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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의 일이다. 미국의 아웃도어 브랜드 ‘파타고니아’는 현지 기독교 근본주의자들로부터 공격에 시달리고 있었다. 항의 전화가 쇄도했고 불매 운동이 벌어졌다. 파타고니아가 안전한 임신중지 수술을 지원하는 비영리단체에 기부했다는 것이 공격의 이유였다.

파타고니아는 항의 전화를 받은 직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응할 것을 주문했다. “의견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런 전화를 받을 때마다 (해당 단체에) 5달러씩 더 기부하겠습니다.” 항의 전화는 끊겼고 매출 감소는 없었다. 꾸준히 성장을 거듭해 지금은 세계적인 브랜드가 됐다.

그래픽 | 이아름 기자

그래픽 | 이아름 기자

31년 전 파타고니아의 사례를 떠올린 것은 주말 사이 벌어진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어린이재단) 관련 사태 때문이다. 국내 최대 아동복지기관인 어린이재단은 2018년 10월 페미니즘 관련 행사를 주관했다는 사실이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알려지지며 후원을 해지하겠다는 등의 공격을 받았다. 최근 이른바 ‘메갈 손모양’ 찾기 사태의 연장선상에서 또다른 타깃이 됐다.

일부 누리꾼들이 문제삼은 것은 ‘2018 대한민국 시민 in 학생축제’였다. 교육부가 주최하고 어린이재단 등이 주관한 축제로 페미니즘 도서를 읽는 모임 등이 참여했다. 이들은 “아동을 위해 낸 돈이 왜 다른 데 쓰이냐”며 후원을 끊겠다는 글을 재단 홈페이지에 올렸다. 어린이재단이 여성가족부 등과 ‘성평등 도서관’ 사업에 참여한 것 등도 지적했다.

어린이재단의 반응은 파타고니아의 대응과 대조적이었다. 어린이재단은 지난 21일 홈페이지와 문제를 제기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입장문을 올려 불끄기에 나섰다. “행사 취지는 아동·청소년이 직접 참여해 아동 관점의 정책안을 개발하고 제안하는 것”이라며 “해당 단체나 모임과 관련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이 지난 21일 홈페이지에 올린 입장문.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홈페이지 갈무리.

초록우산 어린이재단이 지난 21일 홈페이지에 올린 입장문.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홈페이지 갈무리.

어린이재단이 보인 페미니즘과의 선긋기는 앞서 경찰 등 정부기관과 GS25가 ‘메갈 손모양’ 포스터에 대해 내놓은 대처와 같은 방식이다. 당시 이들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며 사과하고 홍보물을 수정했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대응이 사태를 악화시켰다고 지적했다. 실제 어린이재단의 대응에 실망해 후원을 중단하겠다며 인증하고 나선 시민들도 속출했다.

어린이재단은 입장문에서 UN아동권리협약을 언급하며 “정치·종교·인종·성별에 따른 편향성을 가지지 않고 아동의 건강한 성장을 돕기 위해 사업을 수행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성평등을 위한 사업에 선을 그을 이유는 무엇인가. 31년 전 파타고니아의 단호함이 지금도 빛을 발하는 이유다.


최민지 기자 ming@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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