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이날’

5월26일 ‘그토록 무서운 살인마였을까’ 곰의 죽음을 애도하다

이혜리 기자

196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1981년 5월27일 경기 광주시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은 곰의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1년 5월27일 경기 광주시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은 곰의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마을에 나타난 곰, 수색 끝에 ‘생포 아닌 죽음’

40년 전 오늘(1981년 5월26일) 경향신문에는 <어제 이어 오늘도 광주 곰 또 나타나>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경기도 광주시의 평화로운 농촌 마을에 곰이 나타나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곰이 시민에게 처음 발견된 것은 1981년 4월 말입니다. 산에 나무를 하러 갔던 남성은 바위덩이인 줄 알았는데 곰인 것을 보고 혼비백산돼 산을 달음질해 내려왔습니다. 산나물을 캐러 산에 올라간 여성은 곰에게 허벅지를 물리고 도망쳤습니다.

그해 5월25일엔 한 주민이 한달 전쯤 설치해놓은 벌꿀통을 살펴보기 위해 산에 올라갔다가 벌꿀통 앞에 앉아있는 곰을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습니다. 20여명의 경찰과 주민들은 함께 산으로 올라갔는데 벌꿀통 주위에는 벌들이 죽은 채 널려 있었고 꿀은 곰이 먹어치웠는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벌꿀통 옆엔 곰의 발톱으로 할퀸듯한 자국이 있었고 풀과 나무는 부러지거나 쓰러져 있었습니다.

이 곰은 몸집은 거대했지만, 성격은 사납지 않고 오히려 온순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던져주는 먹이를 받아먹고 사람들과 마주보고 서 있거나, 종종 혼자 우두커니 앉아있는 모습이 목격됐습니다. 곰은 8번이나 시민들 눈에 띄었습니다. 경찰은 곰이 사람들을 해칠 수 있다고 보고 수색을 벌였지만 정작 찾으면 곰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래 전 ‘이날’] 5월26일 ‘그토록 무서운 살인마였을까’ 곰의 죽음을 애도하다

곰이 마을에까지 내려와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것은 동물원이 아닌 일반인들의 광범위한 곰 사육 때문이라는 비판이 나왔습니다. 한국 정부는 1980년대 초 농가소득 증대 명목으로 곰 사육을 권장하고 곰 수입을 허용했습니다. 그러면서 일부 부자들의 취미 또는 애완용으로, 곰의 쓸개인 웅담 등 값비싼 약재용으로 곰 사육이 늘어났습니다. 정작 정부는 곰 사육 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관리도 느슨하게 했습니다. 대체로 일본에서 수입한 곰들이었습니다.

심지어 경제적인 수익을 노려 서울 시내에서 곰을 사육하는 곳이 생겼습니다. 먹이가 까다롭지 않으며 사람과 친화력이 있는 등 사자나 호랑이와 달리 사육이 어렵지 않다는 게 곰 사육의 장점으로 꼽혔습니다. 서울의 집에서 곰을 기르던 50대 이모씨는 “곰이 영리하고 재롱도 잘 부려 사육이 재미있다”고 말했습니다.

경기도 광주시의 곰은 어떻게 됐을까요? 결국 이 곰은 첫 발견 한달여 만인 1981년 5월27일 경찰에 의해 사살됩니다. 경찰은 곰의 배와 가슴에 총 2발을 쐈고, 곰은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당시 현장을 취재한 기자는 “경찰이 갖춘 장비는 M16 소총, 카빈 소총, 무전기 뿐이었다”며 “곰을 체포하려는 게 아니라 곰을 사살하려는 의도가 분명했다”고 보도했습니다. 실은 곰 이야기는 당시 경향신문이 기사로 처음 쓴 것이었는데, 기자는 “차라리 보도하지 않았으면 곰이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후회의 말을 남겼습니다.

1981년 5월27일 경기도 광주시 일대에서 경찰이 곰을 수색하고 있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1981년 5월27일 경기도 광주시 일대에서 경찰이 곰을 수색하고 있는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최인호 작가는 곰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을 썼습니다. 곰을 생포해서 동물원에 보내는 등의 다른 조치를 하지 않고 즉각 죽여버린 것을 겨냥한 글입니다. 최 작가는 이번 사건을 아이들의 방에 하나씩은 꼭 있는 곰인형이 인간 세계로 걸어나와 맞이한 죽음에 비유하며, 동화와 동심을 파괴한 행위라고 했습니다.

그의 글 한 대목입니다. “신문마다 엎드려죽은 곰의 모습을 클로스업 시키고 있으며 어떤 신문은 중한 죄를 저지른 범인을 잡은 듯 총을 비껴들고 죽은 곰 곁에 의기양양하게 서있는 사진을 보도하고 있다. 왠지 그 사진을 보고 죽은 곰이 불쌍하다고 느낀 것은 비단 나 하나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 꼭 이 곰을 이처럼 죽여야만 했을까. 시벌건 대낮 3시45분에, 그토록 무서운 살인마였을까. 설혹 무서운 살인마라 할지라도 우선 우리들은 그에게 투항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 가엾은 곰에게 투항할 기회를 주었던가. (…) 살려야했다. 살려서 생포해서 동물원 우리 속에 넣었어야 했었다. 그것은 지상명령이었다. 말썽꾸러기 곰을 어떻게든 생포하려는 노력은 생명의 존엄성과 이웃을 향한 사랑의 마음과 무엇이 다를 바 있을 것인가.”

최근엔 곰이 농장에 방치되거나 도살되는 등 문제가 불거지면서 정부가 사육곰 보호시설 설치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Today`s HOT
폭풍우가 휩쓸고 간 휴스턴 개혁법안 놓고 몸싸움하는 대만 의원들 영국 찰스 3세의 붉은 초상화 총통 취임식 앞두고 국기 게양한 대만 공군
조지아, 외국대리인법 반대 시위 연막탄 들고 시위하는 파리 소방관 노조
총격 받은 슬로바키아 총리 2024 올림픽 스케이트보드 예선전
광주, 울산 상대로 2-1 승리 미국 해군사관학교 팀워크! 헌던 탑 오르기 미국 UC 어바인 캠퍼스 반전 시위 이라크 밀 수확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