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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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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상한 일상에 적의를 품었다

10년간 최대 9평 이하 집에 살아가면서 터득한 체념과 감사
등록 2021-05-25 16:40 수정 2021-05-27 01:55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일러스트레이션 김대중

2019년 9월 청년 임대주택을 둘러싸고 온라인 논쟁이 벌어졌다.  
한 이용자가 남긴 트위트가 논쟁의 불씨를 댕겼다. “청년주택을 살펴보았다. 결국은 다 5평(16㎡) 내외의 원룸. ‘사회 초년생이니까’ ‘시세보다는 저렴하니까’ 등의 말 중 어느 것도 우리가 좁고 작은 방에 살아도 ‘괜찮은’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공공임대주택은 보통 1인가구의 최저주거기준 주거면적 14㎡(약 4.2평)을 기준으로 지어진다. “열심히 일해서 더 좋은 집으로 이사가라.” “돈 모아서 가정 이루고 더 나은 곳에 살면 되지.” 비난이 잇따랐다. 
좁은 방은 인생의 한때 잠시 거쳐가는 ‘임시 거처’로 여겨진다. 하지만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를 뜯어보면, 청년 세대(25~34세)의 원룸 거주 기간은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한겨레21>이 만난 독립 1~14년차 2030대 청년들도 1~2년마다 이사하며 3~10평 방을 맴돌지만 언제 이 ‘방’을 탈출해 ‘집’으로 옮겨갈 수 있을지 가늠하기 어렵다고 했다. 
부동산 가격 상승과 장기적인 저금리가 맞물려 이어진 ‘영끌’ 대란도 부모님 지원을 받는 상위 20%의 이야기일 뿐이고, 월세→전세→자가로 이어지는 주거사다리는 무너졌다. 방에서 방으로 떠돌며 주식과 코인의 구원을 기다린다. 방탈출 게임을 언제까지 지속해야 할지 아무도 기약할 수 없다. 늘어나는 건 체념이다. 
그래서 청년들은 <집이 아니라 방에 삽니다>라며 현실을 자조하고 <6.5평 월세방을 짝사랑하는 일>이 얼마나 고된지 털어놓는다. ‘#방말고 집에 살고 싶다’ 페이스북 페이지를 개설해 방을 다 차지하는 ‘반려 건조대’와 사는 일, 재택근무 화상회의 때 마땅한 뒷배경을 찾지 못해 애를 먹었던 일을 공유한다. 2021년 청년들의 주거사다. 

*필자는 한겨레신문사가 주최한 ‘한칼 공모’에 당선돼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그의 책 <6.5평 월세방을 짝사랑하는 일> 내용을 일부 포함합니다.

졸업 뒤 살 집을 구해야 했다. 부동산중개업소 4곳을 돌고 수십 개의 집을 봤다. 음식점과 술집이 즐비한 대학 중심가 쪼개기 원룸에 55만원을 내고 사느니, 10만원을 보태 중심에서 살짝 멀어진 곳의 오피스텔이 낫다고 생각했다. 기숙사보다 더 좋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더 좋은 곳으로 가려면 10만원은 투자라 생각했고, 그 암시가 선택에 한몫했다. 그렇게 7.5평 오피스텔에 들어갔다.

그 오피스텔을 생각하면 진절머리가 난다. 집은 조금 넓어졌을지 몰라도 벽간 소음이 끔찍했다. 한 집 옆에 바로 한 집, 그 옆에 또 다른 집이 있는 오피스텔 건물 구조를 생각하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당시엔 순진하게도, 거기 있는 집들이 ‘집’과 ‘집’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단단한 벽으로 나뉜 줄 알았다. 실상은 집이 아니라 ‘방’과 ‘방’이라고 해야 마땅한 수준이었다. 방에서 ‘누구야’ 부르면 다른 방에서 대답할 수 있는 것처럼 나도 충분히 옆집 말에 대답할 수 있었다.

