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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태웅 칼럼] 뉴런의 자유결합, 선진국의 조건


박태웅 한빛미디어 이사회 의장
박태웅 한빛미디어 이사회 의장

뉴런은 뇌의 신경계를 구성하는 세포다. 인접한 신경세포들과 시냅스라는 구조를 통해 신호를 주고받으며 다양한 정보를 받아들이고 저장한다. 대뇌피질에만 약 1백억 개의 신경세포가 있다. 뇌과학의 최신 연구에 따르면 인간의 창발성의 정체는 ‘뉴런의 자유 결합’의 정도에 달려 있다. 머리의 크기나, 주름의 갯수가 아니라, 뉴런이 얼마나, 흡사 우발적으로 보일 만치 자유롭게 결합을 하는가가 창의성, 지능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숲을 걷다가, 혹은 화장실에서 문득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목욕을 하던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를 외치는 그 순간이 바로 자유롭게 풀려난 뉴런이 우발적인 결합을 한 때다. 느슨하게 풀려난 뉴런이 자유로이 이어지며 새로운 경로를 열어제친 것이다.

이런 통찰은 기업의 조직구조에도 영향을 미쳤다. 예전 조직이 군대처럼 엄격한 계층구조로 이뤄졌다면, 현대의 조직은 작은 팀들이 높은 자유도를 가지고 활발하게 협업을 하는 쪽을 지향한다. 구글, 페이스북, 넷플릭스 등 최고의 IT 회사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조직을 운영한다. 어떤 업무지시도 없이 스스로 알아서 실험을 하고, 사내 협업툴에 자신이 기획한 프로젝트를 올려 자원자를 구한다. 이들은 누구보다 빨리 실패하고, 누구보다 많이 실패를 함으로써 우발적인 성공을 보듬어 안는다. 기술의 발전이 너무 빨라 앞날을 정확히 예측하는게 어려워질수록, 조직의 자유도가 중요해진다. 조직원의 수만큼 미래를 더듬어 찾을 촉수가 늘어나기 때문이다. 집단지성도 이런 자유결합의 산물이다. 어떤 문제든 어딘가에는 전문가가 있기 마련이다. 그물망처럼 연결된 네트워크 위에서 기획없이 결합한 지성은 어떤 개인보다도 뛰어나다.

건물의 설계도 바뀐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은 공식적인 회의 시간이 아니라, 우연한 잡담에서 나올 때가 더 많다. 스티브 잡스가 세계 최고의 애니메이션 회사 픽사의 사옥을 설계한 사례는 널리 알려져 있다. 잡스는 누구나 안갈 도리가 없는 화장실을 픽사 사옥 전체에 단 한 곳만 두려고 했다. '우연한 만남과 임의적인 협력을 촉진하자’는 것이었다.

‘임산부도 있고, 그 먼 데까지 뛰어가다 유실 사고도 난다’ 이런 직원들 항의가 있어서 결국 화장실 한 쌍을 두 개 건물에 각각 설치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토이스토리’, ‘월-E’, ‘인사이드 아웃’, ‘소울’과 같은 불후의 명작들이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게 된다.

도시 설계도 마찬가지다. 지식은 한데 모일수록 증폭한다.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이 우발적인 만남을 통해 교류하는 기회를 많이 가질수록 더 큰 가치가 만들어진다. 이것을 ‘네트워크 효과’라고 부른다. 모일수록 더 커진다. 우리가 도시를 플랫폼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개도국, 중진국에서 흔히 ‘훌륭히 작동하는 대도시’가 성장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울은 그런 점에서 이 플랫폼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하는 글로벌 대도시다.

실리콘밸리의 땅값이 왜 그렇게 비싼지도 이것으로 설명을 할 수 있다. 구글, 페이스북, 애플, 트위터같이 전 세계에서 원격근무를 하는데 필요한 모든 기술력을 갖춘 첨단IT회사들이, 굳이 미국에서도 가장 땅값이 비싼 곳에 오글오글 모여 있는 것도 바로 이 우발적인 만남의 네트워크 효과때문이다. 실리콘밸리는 코로나가 퍼지기 전까지, 온오프라인에서 다양한 ‘밋업’들이 세상에서 가장 활발하게 벌어지는 공간이었다.

