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순간'의 고두심 "제주 오면 오솔길 돌아 놀다 가시라"
[경향신문]
고두심(70)은 늘 ‘제주 사람’이었다. 열아홉 살에 서울에 올라와 4년간 회사를 다니다가 MBC 공채에 붙어 탤런트가 돼 여의도의 별로 자리 잡았지만, 마음은 제주를 떠난 적이 없다. 소준문 감독은 영화 <빛나는 순간>에 고두심을 캐스팅하기 위해 쓴 손편지에 이런 문구를 넣었다. “고두심의 얼굴은 제주도의 풍광입니다.” 몇 달간 집 떠나 있기 싫어, 큰 스크린에 온몸이 가득 나오는 것이 싫어 영화 출연을 꺼리던 고두심이 혹하지 않을 수 없는 문구였다. “해야지. 내 몸이 부스러져도 해야지.” 고두심은 생각했다.
이 영화에서 고두심은 ‘바다에서 숨 오래 참기’ 기록을 가진 제주 해녀 고진옥으로 등장한다. 물질 잘하지만 성질 역시 파도보다 드세다. 진옥을 영상에 담기 위해 서울에서 다큐멘터리 PD 한경훈(지현우)이 온다. 진옥은 촬영에 응하지 않으려 하지만, 경훈은 끈질기게 진옥 곁을 맴돈다. 조금씩 가까워지던 둘은 서로의 마음속 상처를 이해하고 남다른 감정을 나누기 시작한다. 고두심은 최근 인터뷰에서 “해녀의 정신이 제주의 혼이다. 그 어느 배우보다 내가 해녀 역할을 잘 표현할 수 있겠다는 자부심이 있었다”고 말했다.
“해녀는 줄 하나 놓으면 생과 사를 오가지 않습니까. 사람은 숨을 쉬어야 사는 건데, 전복 하나 따려고 숨 참고 바다에 들어가고요. 척박하고 벌이가 적으니 내 손에 들어온 것은 무엇 하나 아끼려는 것이 해녀 마음이기도 합니다.”
자신감은 있었지만 언제나처럼 연기는 쉽지 않다. 특히 중학교 때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경험을 갖고 있던 고두심에게 물질 연기는 두려웠다. 과거 <인어공주>를 찍을 때도 수중 촬영을 하려다가 “얼굴이 하얘지고 머리 가죽이 깨질 듯이 아팠고, 배 밑바닥에 던져 놓으니까 노란물까지 게워낸”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결국 대역을 써야 했다. 이번엔 달랐다. “해녀를 대역으로 하려면 다른 사람이 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 악물고 연습했다. “내가 바다에 빠져도 해녀 삼춘(제주에서 손윗사람을 부르는 말)들이 건져주겠지” 하는 생각에 자신 있게 연기했다.
영화 속 제주 사람끼리의 대화 장면에선 서울 사람들은 알아듣기 힘든 방언이 나온다. 스크린에는 자막이 깔린다. 평소의 대사와는 전혀 다른 톤이었지만, 고두심은 “정말 아름답고, 육지 사람들은 못 들어본 제주 방언이 없을까” 궁리하면서 대사를 말했다고 한다. 두어 달 제주에서 촬영하면서 어린 시절 쓰던 방언을 마음껏 쓰고, 먹던 음식을 푸짐하게 먹으니 ‘연기 자체가 곧 힐링’이었다고 한다.
영화에는 진옥이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어린 시절 부모 잃은 경험을 털어놓는 장면이 나온다. 롱테이크로 촬영된 이 대목에서 진옥은 4·3 당시의 처절함과 슬픔을 토로한다. 고두심은 “그 신을 찍어 놓고 ‘내가 해냈네’ 하는 심정이었다”고 돌이켰다. “감독님이 대사를 다 준 게 아니라 내가 이어서 했어요. 감독님도 놀라서 ‘컷’을 못 내고, 스태프들이 모두 울먹울먹하고…. 무당에 신내린 것처럼 말이 나오더라고요. 이 영화를 통해 4·3의 아픔이 조금이라도 위로받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빛나는 순간>에는 제주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두루 담겼다. 해녀들이 물질하는 검푸른 바다, 원시성을 간직한 울창한 숲, 벽 타고 물방울 떨어지는 동굴…. 빛나는 풍경 사이로 제주 날씨처럼 변화무쌍한 사랑의 감정들이 출렁인다.
“제주도는 안 변하면 좋겠어요. 다른 지방처럼 큰 건물 올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제주도에 놀러와 관공서에 서류 떼러갈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길을 크게 뚫어요. 오솔길 그대로 두고 빙글빙글 돌아 걸어 놀다가면 좋겠어요.”
백승찬 기자 myungworry@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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