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 산업재편 과정에서 노동자 소외 없도록 ‘정의로운 전환’ 고민할 때

고희진 기자

기후위기와 노동운동 - 녹색 + 노조는 가능한가

개별 기업 아닌 산업별로
일자리 전환 계획 마련 필요

노동이 대전환의 길목에 섰다. 기후위기에 대응하는 산업 재편은 노동의 문제다. 내연기관 자동차 생산공정이 수년 내에 전기차로 전환되면 자동차 산업의 고용 규모는 대폭 축소된다. 석탄화력발전소는 이미 폐쇄 단계에 들어섰다. 노동운동의 대응은 더디다. 국제노동기구(ILO)나 국제노동조합총연맹(ICTU)은 몇년 전부터 ‘정의로운 전환’을 주요 의제로 꼽고 사회적 대화 추진, 전환기금 조성, 노동자 재교육 등 구체적 해법을 찾고 있다. 하지만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은 산업구조 변화를 아직 ‘논의’하는 단계다.

■ “상황 심각”, 대안은 “아직”

총연맹 단위의 주요 의제 선정
하반기나 돼야 구체화될 듯
해외선 환경단체와 연계하는 등
노조가 전환 논의 발전시켜

노조도 기후위기 대응이 늦다는 지적에 고개를 끄덕인다. 양동규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철도나 발전 쪽은 꽤 오래전부터 기후위기로 인한 산업 전환을 고민해왔다”면서도 “아직도 산재로 사람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제조업 사업장들이 기후위기를 중점 과제로 고민하기는 어려웠던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민주노총은 지난 2월 정기대의원대회에서 기후위기 특별결의문을 채택했다. 노동자가 나서 기후위기 문제를 풀고 정의로운 전환을 이끌어야 한다는 내용을 담았다. 지난 1일 노동절에는 “기후위기마저도 모두 노동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불평등 세상을 뒤집어엎어 버려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산업 재편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성별, 세대를 가르지 않고 모두에게 정의로워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건지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다.

일부 산별노조가 시도를 하고는 있다. 금속노조는 지난 3월 정기대의원대회에서 사업장별 단체협약 주요 과제로 ‘산업 전환 협약’을 선정했다. 제조업의 미래 계획을 노사가 공동으로 결정한다는 원칙을 협약에 담자는 것이다. 지난달 28일 경남지부 성우지회가 금속노조 사업장 중 처음으로 이에 대한 노사합의를 도출했다.

한계는 있다. 전 지구적인 변화로 산업구조 재편이 시작되면 사업장 단위의 단체협약은 힘을 갖기 어렵다. 장석원 금속노조 언론부장은 “기후위기에 따른 산업 전환의 해결책은 개별 사업장에서 낼 수 없다. 자동차 산업만의 문제도 아니다. 사업장과 업종을 뛰어넘는 형태로 노조가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합원들부터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장 부장은 “일부 정규직 직원들 사이에선 사실상 대마불사, ‘정말 망하기야 하겠냐’는 인식도 있다”면서 “전기차 전환이 화두지만 아직까지 현장은 피부로 체감하지는 못하고 있다”고 했다.

민주노총 차원의 본격적인 대응은 올해 하반기가 돼야 시작될 것으로 보인다. 양 부위원장은 “민주노총 내 공공·금속·사무·철도·발전 노조를 중심으로 ‘기후위기 대응 네트워크’를 운영 중”이라며 “논의를 확장시켜 올해 하반기에는 총연맹 내에 ‘기후위기 특별위원회’를 설립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한국노총에는 기후위기에 대응 조직이 없다. 이지현 한국노총 대변인은 “정의로운 전환을 대선 노동 의제 중 하나로 삼기 위해 대선정책 태스크포스(TF)에서 논의 중”이라며 “금속과 공공 등 기후위기 영향을 많이 받는 산별노조 쪽에서 위원회 구성을 논의 중이다. 노총 차원의 조직 구성은 추후 논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 기업과 정부는 저 멀리

정부 탈석탄 방안, 시간에 매몰
노동 시장 변화 대책은 없어
재교육·사회안전망 제공해야

노동이 머뭇대는 사이, 정부와 기업은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자동차 산업이 대표적인 예다. 유럽·중국·미국 등의 탄소 규제로 세계시장에서 내연기관 자동차 비중은 차츰 줄고 있다. 한국자동차산업협회에 따르면 2020년 전 세계 자동차 판매는 2019년에 비해 13.7% 줄어든 반면 전기동력차 판매는 44.6%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유럽 국가들은 빠르면 2025년, 늦어도 2030년부터 내연기관 차량 판매를 금지할 예정이다.

정부는 2019년 발표한 ‘미래차 산업 발전 전략(2030년 국가 로드맵)’에서 2030년까지 국내 신차 판매량 중 친환경차 비율을 33%로 높이고 관련 인프라도 개선하겠다고 했다. 기업의 연구·개발 지원을 확대한다는 내용도 담았다. 노동에 관한 언급은 “양대노총과 업계 등이 참여하는 ‘노·사·정포럼’에서 부품기업의 미래차 전환 상황 점검, 자동차 산업 미래 비전 공유”가 다였다.