1996년, 한국영화의 느닷없는 황금기

한국 영화 얘기를 해보자. 1996년과 2006년 사이에 한국영화가 느닷없는 황금기를 맞는다. 96년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97년 <넘버3> <접속> <초록물고기>, 98년 <8월의 크리스마스>, 99년 <인정사정 볼 것 없다>, 2000년 <공동경비구역 제이에스에이(JSA)> <박하사탕>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2001년 <소름>, 2002년 <복수는 나의 것>, 2003년 <살인의 추억> <올드보이> <지구를 지켜라!>, 2004년 <송환>, 2006년 <괴물> 등등 지금도 이름만 대면 아~ 할 영화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다. 게다가 이들 극영화 15편 가운데 무려 8편이 감독 데뷔작이었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로 봉준호 감독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고, 같은 해 박찬욱 감독은 세번째 연출작 <공동경비구역 제이에스에이>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대체 96년도에 한국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그해에 영화 사전심의가 폐지된다. 사전 검열이 폐지됐고, 공연윤리위원회도 사라졌다.

검열이니 사전심의니 하는 것은 말하자면 이런 거다. 조영남의 ‘불꺼진창’은 왜 창에 불이 켜져 있어야지 꺼졌느냐고 금지, 이장희의 ‘그건 너’는 왜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냐고 금지, 양희은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은 왜 사랑이 이뤄지지 않느냐고 금지했다. 배호가 노래한 ‘영시의 이별’은 당시 통행금지가 밤 12신데 왜 그 시간에 헤어지냐고 금지곡이 됐다. 그러다가 사전심의가 폐지가 되고, 뉴런이 사방으로 자유결합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그래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상을 휩쓸었고, 넷플릭스 상위권을 K드라마가 채우고 있다. 일본은 TV 시리즈 10위 중 절반이 한국 드라마다. ‘사랑의 불시착’은 일본에서 229일 동안 톱 10이다. 대만은 톱 10 중 9개, 말레이시아는 8개, 베트남은 7개가 한국 드라마인 때도 있다. 리드 헤이스팅스 넷플릭스 최고경영자(CEO)가 재미있게 본 한국 드라마로 꼽은 킹덤, 사랑의 불시착, ‘사이코지만 괜찮아’, 승리호들이 끊임없이 리스트를 점령한다. 최근에는 애플도 한국진출을 서두르고 있다. 올해도 윤여정 씨가 지명되는 영화제마다 여우조연상을 타낸 끝에 봉 감독에 이어 2년 연속 아카데미상으로 화려한 매듭을 지었다.

아시아시대는 K팝처럼 온다

K-pop은 어떨까? 사실은 사전심의 폐지는 가요쪽, 정확히는 정태춘 박은옥 부부의 공이 아주 크다. 정태춘 선생은 78년 《시인의 마을》로 데뷔했는데, 이때 노래들이 한국공연윤리위원회 심의로 여러 군데가 고쳐져 데뷔 음반에 실렸다. 예를 들어 타이틀 곡 '시인의 마을'은 '나는 고독의 친구 방황의 친구' 대목이 '나는 자연의 친구 생명의 친구'로 엉뚱하게 바뀌었다. 갓 데뷔한 신인 가수 입장이라 시키는대로 하긴 했지만, 이런 경험은 정태춘 선생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충격을 안겨주었다.

결국 90년 직설적인 사회비판을 담은 <아!대한민국>을 고의로 불법 발매한 정 선생은 부인 박은옥씨와 함께 93년 10월 20일 오후 흥사단 강당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공연법과 음반및 비디오물에 관한 법률에 규정된 공륜의 사전심의를 받지 않고 새음반「92년 장마,종로에서」의 발매를 개시한다”라고 공식적으로 밝힌다. 당국의 규제를 유도해, 자연스럽게 사전심의의 부당성을 알리고 이를 계기로 사전심의 조항에 대한 위헌신청의 분위기를 조성할 목적이라는 것이다.

두 사람은 “가요사전 심의는 일제때부터 내려오는 검열제도의 잔재로 군사독재때 건전한 사회비판을 담은 가요를 칼질하는데 악용됐다, 우리나라만 고집하는 이런 가요사전심의를 문민정부하에서는 철폐해야 된다는 취지에서 불가피하게 음반 불법판매에 나서게 됐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결과는 우리가 보는 대로다. BTS는 한국말로 빌보드 1위를 몇 번이고 찍고 있고, 블랙핑크는 유튜브 뷰 수에서 압도적인 1위를 자랑한다. 빌보드, 블룸버그, 월스트리트저널이 앞다퉈 현재 전세계 1위 걸그룹은 블랙핑크라고 공인한다. 우리는 모두 정태춘 선생 부부에게 빚을 지고 있다.

<아시아시대는 K팝처럼 온다>를 쓴 작가 정호재 씨는 JYP 트와이스의 그 유명한 미나, 사나, 모모가 한국에 이미 2013년도 무렵에 건너왔다는 게 대단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그녀들의 부모님과 아이들이 한국의 시스템을 크게 신뢰했다는 얘기다.

