 방송을 맡아 깊이있고 유려한 해설로 시청자들을 감동시켰고, 11월부터 재개될 ‘더 드레서’ 공연도 준비중이다. 덮쳐온 코로나 악재와 시력 악화에도 불구하고, 그는 눈을 빛내며 또다른 기회를 찾아냈다.

상대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하는 습관이 있는 나는 그와 대화하면서 조금의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다. 안개를 보는 빈 눈동자가 아니라 그 너머를 들여다보는 힘 있는 눈동자였다. 가끔씩 입술을 내밀며 생각에 잠기는 특유의 뾰로퉁한 표정은 젊을 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매력적이었다.

물리적 시계(視界)는 눈 앞 30cm로 좁아졌으나, 약한 자와 늙은 자를 보듬는 그의 시야(視野)는 드넓게 확장되고 있었다.

'더 드레서'가 11월에 다시 무대에 오른다. 2차 대전이 한창인 영국의 한 지방극단에서 ‘리어왕'을 올리는 노배우 선생님(sir)역을 맡은 송승환.

-로날드 하우드의 작품 ‘더 드레서’를 11월부터 다시 정동극장에 올린다고요. 코로나 시국에 이 연극이 줄 위로를 생각하니, 벌써부터 설레네요.

“작품이 참 좋죠? 작년에 정동극장 측에서 저한테 작품 선택권을 줬을 때, 이 작품의 포스터가 머리에 떠올랐어요. 40년 전 대학로 공연장 담벼락에서 우연히 봤었던! 영국 BBC에서는 드라마로도 방영했는데, 안소니 홉킨스가 노배우 역을 맡았었죠.”

2018년 겨울, 평창올림픽이 끝난 후 그가 다음 스테이지로 ‘노역의 신세계’를 이야기했을 때, 당시 나는 흘려들었다. 전 세계 카메라를 무대로 집중시켰던 올림픽 스타 감독이, 난데없이 노인 연기라니… 그런데 그는 평창 스타디움 앞 눈밭 위에서 했던 약속대로, 어느날 무대에서 애절하게 부르짖었다.

“우리는 무참한 전쟁 옆에서 또다른 싸움을 위해 온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친 심신을 재충전하기 위해 극장으로 오시리라 믿습니다.”

극장 바깥에서는 독일군의 공습 사이렌이 울리고 있었고, 폐업 직전의 극장주이자 노배우 sir(선생님)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 안타깝게도 초연 당시 50회로 예정되었던 ‘더 드레서’ 공연은 19회를 끝으로 중단되었다. 바이러스와의 전쟁이 길어지면서 송승환이 운영하던 전국의 난타극장도 모두 문을 닫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무대 위의 송승환이 상투적이지 않아서 좋았어요. 대상화된 노인이 아니라 여러 욕망이 충돌하는 ‘한 인간’으로 폐부를 찌르더군요. 얄미우면서도 위엄있고 시니컬하면서도 귀여웠습니다.

“하하. 제가 다음 작품도 미리 준비해놨어요. 한 노인이 양로원에 들어가서 겪는 이야기인데요. (아이패드의 해외 연극 이미지를 보여주며)노인과 죽은 아내, 아들, 3명이 극을 끌어가는데 그 삼각관계의 느낌이 좋아요. 지금 대본 번역 중에 있어요.”

-기회를 정말 잘 잡으시는군요!

“하하. 그런가요? 주어진 기회가 ‘괜찮다’ 싶으면 꽉 잡아요. ‘더 드레서’는 대본도 국내에 없어서 제가 문예진흥원에서 복사본을 간신히 찾았어요.”

-극중 노배우 ‘sir(선생님)’가 맘에 들었습니까?

