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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화해위, 이춘재 사건 '누명' 피해자 27명 조사 개시…9명은 장애인·미성년자

조문희 기자

1990년 11월, 이모군(당시 17세·이하 당시 나이)은 경찰로부터 자신이 9차 이춘재 연쇄 살인 사건(일명 화성 사건)의 용의자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9차 사건은 1990년 11월15일 화성 태안읍 병점리 야산에서 14세 김모양이 성폭행을 당하고 살해된 사건이다. 당시 이군은 서울 구로경찰서에 강도 예비 음모 혐의로 검거된 상태였다. 별개의 사건이었지만, 경찰은 이군의 주거지가 화성이고 청바지 안에 여성의 머리카락 1올과 야산에서 묻은 것으로 보이는 솔잎·가랑잎 등을 발견했다며 이 사건과 연결지었다. 이군의 손가락 밑에서 혈흔이 발견되고 목 뒤 손톱으로 할퀸 듯한 흔적이 있다는 것도 용의자로 지목된 근거가 됐다. 경찰은 이군에게 자백을 강요했다. 하지만 이군은 이후 9차 사건 발생 당일 수원역에서 구로역을 향하는 전철표가 발견되면서 알리바이가 성립돼 혐의를 벗었다.

27일 경향신문이 사건 관계인 등을 취재한 결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화성 등지에서 이춘재가 저지른 연쇄살인사건과 관련해 그간 알려지지 않은 누명 피해자들의 사연을 조사하고 있다. 이춘재 연쇄 살인 사건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이춘재가 경기 화성 등지에서 저지른 14건의 살인 사건을 말한다. 8차 사건 범인으로 몰려 20년 간 옥살이한 윤성여씨가 지난해 말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누명을 쓰고 고문·자백강요 등 강압수사로 고통받은 시민은 윤씨 외에도 많았다. 진실화해위는 현재까지 7건의 진상규명 요구를 접수해 총 27명의 피해를 조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12월 경기 수원시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재심 청구인 윤성여씨가 무죄를 선고받고 법원 청사를 나와 꽃다발을 받고 환하게 웃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해 12월 경기 수원시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이춘재 연쇄살인 8차 사건 재심 선고공판에서 재심 청구인 윤성여씨가 무죄를 선고받고 법원 청사를 나와 꽃다발을 받고 환하게 웃고 있다. 연합뉴스

경향신문이 27명의 목록을 분석한 결과 9명(중복 포함)이 장애인이거나 미성년자였다. 경찰은 1990년 말 9차 사건 용의자로 언어 장애인 박모씨(49)를 연행했다. 박씨는 당시 피해자 김모양의 인근 마을에 거주하고 있었다. 경찰은 박씨의 얼굴에 손톱으로 할퀸 자국이 있고 무릎이 까져 있으며 가슴에도 찔린 상처가 있다는 이유로 혐의를 추궁했다. 김모군(18)도 9차 사건 용의자로 강압수사를 당했다. 김군은 1990년 12월7일 회사원인 형과 함께 경찰에 붙잡혀 화성의 한 호텔로 끌려갔다. 형은 다음날 풀려났지만 김군은 한 여인숙으로 옮겨져 머리를 벽에 찍히는 등 폭행을 당했다. 양팔은 뒷짐을 지고 머리와 발로만 바닥을 지탱하게 하는 가혹행위인 ‘원산폭격’을 당하고 몽둥이로 머리와 다리 등을 맞았다. 경찰은 김군의 어머니가 항의하자 김군을 풀어줬다.

연관없는 사건에 연루됐거나 전과가 있다는 이유로 용의선상에 오른 사람도 7명(중복 포함) 있었다. 박모군(19)은 이춘재가 저지른 청주 여공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경찰에 의해 지목됐다. 당시 절도 혐의로 조사를 받던 그는 경찰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 경찰은 그를 잠도 재우지 않으며 폭행했다. 거꾸로 매달아 얼굴에 수건을 씌운 채 짬뽕 국물을 붓기도 했다. 박군은 ‘강간치사로 들어가서 몇 년 살다 나오면 된다’는 경찰의 회유에 범행을 거짓 자백했다. 이후 법원은 증거 부족 등을 이유로 박군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단독]진실화해위, 이춘재 사건 '누명' 피해자 27명 조사 개시…9명은 장애인·미성년자

범인이라는 소문이 돌았거나 현장 근처에 있었다는 등 이유로 조사받은 사람도 8명에 달했다. 6차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황모씨(20)는 동료에게 ‘내가 화성사건의 진범’이라고 말한 점이 체포의 이유였다. 경찰은 황씨를 유력 용의자로 단정하고 자백을 강요했다. 또다른 김모씨는 6·7차 사건 당시 무직자인데 사건 현장 주위를 배회했다는 이유로 경찰에 연행됐다. 왼쪽 무릎에 피를 흘리며 현장 주변을 배회했다는 이유로 끌려간 사람도 있었다. 한 재미교포가 꿈에서 계시를 받아 지목했다는 이유만으로 경찰 조사를 받은 사례도 있다.