정부의 탈석탄 방안이 2030년, 2050년 등 연도를 정해두고 탄소 배출을 규제하는 수준이라 노동자의 권리 문제는 뒤로 밀릴 수밖에 없다. 정부는 전력수급기본계획을 통해 중장기 전력수급계획을 세운다. 2017년 정부는 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기본계획 수립 시 경제성뿐만 아니라 환경성·안전성도 종합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을 담았다. 노동시장의 변화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지난해 9차 계획에서는 2034년까지 석탄화력발전소 30기 폐쇄를 결정했지만, 역시 노동자의 일자리 문제는 언급조차 없었다.

지난달 2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주최로 탄소중립기본법 제정 관련 전문가 간담회가 열렸다. 법학 교수, 환경단체, 에너지 분야 전문가가 참석했다. 산업계는 진술서를 통해 업계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하지만 노동과 관련해 의견을 낼 만한 사람은 명단에 없었다.

전문가들은 산업 전환의 전 과정에 노동자가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김현우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연구기획위원은 “한국은 노동환경 변화에 대해 노동자,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와 정보 공유가 잘 안 된다”며 “독일의 경우 노사공동결정제라고 해서 어지간한 일은 노사 대표들이 미리 얘기하고 결정한다. 기후위기에 따른 산업 전환이 큰 변화라는 점에서 정보 공유를 위한 체계와 제도 마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녹색+노동조합 꿈꿔야

기후위기로 산업 전환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됐다. 소멸 산업이 생기면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 일부는 일자리를 잃을 공산이 크다. 세 가지가 필요하다. 우선 조금이라도 더 많은 노동자를 전환된 산업에 배치해야 한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에게는 재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사회안전망도 확충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전환된 일자리에 바로 합류하지 못하는 노동자를 재교육하고 지역경제 붕괴를 막기 위해 지역에 직업훈련 전문기관을 두는 방안을 거론한다. 노동계 일각에서는 ‘선 취업, 후 재교육’ 등 취업이 보장된 재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노사 협상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에 나서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환 이후 노동시장의 변화를 뒷받침할 노동관계법 개정도 필요하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고용보험법, 노사관계발전법 등을 개정하기 위한 연구도 있어야 한다”며 “이달 말 출범할 대통령 직속 탄소중립위원회에 정의로운 전환이 고용노동분과의 하위 분야처럼 협소하게 담겨 있다. 핵심 문제가 사소하게 다뤄질까 우려된다”고 했다.

탈탄소를 위해 제정하는 법에 노동안정성에 관한 내용을 반영하는 것도 중요하다. 강은미 정의당 의원은 지난달 23일 ‘기후위기 대응과 정의로운 녹색 전환을 위한 기본법’을 대표발의했다. 산업 전환 과정에서 노동자·농민·중소상공인 등의 권리를 지키고, 탄소중립을 위한 위원회에 노동자의 참여를 보장한다는 내용 등을 담았다. 국회에 발의된 비슷한 탈탄소 법안들이 있지만, 노동 문제에 관한 내용은 비중이 크지 않다.

해외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노조가 정의로운 전환 논의를 발전시켜 왔다. 캐나다노총(CLC)은 공정함, 재고용 또는 대체 고용, 보상, 지속 가능한 생산을 정의로운 전환 프로그램의 주요 원칙으로 구체화하고 논의를 진행시켰다. 독일에선 이미 1999년 독일노총(DGB)과 정부, 환경단체, 사용자 단체들이 참여하는 ‘노동과 환경을 위한 동맹(Alliance for Work and Environment)’이 결성됐다. 국내 노조도 이런 사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김현우 연구기획위원은 “CLC에서 말한 보상은 개인적으로는 명예퇴직부터 넓게는 중앙전력 공급을 담당하는 사업장을 유지해 온 지역공동체에 대한 보상까지 포함한다”며 “독일의 경우 2035년까지 석탄발전을 멈추기 위해 탈석탄위원회를 만들고 노동자와 기업, 지역공동체 등을 지원한다”고 소개했다.

한국에서 노조와 환경단체의 관계가 긴밀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거의 모든 인간 활동은 자연 파괴를 동반하고, 노동자는 그 안에서 생산활동을 하며 직간접적으로 기후위기를 가속한다. 원자력발전 등을 놓고 일부 노조와 환경단체가 대립하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기후위기 시대에 노동과 환경의 연대는 필수불가결하다. 세계적인 탈석탄 기조는 환경과 인권을 무시한 성장만능주의식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을 깔고 있다는 점에서 노동과 환경이 연대할 여지는 넓다. 2019년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기후위기 비상행동이 꾸려질 때 노조가 함께한 것이 한 예다.

권우현 환경운동연합 에너지기후국 활동가는 “노동계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기에 비상행동에 함께했다고 본다”며 “다만 노동계도, 환경계도 아직까지 서로에게 대안으로 내놓을 만큼의 구체적 전환 방안을 마련하지 못한 상황”이라고 했다. 이어 “그래도 점차 대화하고 있다. 노동계도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면서 “기후위기에 대해 스스로 대안을 마련해 비정규직과 정규직 등 여러 고용형태의 노동자를 아우르지 못하면 변화에 적응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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