“개인적이고 자기중심적이죠. 그런데 예술가들은 다 그래요. 미화시키지 않아서 좋았어요. 전 사실 노배우의 의상담당인 ‘노먼’에게 매력을 느꼈어요. 평생 곁에서 선생님을 챙기고 다정하게 헌신하잖아요. 이 작품은 노배우와 의상담당의 엇갈린 우정을 그린 이야기예요. 그래서 처음엔 이순재 신구 선생님이 ‘sir’를 하고 내가 노먼을 하면 어떠냐고도 했어요. 하하. 영국에서는 안소니 홉킨스와 이안 맥클린이 ‘sir’와 노먼 역을 했어요. 둘이 나이 차이도 별로 안나잖아요.”

100페이지에 달하는 대사를 들으면서 다 외웠더니, 덤으로 다른 배역의 대사까지 외워지더라고 했다.

-아무튼 저는 젊고 명랑한 송승환 보다 늙은 말 같은 송승환을 보는 게 훨씬 흥미로웠습니다. 전작인 드라마 ‘봄밤’에서는 자기 출세길만 염려하는 전형적인 ‘민폐’ 아버지를 연기하셨죠? 한지민과 정해인을 갈라놓으려는…(웃음).

“하하. 그랬죠. 안판석 감독이 제안해서 했어요. 그런데 그 드라마를 하면서 자신감이 붙었어요. 눈이 잘 안보여도 할 수 있겠구나… 예상대로 귀로 대사를 외우고, 슛 들어가면 동선을 따라잡을 수 있었어요. 해보니까 되더라고요.”

-그래도 라이브는 다르잖아요. 공연 중엔 몰입하느라 몰랐지만, 막이 내린 후 등줄기에 땀이 났어요. 흑먹 같은 어둠 속에서 어떻게 한번의 실수도 없이 동선을 맞춰서 연기했을까?

“하하. 오히려 눈감고도 할 수 있어요, 리허설을 수십번 했거든요. 안개 덩어리 사이로 희미하게 형체도 보여요. (싱긋 웃으며)무대 밑으로 떨어질 일은 없어요. 조명 라인이 있거든요.”

불운의 찌꺼기가 조금도 만져지지 않는 청량한 목소리였다. 올림픽 성화의 불꽃이 사그라들 즈음, 그의 시신경의 불꽃도 희미해졌다는 뉴스가 퍼지자, 사람들은 당사자보다 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 30cm 눈 앞에 안개를 달고 다니는 건 대체 어떤 느낌이지?’

황반변성과 망막색소변성증이라는 병명이 인터넷 공간을 헤집고 다녔다. 세상의 염려와는 달리, 송승환은 시력 저하라는 신체적 사건을 인생 후반전에 만난 깜짝 기회 혹은 후천적 재능처럼 활용했다. 장애와 결핍이 없었더라면, 몰랐을 신세계와 접속해 가며.

-고난을 너무 유난하지 않게, 오히려 호기심을 갖고 탐구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자기 연민이 없어야 가능한 일이겠지요.

“(미소 지으며)저도 속상한 마음이 왜 없겠어요. 그런데 잘 안보이는 건 어차피 받아들어야 할 사실이었어요. 다행히 전 긍정정서가 많은 사람이에요. 상황이 나빠져도 평소 하던 일만큼은 계속하고 싶었어요. 놀랍게도 100%는 아니지만, 80~90%는 계속할 방법이 있었어요.”

그걸 찾는 과정이 은근히 재미있더라며 신이 나서 설명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눈이 안보이니 귀가 열렸어요. 문자메시지도 들을 수 있고, A4 문서도 스캔을 뜨면 스피커가 읽어주더라고요. 의학이 해결하지 못한 부분을 IT기술이 영리하게 해소해 줬어요. 도전정신을 자극한 건 영화였어요. 30cm 시야는 보이니 영상은 아이패드로 볼 수 있는데, 작은 자막이 문제였어요. 더빙 영화는 거의 찾을 수가 없더라고.”

-자막조차 눈으로 음미하는 시대니까요.

“하하. 그래도 저는 영화 보는 즐거움은 포기를 못하겠더라고요. 뭐라도 해보자 싶어서 넷플릭스 담당자를 만났어요. 마침 ‘봄밤’이 넷플릭스에서 만든 드라마였어요. ‘스마트폰도 책도 문서도 다 전자음이 읽어주는데 영화는 안되느냐?’ 물었더니 미국 본사에 문의를 해보겠대요.”