한 집에서 부르면 다른 집에서 대답하는

들리는 것은 생각보다 많았다. 옆집은 엄마, 아빠, 아들이 사는 3인 가족이었다. 엄마는 아들의 수학 공부를 봐주고 아빠는 저녁에 들어온다. 아들은 부모에게 가끔 짓궂은 장난을 친다. 엄마는 아들에게, 원통 넓이 구하는 공식을 지난번에 알려줬는데 왜 까먹냐고 호통치고 아들은 그 호통에 맞서 소리를 지른다. 아빠는 화장실 문을 열고 씻는 습관이 있어 엄마가 문을 닫으라고 말한다. 어떤 날은 함께 텔레비전을 보며 떠들고, 어떤 날은 결혼식 영상을 보며 웃는다. 그들이 나누는 말이 벽을 타고 우리 집으로 흘러들었다. 나는 한 가족의 매일을 알게 된 셈이다.

이런 가정의 모습은 그리 특별할 것도 없다. 영화에 나오는 어마어마한 뒷거래 현장을 목격한 것도 아니고,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CIA(중앙정보국)의 1급 기밀을 알게 된 것도 아니다. 그냥 어느 가정의 평범한 삶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들의 웃음과 언쟁이 시끄러워서 나는 괴로웠다. 그러면서 더 괴로웠다. 누군가의 범상한 일상이, 어쩌면 범상해서 감사할 하루가 내 적의의 동기가 되었으므로.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진 것도 없다. 옆집의 하하 호호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는 인성 파탄의 경험은 계속되고 있다.

이사하면 소음에서 벗어날 줄 알았다. 역시 순진했다. 하루는 옆집에 친구가 왔는지 웃음 한바탕이 벌어졌다. 옆집과 맞닿은 벽에 침대를 두고 누워 있던 나는 스멀스멀 떠오르는 지난날의 기억에 몸서리쳤다. 잠을 설치다가 도저히 안되어서 바닥에 요가 매트를 깔고 잤다.

생존적 방 구조 변경

다음날 ‘생존적 방 구조 변경’이 시작됐다. 살려면 잠자야 했고 잠자려면 이 소음에서 벗어나야 했다. 방음 시공은 어림없는 소리고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침대 위치를 바꾸기 위해 방을 뒤집는 일뿐이었다.

침대는 벽에서 떨어뜨린다. 벽을 막기 위해 가구를 양옆에 배치한다. 그렇다면 침대 자리는 자동으로 정해진 것이었다. 가장 포기할 수 없는 무언가를 위해 침대를 가운데 두는 비범한 선택을 해야 한다. 면적이 좁아 가로로 두는 건 무리라서 침대를 중앙에 세로로 둘 수밖에 없었다. 작은 집이 더 작아 보였지만 그게 최선이었다. 그 바람에 보일러실 문을 못 열었다. 보일러실이 옆집 벽면보다 돌출돼, 세로로 둔 침대 옆에 조금이라도 공간을 두려면 보일러실 문에 침대를 붙여야 했다.

앞으로 방 구조를 바꿀 때마다 이날의 선택이 영향을 줄 게 분명했다. 다른 건 다 포기해도 침대를 벽에 붙이는 일은 없을 테니까. 발은 몰라도 머리를 벽 쪽으로 두는 일은 절대. 내 마음대로 방을 못 꾸며도, 집이 좁아져도, 보일러실 문을 못 열어도 잠은 자야 한다.

현관에서 창문까지 편도로 열네 걸음.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분리배출을 기다리는 재활용 쓰레기가 보인다. 그 옆을 30롤이 든 두루마리 휴지 한 팩이 지키고 있다. 화장실 문 옆에 접어둔 빨래건조대는 옷걸이가 됐고, 맞은편 인덕션은 수납 선반이 된 지 오래다. 한 발자국을 가면 원형 테이블이 있다. 벽면엔 수납장이 있고, 책이 있고, 갑자기 전자레인지가 나온다. 전자레인지 앞에 침대가 있다. 전자레인지 쪽으로 머리를 두고 잔다. 다시 책이 있고, 책상이 있다. 책상을 보일러실 문에 붙여놔서 보일러실은 열지 못한다. 책상 바로 옆은 창문이다. 창문엔 수납장이 있다. 방충망이 없어서 잘 열지 않는 창문 쪽에 붙여뒀다. 나름 수납하며 살아가는데도 수납장 바깥에 놓이는 것이 자꾸 생긴다. 그것을 두기 위해 수납장을 또 사면 내가 아니라 물건들의 집이 될 거라서 그냥 집 안 곳곳에 놓고 있다. 얼마 전에야 안 사실이지만 이 집은 5평이다. 그런데 나는 6.5평이라 믿고 살았다. 자연히 내 살림살이도 6.5평을 기준에 두고 쌓였다. 1평이라도 넓게 살고 싶은 마음의 소리에 세뇌당하고 보니, 몸도 마음도 꽉 찬 삶을 살고 있다.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 꽉 찬 집이라도 괜찮았을까. 이 시국에 작은 집 살이는 괜찮지 않다. 코로나19가 작은 집의 문제점은 ‘작은 것’임을 밝혀냈다. 집이 하루의 반 이상을 쓰지 않는 공간에서 매시간을 살아내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종일 있어보니 이 집이 답답해도 너무 답답한 공간이란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코로나 시대 진정한 승자