강압수사는 일부 시민의 목숨을 앗아갔다. 16세 명모군은 1988년 수원 화서역 여고생 강간·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돼 경찰의 고문을 받았다. 화서역 사건은 1987년 12월24일 여고생 김모양(18)이 실종됐다가 이듬해 1월 화서역 인근 논에서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다. 당시 성당에서 6200원을 훔친 혐의로 수원경찰서에 연행됐던 명군은 여고생을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경찰의 ‘비행기 태우기’(몸을 포승줄로 묶고 공중에 매달아 돌리는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한 후 자백했다. 명군은 이후 뇌사 상태에 빠졌다가 숨졌고, 고문 연루 경찰들은 독직 및 폭행치사 혐의로 징역 1~6년의 실형을 살았다.

지난 1988년 2월19일자 경향신문엔 명노열군(16)이 경찰에 고문받아 뇌사상태에 빠졌다가 끝내 숨졌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지난 1988년 2월19일자 경향신문엔 명노열군(16)이 경찰에 고문받아 뇌사상태에 빠졌다가 끝내 숨졌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있었다. 30대 차모씨는 1990년 9차 사건의 용의자로 몰려 경찰에 연행됐다. 당시 주민 진술에 따르면 차씨는 경찰 조사를 받고 풀려나온 뒤 “나는 억울하다” “누가 나를 죽이려 한다”는 내용의 고함을 치는 등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경찰 조사 이후인 그해 12월18일 화성 병점역 인근 열차 건널목에서 운행 중이던 열차에 몸을 던졌다. 10차 사건의 용의자 장기영씨(33)는 절도전과를 가진 데다 추행혐의로 입건된 적이 있어 경찰의 의심을 받았다. 조사를 받던 중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달아난 장씨는 한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했다.

경찰이 사건 연관성이 의심될 때 조사를 진행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당시 경찰은 용의자로 의심되는 시민들을 불법적으로 연행하거나 고문·폭행했으며 자백을 강요했다. 27건 중 최소 17건(중복 포함)에서 자백 강요 정황이 나타났으며, 폭행·수면방해 등 강압수사가 16건에서 이뤄졌다. 임의동행, 불법구금 정황은 11건에서 엿보였다.

진실화해위는 이 사건 조사 개시 이후 피해자 접수가 대거 이뤄질 것을 기대한다. 이 사건 당시 2만여명 시민이 수사기관의 용의선상에 올랐기 때문이다. 그 중 약 3000여명은 영장도 없이 임의동행 등 방식으로 끌려가 조사를 받았다. 노태우 정부 시기 진행된 이른바 ‘범죄와의 전쟁’도 수사기관의 무분별한 강압수사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진실화해위 관계자는 “피해 접수가 늘어나면 당시 검경의 강압수사 등 원인과 진상을 지금보다 더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실화해위는 출범 이후 현재까지 이 사건 피해자 등의 진상규명 요청을 접수해왔다. 이춘재 사건은 앞서 지난 1월 박준영 변호사, 김칠준 변호사 등이 진실화해위에 진상규명을 요청했다. 당시 접수된 피해자는 윤성여씨와 9차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돼 허위자백을 했다가 풀려난 윤동일군, 이 사건의 피해자였지만 당시 수사 경찰이 시신을 은폐해 30년 동안 실종 상태였던 김현정양 등 3명이었다.

진실화해위는 이춘재 사건 외에도 형제복지원, 선감학원, 서산개척단, 실미도, 삼청교육대 등 인권침해 사건을 이날부터 조사한다. 조사 대상엔 울산과 충북 보도연맹 사건, 화순 민간인 희생 사건 등 광복 후 한국전쟁 시기까지 이어진 민간인 집단 사망·실종 사건도 포함됐다. 가장 많은 접수가 들어온 사건은 형제복지원과 서산개척단 사건이며, 1989~1990년 자행된 전교조 탄압 사건이 뒤를 잇고 있다. 법으로 보장된 진실화해위 조사 기간은 3년으로 이날을 기준으로 적용되며 필요에 따라 1년 연장도 가능하다. 진실규명 신청은 출범일 기준 2년 뒤인 2022년 12월9일까지다.

지난 1990년 12월27일자 경향신문엔 윤동일군(19)이 전날인 26일 2차 현장검증에서 “나는 김양을 죽이지 않았다”며 자백을 번복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지난 1990년 12월27일자 경향신문엔 윤동일군(19)이 전날인 26일 2차 현장검증에서 “나는 김양을 죽이지 않았다”며 자백을 번복했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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