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한끼]고수며들었다, 해장하러 간 쌀국숫집에서

끼니로그 2021. 8. 18.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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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내가 사랑한 한끼’는 음식, 밥상, 먹는 일에 관해 경험과 생각을 나누는 코너입니다.

고수를 가리켜 누군가 ‘굶주린 암사자의 입 냄새’라고 표현했던 게 아직 잊히지가 않는다. 내 주위 대부분 한국 사람은 고수 향을‘세제 냄새’라고 묘사했다.

고수와의 첫 대면은 2007년 중국을 여행하던 중에 이뤄졌다. 시퍼런 고수 이파리를 무심코 씹었는데, 뿜어져 나온 ‘퐁퐁’ 향이 입안에서 사라지지 않을 때의 당혹감. 지역 고유의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마음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벽이었다.

베트남 달랏 야시장의 쌀국수. 경향신문 자료사진

이후 낯선 음식을 접할 때마다 고수가 들었는지를 확인하게 됐다. 해외가 아닌 국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의외의 음식에 복병처럼 고수가 있었다. 멕시칸 식당에서 시킨 부리또에서 고수를 발견했을 때 느낀 배신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래도 ‘노 코리앤더(고수 넣지 마세요)’가 한국인 여행자의 기초 회화에 사실상 포함돼 있다기에 ‘나만 그런 건 아니구나’ 싶어 괜히 마음을 놓았다.

‘처음에는 고수를 받아들일 수 없었으나 먹기 위해 여차저차 노력한 결과 지금은 고수 없이 동남아 음식을 못 먹는다.’ 고수를 영접해 새사람이 됐다는 이들의 이런 간증이 차고 넘쳤지만, 나에겐 별 관심 없는 얘기였다. 해외를 다닐수록 익숙해진다고도 하던데, 해외에서도 얼마든지 고수 없는 음식을 먹을 수 있더라는 경험만 늘어갔다.

‘고수며들었다.’ 그 순간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베트남 쌀국수집에서였다. 빨간 국물로 해장을 하다가 한번 크게 앓은 뒤로 해장용으로 흰 국물의 탕·국이나 쌀국수를 자주 찾던 시기였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고수를 듬뿍 따로 담아 한 접시를 내줬다. 안 넣어 먹으면 그만인데 그날따라 괜히 호기심이 생겼다.

신선한 고수. 언스플래시 Tomasz Olszewski

고수를 ‘한 움큼’은 차마 못 집겠고, 쌀국수를 큰 한 젓가락 움푹한 숟가락에 담은 뒤 고수 이파리 하나를 슬며시 얹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응? 괜찮은데? 고수를 먹을 때 괴로움은 특유의 세제 향이 입안에서 사라지지 않을 때 실현되곤 하던데, 이번에는 목구멍으로 국숫가락을 넘기고도 고수를 입에 넣은 사실을 잊었다. 향이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러고 보니 직전에 멕시칸 음식점을 갔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그제야 모든 게 명징해졌다. ‘내가 파슬리를 고수로 착각했나 보다’ 싶었지만, 나는 이미 고수에 적응해 있었던 것이다.

고수 근처에도 안 가려던 사람이 어떻게 그런 변화를 겪었을까.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자주 먹어온 ‘쌀국수’가 열쇠였다. 쌀국수의 국물을 우려낼 때 고수 씨앗이 들어간다고 한다. 씨앗은 이파리만큼 강한 향을 내지는 않지만 향신료로 동남아와 유럽에서 널리 쓰인다고 했다. 즐겨 마시던 밀맥주에 고수 씨앗이 향신료로 들어간다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고수 씨앗. 언스플래시 Goh Rhy Yan

고수를 싫어하는 사람도 이렇게 고수와의 접촉면을 늘려나가면 좋아하게 될 수도 있다는 설명을 어디선가 봤다. 수긍이 갔다. 맛의 길을 고고하게 수행하는 사람처럼 ‘인고의 시간’을 견디지 않더라도 고수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아직 고수를 ‘듬뿍’ 넣어 먹지는 않는다. 섣부른 도전이 식사의 즐거움을 망치는 게 두렵다. 하지만 다음에 고수가 지천으로 널려있는 나라에 가게 된다면, 조금 넓은 미각으로 그 동네 음식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고 슬며시 기대해 본다.

샛강육수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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