-결론은요?

“(영화 한편을 실행해서 보여주며)이거 보세요. 배우 보이스 톤도 들으면서, 기계음이긴 해도 자막도 들을 수 있잖아요. 이 정도면 감상에 무리가 없죠. 넷플릭스는 이미 그런 고민을 했고 설정에 보이스오버 기능을 넣어뒀는데, 한국만 그걸 몰랐답니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는 거죠. 결론은, 저는 지금 영화보는 즐거움을 계속 누리고 있어요(웃음).”

독서도 문제가 없었다. 지금은 책을 듣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 있다.

“특히 소설책은 눈 감고 들으니 머릿속으로 상상의 그림이 펼쳐져요. 눈 나빠지기 전부터 읽어온 ‘서양미술사’는 책을 통째로 스캔 떠서 PDF파일로 저장했어요. 이것도 전자음이 읽어줘요. 자, 들어봐요. 괜찮죠? 올 여름에 도쿄올림픽 해설하러 가면서 이어령 선생님의 ‘축소지향적인 일본인’을 챙겨갔는데, 이것도 ‘말하기 기능’으로 다 들었어요.”

보는 대신 듣기 시작한 송승환./사진=장련성 기자

멀티로 사는 게 습관이 돼서 책을 들으며 골프 채널도 보니 일석이조가 아니겠냐며, 진심으로 흡족해했다.

-눈이 나빠진 게 마이너스가 아니라 플러스가 됐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저는 그래요. 제겐 플러스가 됐어요.”

그가 눈을 반짝였다. 어떤 상황이든 호기심을 잃지않는 태도가 송승환표 회복탄력성의 키워드가 아닐까. 최악의 상황에서도 밝은 점을 찾는 긍정 정서, 문제 해결 의지, 실행능력과 고급 네트워크를 갖춘 그에게 장애는 인생 후반전을 열어갈 즐거운 과제를 부여한 듯 했다.

-이쪽 세상이 닫히니 다른 세상이 열렸군요!

“그랬어요.”

-장애를 겪으면서 어떤 세계를 보셨나요?

“보지 못하는 것과 듣지 못하는 것은 소통에 큰 차이를 만들더군요. 못 보면 사물과 단절되지만, 못 들으면 사람과 단절되죠. 안보여도 목소리가 연결되면 타인과 소통하고 격려받을 수 있잖아요. 그런 면에서 시각장애인보다 청각장애인이 더 힘들어요.

사람은 혼자 살지 못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들어야 해요. 오늘 아침에는 제가 각국 문화계 리더가 토론하는 문화소통포럼(CCF)에 참석했어요. 외국인 발표자의 말을 통역기로 듣다가, 문득 청각장애인이면 이럴 때 어떡하지 싶은 거예요.”

-요즘엔 수화통역사분들이 많이 활동하시더군요.

“그런데 자막은 음성으로 읽어주고, 말은 문자로 변환해주는 기술이 이미 굉장히 발달돼 있거든요. TTS(text to speech)나 STT(speech to text) 기술은 충분하니, 사회에서 잘 활용만 하면 돼요. 그래서 조만간 제가 방송사 리더들을 만나서 얘기하려고 해요. TV에서 그 기술이 적용되도록. 제가 4급 장애인이 되니까 알겠어요. 이제까지 기술이 없는 게 아니라 배려가 없었다는 걸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배려의 문제라는 말이 뼈를 때리는군요.

“네. 보통 사람은 자신이 편하게 보고 들으니, 장애인을 신경 못써요. 겪지 못했으니 상상을 못하죠. 기술이 있어도 그걸 활용하는 건 인간이에요. 배려의 마음이죠. 넷플릭스 같은 글로벌 기업은 처음부터 그 고민을 갖고 기술 설계를 해서 자막 읽어주는 TTS 기술을 아이폰 아이패드와 연동시켰어요. 장애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기술에 녹인 거죠.