이전까지 내가 왜 그렇게 집을 두고 밖에서 무언가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작은 집에선 쉬는 것도, 머리 쓰는 것도, 몸 쓰는 것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눈 돌리는 자리마다 물건이 들어차 있고, 창문을 열어놔도 집 안 공기는 콧바람 쐬는 수준이다. 북향이라 날 좋은 날 아침 잠깐을 빼고는 해도 안 든다. 또 왜 이렇게 습하고 더운지. 여기 5평은 바깥과 전혀 다른 세상이다. 적당한 개방감과 적당한 공간감, 나는 그런 것을 좋아했다. 이는 10년 이상을 10평 안 되는 곳에서 잠잔 사람의 저항 같은 건지도 몰랐다.

특히 집중해서 무언가를 할 때 이 상황은 고역이었다. 홀로 있다는 사실만이 집중력을 만드는 건 아니었다. 재택근무가 당연해지고 온라인수업이 일상이 됐다. 도저히 능률이 오르지 않아 도서관으로, 카페로 튀어나갔다. 그것도 잠시였다. 코로나19 상황은 더 심각해졌고 사회적 거리 두기 단계도 심화했다. 어떻게든 집에서 해결해야 했다.

공간 분리를 하라고 했다. 공간 분리를 하면 생산성에 도움이 된단다. 공간 분리는 집에서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을 얼마나 ‘완벽하게’ 분리하느냐에 성패가 달렸다. 일단 개별 공간이 있어야 하고, 그 공간을 역할에 맞게 꾸밀 수 있어야 한다. 이때 전제가 되는 게 ‘그럴 공간’의 존재다. 공간 분리는 공간이 있어서 할 수 있다는 걸 다들 잊는 것 같다. 5평의 내 방에서 공간을 어떻게 분리하든 그 옆은 침대다. 책상에 앉으면 모드가 바뀌는 거라고 스스로 다짐할 순 있어도, 시야까지 차단하긴 힘들다.

적어도 지금 상황에 한정하면 코로나 시대의 진정한 승자는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는 능력”을 갖춘 사람이다. 재택근무를 해야 하니 방 하나를 뚝딱 서재로 만드는 사람처럼, 이 상황으로 생긴 불편을 언제든 편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 말이다. 그는 지금의 ‘집콕’이 만족스러울까? 문득 부러워진다.

느린 편지를 부치지 못하는 이유

서울에서 인천 을왕리로 향하는 길에 휴게소가 하나 있다. 거기에 ‘느린 우체통’이 있었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느린 편지? 나는 괜히 신나서 동행들을 부추겼다. 언제 여기 다시 올지 모르는데 이런 이벤트를 무시할 수 없었다. 심지어 무료였다. 그러나 우리는 느린 우체통에 느린 편지를 넣지 못했다.

같이 편지를 써넣을 연인과 언제 헤어질지 몰라서도 아니고, 이런 이벤트 따위 귀찮아하는 성격들이라서도 아니다. 이유는 단순했다. 편지가 1년 뒤 배달되기 때문이다. 1년 뒤 도착하는 편지라는 느린 우체통의 존재 의의가, 그래서 더 의미 있을 그 편지의 느림이 우리에겐 구속이 됐다. 나를 포함해 그 누구도 1년 뒤 살 곳을, 그러니까 주소지로 적어넣을 곳을, 특정할 수 없었다.

매년 혹은 2년마다 임대차계약을 갱신해야 한다. 그나마 월세가 적은 곳으로 이사하거나, 돈을 모아 없는 전세를 기어코 찾아놨더니 알고 보니 반전세라거나, 이 정도면 대출해서 이자를 내자고 결심하거나, SH(서울주택도시공사)나 LH(한국토지주택공사) 누리집을 들락날락하는 일이 향후 1~2년 사이에 예정됐다.