중국이나 일본, 아시아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모두, 개인이 압도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선다. 기업과 정부에 개인이 쉽게 저항하지 못하고 자연스레 연예계 산업은 권력자들의 놀이터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정글의 법칙이 작용하는 잔혹한 놀이터에, 10대 중후반의 소년소녀를 기획사에 갖다 바칠 수 있는, 그런 강심장을 가진 중산층 부모는 세계 어디에도 없다. 우리나라만 해도 90년대초 소속사가 술자리와 잠자리 시중을 강요해 배우를 자살에 이르게 했던 장자연 사건이 있었다.

일본을 보자. 우리에게는 키무라 타쿠야와 초난강, 쿠사나기 츠요시로 잘 알려진 일본 최고의 인기그룹 스마프는 일본 최고 기획사중 하나인 자니스사무소 소속이다. 스마프는 2017년 해체했다. 그 후 기무라 타쿠야와 나카이 마시히로만 정규방송에서 볼 수 있을 뿐, 나머지 셋은 자취를 감췄다. 자니스사무소와 계약을 해지한 덕분이다. 자니스는 이들의 출연을 방해했다는 이유로 일본 공정위로부터 주의를 받았다(혹은 주의만 받았다).

일본 엔터테인먼트 회사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요시모토흥업도 마찬가지다. 이곳에는 주로 개그맨과 개그우먼 등 희극인이 속해 있다. 요시모토흥업은 소속 연예인과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구두계약이 원칙이라고 한다. 그러니 제대로 보수를 지급할 리도 없다. 결국 수입이 궁한 소속 연예인들이 다단계판매를 하는 범죄집단 행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걸려 전국적인 스캔들을 만들기도 했다.

일본 연예계는 아뮤즈, 쟈니스, 요시모토, 호리프로 등 몇개의 대형 기획사가 좌지우지한다. 이들의 눈밖에 나면 데뷔도 어렵다. 일본의 아이돌들이 수십 년째 똑같은 모습, 똑같은 취향으로 움직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나이 든 기획사 사장 노인네 몇의 취향대로만 나오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한때 빌보드차트를 넘보던 일본의 팝계는 내수시장 전용으로 완전히 쪼그라들었다.

최고의 플랫폼, 민주주의

한국에서는 사회전반의 민주화, 투명화의 덕을 크게 봤다. 2009년에 문체부와 공정거래위원회가 아시아 최초이자 아마도 유일하게 아이돌과 기획사간의 표준계약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대로다. 아시아의 부모와 아이들이 글로벌로 진출할 최고의 경로로 한국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 그래서다. 세계최고의 걸그룹 블랙핑크의 리드 래퍼이자 메인 댄서를 맡고 있는 리사는 태국출신이다. 동남아시아 전체가 그녀의 행보에 열광하며,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그녀의 출연시간을 초단위로 측정한다. 다른 멤버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녀는 동남아시아가 서울에 보낸 대표선수다.

JYP는 니주라는 일본인 소녀들로만 구성된 그룹을 만들어 일본 차트 1위를 휩쓰는 돌풍을 일으켰다. 심지어 코로나때문에 일본에 건너가지도 못하고 서울에서 만든 뮤직비디오로 1위를 찍었다.

비단 영화와 음악뿐 아니다. 산업도 마찬가지다. 일본이 층층이 얽힌 이해관계의 연쇄사슬에 얽혀 TV프로그램을 90년대풍으로 물들이고, 인감도장을 자동으로 찍어주는 로봇이나 만드는 동안 한국의 구매력평가지수 환산 1인당 GDP는 일본을 추월했다. 한국의 시가총액 10위는 반도체 둘, 전기차 배터리 둘, 바이오 둘, 인터넷 서비스회사 둘, 자동차 둘로 구성돼 있다. 일본의 10위 안에는 반도체도, 전기차 배터리도, 바이오도 없다. 도요타, NTT, 니혼텐키, 페스트 리테일링, 미쓰비시UFJ파이낸셜그룹들이 자리를 채우고 있다. 소프트뱅크와 소니, 키엔스정도가 그나마 위안이 될까.

뉴런의 자유결합이 지능을 만들듯이, 재능의 자유결합이 경제를 꽃피운다. 민주주의는 한국의 경제와 문화를 위로 밀어올리는 최고의 플랫폼이다. K-팝, K-드라마, K-반도체, K-방역, K-조선의 뒤에 K-민주주의가 있다. 당연한 듯 보이는 K-민주주의는 기실 유리그릇처럼 위태롭다. 사회 곳곳의 인재들을 생각에 따라, 정권의 친소관계에 맞춰 블랙리스트로 분류하고 갈라치기를 했던게 불과 몇년 전이다. 번영은 공짜가 아니다.

/ 박태웅 한빛미디어 이사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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