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임은 그레타 툰베리의 것만이 아닌 걸

김한솔 기자

스웨덴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 다큐 개봉

바삐 길을 가던 백발 노인이 아침부터 길거리에 책가방을 놓고 쪼그려 앉아있는 15살 소녀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학교에 가야지.” “미래가 없는데 배워서 뭐해요.” “배워야 미래도 바꿀 수 있단다. 청소년의 본분은 배우는 일이잖니.” “그렇군요.”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구나.” 노인은 고개를 흔들고 가던 길을 마저 간다. 그대로 앉아있는 소녀의 옆엔 흰 바탕에 ‘SKOLSTREJK FÖR KLIMATET(기후를 위한 학교 파업)’라고 적힌 큼지막한 플래카드가 놓여 있다. 소녀의 이름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다.

스웨덴의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에 관한 다큐멘터리 영화 <그레타 툰베리(I Am Greta)>가 다음주 개봉한다. 감독인 나탄 그로스만은 그레타가 스웨덴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기후위기를 선거의 핵심 의제로 올릴 것을 요구하며 홀로 시위를 하던 때부터,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유엔 기후 정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보트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하기까지의 1년 간 여정을 영화에 담았다.

스웨덴의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가 스웨덴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기후위기를 선거의 주요 의제로 올릴 것을 요구하는 결석시위를 벌이고 있다. 영화사 진진 제공.

스웨덴의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Greta Thunberg)가 스웨덴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기후위기를 선거의 주요 의제로 올릴 것을 요구하는 결석시위를 벌이고 있다. 영화사 진진 제공.

“당신들은 우리를 실망시키고 있어요. (중략) 당신들은 우리의 말을 듣고 있고, 또 (기후위기의) 긴급함을 이해하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난 아무리 슬프고 화가 나더라도 그것을 믿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당신들이 정말로 이 상황을 이해하고도 행동하지 않고 있는 것이라면, 당신들은 악마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에요.” (2019년 유엔 기후정상회의 연설 중)

그동안 화제가 됐던 그레타 툰베리의 연설을 떠올리면, 영화 역시 불꽃이 튈 것 같다. 하지만 영화는 대체로 건조하다. 그레타 툰베리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환경운동가지만, 이 영화에는 오랜 시련을 겪은 주인공이 마침내 다수의 지지를 얻고 성취를 해내는 영웅적 서사는 없다. 오히려 그가 해양오염 관련 비디오를 보고 충격에 빠져 1년 간 우울증과 거식증, 선택적 함구증을 겪었으며, 혼자 결석시위를 하는 것을 통해 기후위기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을 마치 영화 진행을 위한 ‘정보 전달’처럼 짧고 건조하게 다룬다.

영화 ‘그레타 툰베리(I Am Greta)’의 주인공 그레타 툰베리. 영화사 진진 제공.

영화 ‘그레타 툰베리(I Am Greta)’의 주인공 그레타 툰베리. 영화사 진진 제공.

사실 드라마틱한 서사를 연출해내기엔 그레타 툰베리가 적합한 주인공도 아닐 것 같다. 그는 영화 내내 거의 무표정하다. 혼자만 앉아있던 국회 앞에 다른 청소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을 때도, 폴란드에서 열리는 유엔 회의에서 연설을 해달라는 요청을 처음 받았을 때도, 유엔에서 몇 년을 일해도 얼굴 한 번 보기 어렵다는 유엔 사무총장 옆에 앉게 되었을 때도, 교황과 만났을 때도, 그는 어쩌다 잠깐 미소를 지을 뿐 대체로 무표정하다. 오히려 연설을 하러 간 유엔 회의장 식당에 비건 메뉴가 쌀과 불구르(밀을 찌고 말려 부순 것) 뿐이라는 것에 못마땅해할 때 더 감정이 잘 드러난다. 그런 그에게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같은 정치인들, 극우 매체가 공격을 위해 하는 말들이 ‘언론의 귀염둥이 공주님’ ‘감정과잉에 불안정하고 우울한 소녀’ ‘정신나간 아스퍼거 환자’ 같은 것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기후위기를 부정하는 것 자체가 총체적으로 잘못되었음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 같다.

영화에는 그가 극적인 감정 표현을 하는 장면이 두 개 있다. 하나는 교황과 함께 찍힌 사진에서 자신의 표정이 우습게 나온 것을 보며 배를 잡고 웃을 때이고, 다른 하나는 연설 중 울음이 터졌을 때다. 그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 기후정상회의에서 기후위기로 인해 비옥한 토양이 부식되고, 멋지고 근사했던 숲들이 파괴되고, 바다가 산성화되는 현상을 언급하다 감정이 북받친다.

그레타 툰베리(가운데)가 전세계 청소년들과 함께 ‘기후를 위한 결석시위’에서 행진하고 있다. 영화사 진진 제공.

그레타 툰베리(가운데)가 전세계 청소년들과 함께 ‘기후를 위한 결석시위’에서 행진하고 있다. 영화사 진진 제공.

불과 1년 만에 전세계 ‘환경의 아이콘’이 되었지만, 그는 영화 내내 자신이 부각되는 것을 경계한다. 결석시위를 하러 온 그를 보러 수만의 인파가 몰렸을 때, “모두 당신을 보기 위해 이렇게 나왔어요”라고 추켜세우는 말을 듣자 “아니요. 자기 자신과 모두를 위해 모인 거예요” 라고 선을 긋는다. “모두 똑같이 기여하는 게 이 운동의 장점이죠. 제가 주목받을 필요는 없어요” 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자신이 처음 시작한 결석시위가 전세계로 확산되었을 때도 “결석시위를 몇 명이 하든 그건 상관없어요. 중요한 건 배출량이 줄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당장 그래야 한다는 거죠” 라고 한다.

그는 영화 내내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기후위기는 실재하며, 그것은 무려 30년 전부터 과학적으로 증명된 사실이고, 지금 당장 기후위기에 대응해 행동해야 한다고. 그의 연설을 듣고도 ‘유럽 내 변기 규격을 통일하면 에너지를 아낄 수 있다더라’ 같은 말을 하는 책임자들 앞에서도, 그는 목소리 높여 항의를 하는 대신 쓰고 있던 헤드셋을 조용히 뺄 뿐이다. 그리고 이내 이렇게 말한다. “같은 말을 또 하고 또 해야지, 모두가 이해할 때까지.”

영화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과도한 관심, 그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그의 모습도 조명한다. “중요하고 시급한 일인 건 알지만, 책임감이 너무 커요.”, “책임감으로 어깨가 너무 무거워요.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닌데, 감당하기에 버겁고 온종일 매여 있어요.” 그런데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걸까. 소음이 너무 심해 헤드셋을 써야만 버틸 수 있는 보트에서 “평범하고 규칙적인 일상생활이 그립다”고 우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의문이 든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자기도 ‘하고 싶어서 하는 것도 아니라면서’ 어째서 콩 통조림과 비건 파스타 수십개를 싸들고 차와, 기차와, 보트를 얻어타고, 바다를 횡단하면서까지 목소리를 내려 최선을 다할까. 그레타는 영화 말미에 답을 내놓는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고 무리 안에서 각자의 역할을 합니다. 생존을 위해 서로에게 의지하죠. 위협을 발견하게 되면 위험 경보를 울릴 책임이 있어요. 그렇게 보면 이 문제는, 제 책임처럼 느껴져요.” 하지만 그 책임은 그레타 툰베리의 것만이 아니다. 17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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