그 마음이 없으면 기술이 있어도 활용을 못해요. 그런데 고령화가 진행되면 누구나 다 시청각 장애를 겪잖아요. 그래서 제가 삼성도, LG도 열심히 만나려고요. TTS와 STT기술이 제품에 일반화되도록.”

-얼마나 섬세하게 약자를 포용하느냐, 그들의 필요를 기술과 정책으로 스마트하게 구현해 내느냐가 관건이죠. 사랑하면 보이고 보이면 알게된다 잖아요. 그런 식으로 기업의 키맨들을 만나 환경이 개선된다면, 송구하지만 송선생의 시력 장애가 사회엔 복이 되는 셈이네요.

“하나씩 방법을 찾아가고 있어요. 저도 제 문제가 되니 답답해서 나선 거죠(웃음). 누구나 가지는 보통의 마음으로요.”

송승환이 총지휘한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의 한 장면. 그는 2020 도쿄올림픽의 무대가 여러모로 아쉬웠다고 평가했다.

-본격적으로 회복탄력성에 대해 얘기해볼까요? 코로나로 난타 전용 극장이 다 문을 닫았는데, 어떻게 버티고 있습니까?

“(잠시 표정이 어두워지며)회사 직원들은 거의 휴직이나 퇴직을 했어요. 문을 열면 다시 오기로 하고요.”

한때 100명이 넘는 직원들로 북적이던 PMC 프로덕션 사무실은 한 층이 통째로 텅 비어 있다. 난타 극장이 문 닫은지 1년 6개월째, 빈 책상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크겠어요.

“난타는 관광업과 공연업이 결합된 상품이라 직격탄을 맞았죠. 초반엔 한달에 4~5억이 적자였어요. 불행 중 다행으로 제주도에 연 난타호텔이 잘 됐어요. 지금은 한달에 1억 미만으로 적자 폭이 줄었어요. 닫힌 공항이 열릴 때 까지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더라고요. 그래서 시작한 게 유튜브예요. ‘송승환의 원더풀라이프’라고. 연세 드신 원로 배우들을 초대해서 인생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른들 인터뷰는 그 자체로 소중한 아카이브잖아요.”

-상업 방송에서 볼 수 없는 귀한 콘텐츠더군요. 이순재, 강부자, 오현경, 전원주, 임예진… 그분들 육성으로 전성기 시절의 희노애락을 들으니, 만감이 교차했어요.

“네.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구독자도 조회수도 늘고 있지만, 이게 돈은 안되요. 그래서 제가 김기자님 영역을 좀 침범했습니다(웃음).”

긴장한 내 앞에 그가 한 유명 기업인의 동영상 한편을 보여주었다. 인터뷰어는 송승환이었고, 카메라는 인터뷰이를 ‘성공시대’ 주인공처럼 수려한 영상으로 담아냈다. 그는 얼마전부터 영상회사(미디어4A)를 세워 기업인들의 ‘영상자서전’ 사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아날로그에 흩어진 시니어들의 인생자료를 디지털 영상으로 멋지고 가볍게 총정리해주는 일. 무거운 자서전 대신 에디션넘버를 단 USB에 인생을 편집해준다는 컨셉. 그 기획과 인터뷰를 송승환이 해준다면, 꽤 매력적인 비지니스다.

-문제는 이 퀄리티로 만들어 내려면 제작비가 만만치 않을텐데요?

“그것도 방법을 찾았어요. 실버 인력을 활용했죠. CF 현장은 세대 교체가 워낙 빠르니 은퇴해서 놀고 있는 실력자 감독들이 많아요. 그분들과 ‘난타’ 관련 퇴사 직원들 중에 영상에 관심있는 사람들로 스태프로 꾸렸어요. 일단은 ‘영업이 되는’ 기업인 대상으로 시작을 했고, 내년부터는 일반인들로 넓히려고 해요.

