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꼰대들의 대학, 환골탈태하라

염한웅 |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포스텍 물리학과 교수

일본 도쿄대에서 조교수를 하던 1997년, 공동연구를 위해 과학 선진국인 스위스에서 한 달, 그리고 스웨덴에서 반년을 체류하며 문화충격을 경험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는 대학원생·연구원·교수가 크게 다르지 않은 연구실을 사용하고, 같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다. 같은 휴게실에서 차를 마시고 토론하고 대부분 오후 5시 정도에 칼퇴근한다. 처음에는 이렇게 연구해서 어떻게 좋은 성과를 내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지만 실제로 매우 뛰어난 연구를 하는 곳이었다.

염한웅 |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포스텍 물리학과 교수

염한웅 |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포스텍 물리학과 교수

그로부터 20여년이 흘렀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을 맡아 기초연구를 확대하고 연구자 중심의 연구제도를 만들어 젊은 과학자를 육성하자고 외친 지 4년째다. 하지만 이공계 대학원생들이 과학을 좋아하고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에는 큰 진전이 없다. 오랜 시간 동안 징그럽게도 변하지 않고 발전이 없는 곳이 대학이다.

학생·연구원·교수를 나누는 권위적인 문화는 여전하다. 연구제안서며 보고서를 학생에게 맡기는 교수들도 아직 주변에 널려있다. ‘월화수목금금금’이 일상인 연구실은 부지기수인 데 반해 학생들에게 정해진 휴가를 보장해주는 연구실은 별로 없다. 외국인 유학생들이 가족을 만나러 귀국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할 정도다. 대학원생들의 연구 공간을 가보면 좁고 열악함에 아연할 때가 많다.

이뿐이 아니다. 학생들이 연구비 정산 같은 행정업무를 하고, 학위 주제와 관계없는 프로젝트, 심지어 사적인 업무에도 동원된다. 적절한 지도를 받지 못하고 방치되는 학생도 여럿 있으며, 언어폭력뿐 아니라 성희롱·성폭행을 당하기도 한다. 학생에게 주는 인건비를 연구실 운영비로 쓰거나 사적으로 편취하는 교수들도 없어지지 않는다.

나 스스로도 대학원을 다니며 치를 떨었고 다시 돌아오고 싶지 않았던 1990년대 초반 대학원의 모습과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다. 몇 년 전 교수평의회 의장을 하며 이런 문제를 제기하고 교수사회 내부에서 자정 노력을 촉구해도 관심을 갖는 교수들이 별로 없었다. 익명 게시판에 막말로 비판을 하는 교수들도 있었다.

한국 대부분의 교수들이 공부한 미국의 대학에는 학생에 대한 교수들의 부당한 행위를 엄하게 처벌하고 학생을 보호하는 대학 차원의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 앞서 언급한 유럽 과학 선진국들의 경우는 학생을 근로기준법으로 보호하며,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교육당국과 국가가 즉각 개입할 수 있다.

2년 전 이탈리아에서 스위스로 스카우트된 유명 과학자가 대학원생을 비인격적으로 지도하자, 교육당국이 지도행위를 즉각 중지시키고 해당 과학자와 연구소에 대한 조사를 벌인 바 있다. 과학자는 파면됐고 연구소는 중징계를 받았다. 최근에는 성차별적인 행정이 지속되어 당국의 조사를 받고 연구소 자체가 폐쇄된 스위스의 또 다른 사례도 있다. 한국에서라면 아무도 징계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대학을 운영하는 당국과 대학교수들에게 묻고 싶다. 이런 반인간적이고 반교육적이며 심지어 범죄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에 어떤 부모가 자녀를 보내고 싶어할 것인가. 어떤 창의적인 인재들이 스스로 배움을 찾아오려고 할 것인가. 권위주의적인 갑질문화 속에서 어떻게 창의적인 생각이 자란다는 것인가. 대학은 변화에 대한 의지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대학과 정부는 대학원생들이 정상적으로 교육받고 연구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부당한 대우를 받은 학생들을 보호하는 강력한 시스템이 필요하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에서도 촉구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건강한 연구실 문화 확립에 나선다고 하지만 알맹이 없이 변죽만 울릴 뿐이다. 이미 외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제도들을 도입해 실천하기만 해도 충분할 텐데 말이다.

과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대학에서 창의적이고 수준 높은 연구가 이루어지길 간절히 바란다. 교권이란 좋은 교육을 할 수 있는 권리이자 의무이지, 나쁜 교육을 강요하면서 침해받지 않을 권리가 아니다. 대학이 구시대적인 권위주의를 버리고 창의적인 인재들에게 매력적인 곳이 되길 바란다. 이것이 인공지능(AI) 교육 확대보다 더욱 시급하고 중요하다. 꼰대들의 대학, 환골탈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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