내 집. 그게 단지 부동산이란 이유만으로 의미 있는 게 아니었다. 어딘가에 정착해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는 이랬다. 1년 뒤든, 2년 뒤든, 10년 뒤든 간에 별다른 고민 없이 주저하지 않고 미래의 집 주소를 적을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우연한 순간에 맞닥뜨리는 삶의 이벤트를 피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였다. 우리는 그 이벤트를 즐길 가능성조차 불분명했지만, 정착은 그 이벤트를 가능하게 하고 경험하게 하는 기회였다.

나는 10년간 옮겨 다녔다. 경북에서 충북으로, 충북에서 미국으로, 미국에서 태평양의 섬으로, 섬에서 서울로, 죄다 집이라기보다 방이라고 할 만한 곳에 살았다. 기숙사에 여럿이 같이 살기도 하고 혼자 살기도 했다. 머물렀다고 표현하는 게 어울리는 때도 있었다.

2011년 고등학교의 4인실 기숙사에서 2015년 대학교의 4인실 기숙사로, 2017년 2인실 기숙사에서, 같은 해 1인실로 옮기며 드디어 혼자 살게 됐다. 2014년 4평 남짓한 원룸에서 첫 자취를 했지만, 혼자 사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비록 기숙사지만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다가 맞이한 혼자만의 시간이 알게 모르게 너무 좋았던 것 같다. 통금은 있고 내 살림이란 없는 기숙사에서 벗어나면 해보고 싶은 게 많았다. 집도 꾸미고, 요리도 해 먹고, 큰 창문 옆에서 햇살 맞으며 멍때려도 보고, 친구들을 초대하고 싶기도 했다.

집이 아니라 환경에 진 빚

잔뜩 기대하며 2019년 7.5평 오피스텔로 이사했다. 현실은 손님 초대는 고사하고 어떻게 하면 짐을 좀 안 보이게 처리할까, 어떻게 하면 건강한 음식을 사 먹을까를 고민했다. 창문 옆에 앉기는커녕 어떻게 하면 맞은편 건물에서 날 못 보게 할까 고민하는 게 일상이었다. 무엇보다 낮이든 밤이든 소음 없이 조용하길 바랐다.

SH와 LH 누리집을 시간 날 때마다 도는 게 일과였다. 청년 주거 정책을 살피면서 그들이 짓는 신축 건물에 싸게 들어갈 수 있다면 정말 괜찮은 선택이라 여겼다. 결국 지원한 곳 중 하나에 당첨됐다. 막상 당첨되니 고민이 됐다. 보증금이 4500만원부터 시작인데 크기는 5평이라니. 지금보다 더 작은 평수로 이 돈을 주고 들어가는 게 맞나 싶었다. 찾아보니 서울시에서 대출금리를 지원해주는 사업이 있었다. 그걸 이용해서 대출하면 임차보증금의 90%는 은행이 대주고, 나는 연 1% 정도 금리를 부담하면 됐다.

그렇게 해서 2020년부터 지금까지, 월세와 함께 대출이자를 내며 상권 좋은 곳에 있는 새 건물의 5평에 살고 있다. 처음엔 편리하고 좋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어쩐지 내 빚은 집이 아니라 ‘집 밖의 환경’ 값인 것 같은 기분이다.

집 안은 여전히 시끄럽고, 여전히 답답하다. 이전과 다를 바 없이 방 같은 곳에 호수를 나눠 붙이고 집이라며 산다. 그런 집이 내 현주소다. 느린 편지에는 적을 수 없지만 당장의 택배를 받기 위해 써넣는 주소이자, 미래에 대한 기댓값을 줄여 눈앞의 문제 해결에 투자하는 현실. 그래서 여유나 자부심 같은 더하기의 단어 대신 포기와 상실감 같은 빼기의 단어를 안고 사는 일이다.

작은 집에 산다. 돈도 낸다. 그래도 나는 살고 있다. 작더라도 살 곳이 있고, 내 것은 아니더라도 잘 수 있는 곳이 있다. 그러니 너무 슬퍼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당장 내일은 어떻게 될지 몰라도 오늘은 누울 자리가 있다. 그 사실에 감사하는 것이 현실의 빼기를 더하기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송혜현 <6.5평 월세방을 짝사랑하는 일>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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