재밌는 게 뭔 줄 아세요? 촬영 감독들이 근사한 장소에 헌팅해서 ‘노을 보면서 맨발로 걸어보세요. 이렇게 포즈를 취해보세요’ 디렉션 하면 어른들이 굉장히 좋아하세요. 영화 주인공 된 기분이라고. 다들 자기 인생이 대하드라마잖아요. 그렇게 자기만의 ‘원더풀 라이프’를 남기고 싶었던 거죠.”

앞으로 보급형 시장가를 책정해 ‘원더풀 라이프’ 비지니스를 이어갈 거라고 했다.

송승환의 유튜브 '원더풀 라이프'에 출연한 원로 배우들.

-그러니까 코로나로 극장이 폐쇄되고 적자가 늘어나자, 유튜브에 극장을 열고 보통 사람들의 인생 영화를 찍고계신 거네요. 처음엔 재미로 시작했다가 차츰 돈 벌 궁리를 하고 있는 거고요.

“그렇죠. 처음부터 돈 벌자고 시작하진 않아요. 시작은 무조건 재미예요. 저는 제 장점을 알아요. 젊은 시절부터 워낙 MC와 DJ를 오래 해서, 방송 인터뷰에 최적화 돼 있거든요. 그 구력으로 유튜브에 원로 배우들 초대했더니, 돌아가시면 묻힐 소중한 이야기들이 쌓였어요. 그런데 하다 보면 계속 하고 싶고 그러려면 돈이 필요해요. 그 지점에서 생각의 각도를 살짝 틀어보는 거예요.

이미 조명도 카메라도 인터뷰어도 있으니, 인터뷰 대상만 일반인으로 확장해보자! 그렇게 비지니스 모델을 만들어요. 다행인 건 제가 눈이 잘 안보이니, 얼마나 더 귀 기울여 듣겠어요. 영상 인터뷰는 별 게 아니에요. 인터뷰이의 말을 열심히 들어주고 맞짱구 쳐주고 정성껏 듣다 생기는 궁금증을, 한번씩 질문하는 거죠.”

-그 별 것 아닌 것 같은 ‘경청’ 덕분에 글쓰는 인터뷰어인 저도 밥먹고 삽니다(웃음). 인터뷰하신 원로 배우들 중에 특별히 더 기억에 남는 분이 있으신지요?

“TV 드라마 ‘여로’에서 바보 영구로 나왔던 장욱제 선생님이요. ‘여로’는 당시 시청률 90%, 앞으로도 기록을 깨기 힘든 국민 드라마였어요. 장욱제 선생은 심형래 씨의 바보 ‘영구’의 원조였어요. 제가 아들 역할을 했는데, 뵙고 싶어서 수소문 해서 청했어요.”

-저는 강부자 선생이 고 김자옥 선생의 어여쁘던 젊은 날을 추억하는 대목이 참 좋더군요.

“젊은 친구들은 이순재 선생님이 6.25전쟁과 4.19를 배경으로 이야기 하실 때, 근현대사가 실감나게 다가와서 좋았다고 하더라고요(웃음)”

-그런데 가만보면 유명인을 대할 때나 무명인을 대할 때나, 스스로 잘 나갈 때나 못나갈 때도 참 한결같이 태도가 나이스합니다.

“하하. 저도 일할 때는 급해서 팩 소리도 질러요(웃음). 완벽하지 않죠. 그래도 세살 버릇 여든 간다는 말이 있잖아요. 제가 방송국 처음 드나들기 시작할 때 어머니께 배운 게 그거였어요. ‘인사 잘 해라. 예의 있게 행동해라’. 신기한 게 그것만 지켜도 눈에 띄고 예쁨을 받아요.”

-좋은 버릇을 여든까지 갖고 가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큰 자산이죠. ‘어른의 의무’의 저자인 야마다 레이지도 좋은 기분을 유지하고 것이 어른의 매너라고 했습니다.

-그런가요? 제가 활동하던 어린 시절에는 연예인이 딴따라 취급을 받았어요. 그래서 저는 더 반듯해지려고 노력했어요. 방송국 출입하는 중고생들이 머리 기르고 멋부릴 때도, 저는 일부러 빡빡 깍고 교복 입고 다녔어요. 남들이 색안경 끼고 보는 게 싫고, 연예인이라고 잘난체 하기도 싫었죠.”

