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는 워털루 전투를 다룬 글에서 이렇게 적는다.
“운명은 이상한 변덕에 사로잡혀 아무에게나 자신을 맡기기도 했다. 그리고 이것은 세계사에서 가장 놀라운 순간들이기도 했다. 운명의 실이 아주 보잘것없는 사람의 손에 떨어지면 (…) 태풍 앞에서 행복해하기보다는 파랗게 질려 벌벌 떨면서 자신의 손에 쥐어진 운명의 실을 놓아버린다. (…) 위대한 것이 하찮은 것에 자신을 내주는 일은 겨우 1초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정제혁 정책사회부장
지난주 국민의힘 전당대회에서 36세인 이준석이 대표로 선출되는 것을 보고 이 구절을 떠올렸다. 적어도 지금 ‘별의 순간’에 가장 근접한 이는 윤석열도 다른 누구도 아닌 이준석이다. 한 세대의 퇴조와 새로운 세대의 등장, 보수의 재구성과 나비효과, 극단적 진영정치의 해체 내지 완화, 진보하는 보수와 보수하는 진보의 공수 전도를 알리는 서막일 수 있겠다 싶다. 이준석이 그것을 감당할 그릇이 되는지, ‘태풍 앞에서 행복해’할지 아니면 ‘파랗게 질려 벌벌’ 떨지 지켜볼 일이지만, 우연이건 노력의 결과이건 시대의 배역을 맡을 기회가 그에게 주어진 것만은 분명하다.
이준석 현상은 2030세대의 자기정치 선언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한국만큼 세대론이 정치사회적 분석틀로 애용되는 곳도 드물 것이다. 6·3세대, 민청학련세대, 86세대, 엑스세대, 88만원세대, 3포세대 등 세대론이 대략 10년 주기로 발흥했다. 이들 가운데 제도정치에서 직접 지분을 행사한 것은 86세대까지이다. 그 이후 세대는 제 목소리를 스스로 내기보다 위 세대의 누군가에게 의탁해 발언해 왔다. 안철수 현상이 그랬고, 김난도의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그랬다.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멘토의 시대는 갔다. 아름답고 훌륭한 말,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 전략적으로 정연하고 전술적으로 기민한 말로 청년들을 위무하고, 격려하고, 가르치던 멘토들의 맨얼굴이 드러났다. 멘토가 죽은 시대에 젊은층이 제 세대에서 대리인을 찾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역할자로 선택된 것이 이준석인데, 이것이 ‘이준석 현상’과 ‘안철수 현상’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젊은 세대의 자기조직화라는 면에서, 대기업 젊은 사무직 노동자들이 양대노총과 무관한 독자 노조를 결성하는 흐름과도 맥이 닿는다.
이준석 현상에서 확인되는 건 보수세력의 강력한 집권의지이다. 이준석은 대구·경북 유세에서 ‘박근혜 탄핵’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박근혜 사면론도 꺼내지 않겠다고 못을 박았다. 그런데도 보수층은 그를 택했다. 정권을 바꾸기 위해 육참골단의 전략적 선택을 한 것이다. 2002년 대선 때 호남 유권자들이 단기필마의 노무현을 단박에 끌어올린 것과 다르지 않다.
이준석은 당대표 출마선언, 선거 유세, 당대표 수락 연설에서 ‘민주주의’ ‘공존’ ‘극단주의와의 결별’을 키워드로 제시했다. 정치와 사회의 합리화를 위한 최소한의 기준을 제시한 데 그친 감이 있지만, 아직 냉전적 수구보수의 틀을 벗지 못한 국민의힘은 물론 극단적 진영 대결이 판치는 한국 정치에서 제법 울림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능력주의자인 이준석은 강자의 시각, 승자의 시각에서 세상을 본다. 젊은층 상당수는 비정규직, 플랫폼 노동자이고, 노동현장에서 산업재해로 사람이 매일 죽어나가지만 이준석이 발언하는 걸 들은 기억이 없다. 중산층 가정의 아이들이 실력대로 성적을 겨루었다는 목동 중학교 시절의 경험세계에 머물러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20대 남성의 여성혐오 시류에 편승한 혐의도 있다. 이준석을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에 빗대는 게 과장만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이준석의 ‘콘텐츠’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준석은 선수가 아니라 플랫폼이다. 기의가 아니라 기표이고, 강령이 아니라 깃발이다. 그 깃발에는 ‘세대교체’ ‘정치교체’ ‘정권교체’와 같은 단어가 어지럽게 섞여 있을 것이다.
여당이 ‘조국의 시간’ 앞에서 머뭇대는 사이 보수세력은 역대급 세대교체를 일거에 단행했다. 나이 든 진보와 젊은 보수의 대결이라는 미증유의 구도가 만들어졌다.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곤혹스러운 처지에 몰린 더불어민주당 의원 상당수가 학생운동·환경운동·여성운동 출신 86세대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국의 시간’으로 ‘이준석의 시간’에 맞설 것인가. 내년 대선은 물론 향후 30년의 정치가 달린 문제일 수 있음을 민주당은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