젊은 시절의 송승환/사진=장련성 기자

-소년 가장이라 심리적으로 억압이 있었나요?

“아니요. 집안이 어렵긴 해도 떠밀려서 한 일은 아니었어요. 저는 방송국 다니는 게 재미있었어요. 아역 배우 연기하는 게 신났고, 하다보니 직업이 된 거죠.”

다만 소년 가장이라는 입지 덕에 망해도 늘 돈 벌 궁리를 했다고 했다. 배우로, MC로, 제작자로... 그때그때 잘 되는 역할로 옷을 바꿔 입으며 여러 개의 낚싯대를 드리우고 살았다는 송승환.

-제가 과거 인터뷰에서 ‘동시다발 역전인생’이라고도 표현했는데요. 요즘엔 그런 라이프스타일이 대세입니다. ‘올인하지 말라’는 거죠.

“(미소지으며)낚시대가 여러 개면 잉어도 잡고 피래미도 잡아요. 유연하게 여러 역할 하며 보면 필요한 순간에 멀티도 되고 융합도 돼요. 평창올림픽 공연 무대도 그렇게 나왔어요. 낚싯대가 한 개면 부러지면 끝이지만, 여러 개면 ‘이거 안되면 저거’라는 여유가 있어요. 공연 안되면 영상하지, 안 보이면 들으면 돼지… 베짱이 있어야 대안도 나와요.”

-그렇게 심리적 부담만 떨어뜨려도 인생이 얼마나 평온하지요.

“그러려면 처음부터 욕심 내면 안돼요. 재미를 우선해야 노하우가 생겨요. ‘난타’도 그랬어요. 넌버벌이 대단한 트렌드라 그걸 선점한 게 아니에요. 연극이 너무 재미있는데 돈이 안됐어요. 따져보니 시장이 작아서예요. 시장을 넓히고 세계와 소통하려면 언어의 벽부터 없애야 했어요. 거기서 직관적인 몸짓에 사물놀이의 흥을 비빈 아크로바틱 아이디어가 나왔어요.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하는 일의 순서가 그래요. 재미있는 걸 계속하면, 돈 버는 방법도 자연스레 풀려요. 물흐르듯이요.”

-유연한 마음가짐이 놀랍습니다. 평창올림픽 공연 총감독이 일반인 영상자서전의 인터뷰어로 나서는 것도 결심이 필요한 일이지요. 과거의 영광을 기억한다면, 지금 하는 일이 시시하게 느껴질 수도 있을텐데요.

“아니요. 그건 롤이 바뀐 거예요. 무대에 달라지면 롤도 바뀌어야죠. 일반인들이 갑이 되고 스타가 되면, 저는 스태프이고 을이에요. 제가 그런 갑의 마음을 품으면 갑질이죠. 허허.”

인생 내내 여러 개의 낚싯대를 드리우고 살았다는 송승환./사진=장련성 기자

-정말 반듯하시군요!

“저는요, 제 주제를 잘 알아요. 젊을 때는 세계 무대로 뻗어나가려고 힘을 쓰고 도전을 했어요. 지금은 체력이 딸려요(웃음). 그래서 안으로 깊게 품어요. 원로 배우들 인터뷰하고 일반인 영상자서전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해요.”

-가치를 비교하는 마음이 정말 없습니까?

“살아보니 사람의 행복은 스케일에 있지 않아요. 언젠가 지방공연 갔다가 조기 축구회 분들이 회식하는 모습을 봤어요. 그날 경기에서 이겼는지, 총무가 바람을 잡고 철물점 주인인 회장님이 통크게 양주를 낸 거예요. 다들 신이 나서 식당이 떠나갈 정도로 환호성이 터졌어요. 그걸 보고 생각했어요. 저 회장님이 대한축구회 회장님보다 행복하겠다(웃음). 행복은 스케일의 문제가 아니에요. 얼마나 박수 받느냐도 아니죠.”

-그럼 뭔가요? 행복은?

“자족이죠. 내가 얼마나 그 상황에 가치와 만족을 느끼느냐. 젊은 때는 힘이 있어 큰 시장에 욕심을 냈고 이뤄냈어요. 다행히 지금은 작은 무대에서도 의미를 발견하고 만족을 느껴요.”

-어떻게 그렇게 마음이 반듯한가요?

“세살 버릇 여든 간다니까요. 하하.”

-가장 든든한 심리적 자원은 뭐죠?

“긍정의 마인드. 어떤 위기가 와도 긍정적인 부분을 생각해요. 극단적으로는 죽음 조차도 그렇게 생각해요. 내일 죽어도 저는 호상이에요. 더 살아도 지금보다 더 재밌게는 못 살아요(웃음).”

-스스로를 젊었다고 느낍니까? 늙었다고 느낍니까?

“잘 모르겠어요. 젊은 건지, 늙은 건지. 어떤 때는 늙은 것 같고, 어떤 때는 젊은 것 같죠. 하루종일 늙었다고 느끼지도 않고 하루종일 젊었다고 느끼지도 않아요.”

-말의 눈을 찌르던 ‘에쿠우스’의 청년 송승환과 지금 ‘더 드레서’에서 죽어가는 노배우를 연기하는 송승환은 무엇이 달라졌나요?

“눈으로 보면 달라요. 앞은 젊었고 뒤는 늙었죠(웃음). 하지만 젊은 역할이든, 늙은 역할이든, 캐릭터가 되려고 몰입하는 열정은 똑같습니다.”

"저는 제 할 일을 하고, 기회는 어디선가 출렁이며 오겠지요."/사진=장련성 기자

-BTS를 기획한 방시혁이나 ‘기생충’을 만든 봉준호처럼 다시 한번 세상의 변화를 관통하는 콘텐츠를 내놓고 싶은 열망은 없는지요?

“그런 기회가 또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죠. 오면 좋지만 안 온다고 섭섭하지도 않아요. 얼마 전에 윤여정 씨를 만났는데, 그 분이 그래요. “내가 상 탈 줄 알고 ‘미나리’를 했겠어? 미국에서 찍으니 미국에 있는 아들 좀 자주 보겠다고 한 거잖아.” 생각도 안했고 욕심도 없었는데, 결과는 아카데미였어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사람 일은 몰라요. 저는 제 일을 할 뿐이고, 기회는 어디선가 출렁이고 있지요(웃음).”

-평창올림픽은 영광과 상처(실명 위기)를 동시에 안겼는데요. 여전히 인생 최고의 경험으로 생각합니까?

“그럼요. 영광도 좋았지만, 영광 이후에 ‘내려놓음’이라는 선물을 안겼어요. 2018년 이후는 ‘내려놓음’의 연속이었어요.”

-어떤 언어가 위로가 되던가요?

“가장 많이 쓴 단어는 ‘어쨌든’이었어요. 문제가 있지만 ‘어쨌든’ 해보자. 어렵겠지만 ‘어쨌든’ 가보자. 극장문은 닫았고, 저장된 곶감은 얼마 남지 않았지만, 최악을 상상해서 미리 겁먹지 않아요. ‘어쨌든’ 위드 코로나 시대가 올 테고, 기왕이면 잘 될 거라고 믿고 가야죠.”

-마지막으로 제각자 힘든 시간을 버티며 이 시간을 충실히 살아내려는 보통 사람들에게 조언을 부탁합니다.

“힘들어도 ‘어쨌든’ 그 가운데서 재미를 찾으세요. 일도 재밌게, 휴식도 재밌게. 육십 넘게 살아보니, 인생이 너무 짧아요. 일장춘몽 같습니다. 높이 오르기도 했고, 멀리 나가기도 했고, 눈 앞이 컴컴해지기도 했어요. 잘 나가도 못 나가도 별 차이 없어요. 영상자서전 만들며 보통 사람들의 인생을 들여다 보다 깨달았어요. 사는 방식이 다를 뿐 제 각자 다 가치 있는 삶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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