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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례로 본 사과의 정석…장난과 재치 혼동 마세요

  • 명순영, 반진욱 기자
  • 입력 : 2021.05.19 18:49:08
  • 최종수정 : 2021.05.20 10:37:13
“패자가 항복을 표시하면 승자는 대개 공격 행동을 멈춘다.”

노벨상 수상자이자 동물심리학자인 오스트리아의 콘라트 로렌츠(Konrad Lorenz) 박사가 한 말이다. 잘못했고 상대방이 화가 났다면 변명보다 사과가 우선이다. 다만 사과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진심을 담지 않은 어설픈 사과는 사태를 더욱 악화하기 마련. 사과의 정석 4가지를 꼽았다.

▶1. 진짜 미안해? ‘어정쩡한 사과’

▷떠밀려 하듯 하면 역효과

지난 4월 12일 넥슨은 메이플스토리 이용자 간담회를 마련했다. 확률 조작 논란에 대해 사과하고 이용자들의 불만을 직접 듣고 해결책을 마련하겠다는 취지의 행사였다. 간담회 전만 해도 소비자의 말을 듣겠다는 넥슨 의지에 여론의 반응은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간담회 시작 후 넥슨 운영진의 한 발언 때문에 넥슨을 바라보는 시선은 ‘호의’에서 ‘분노’로 바뀌었다.

“메이플스토리는 18년이 넘은 게임이다. 처음 서비스를 할 때는 게임 내 정보를 자세하게 공개하던 때가 아니었다(업계 관행이었다는 의미).”

한 이용자 대표가 “게이머가 원하는 특정 옵션을 막아둔 것은 777 없는 슬롯머신이라는 지적이 있다”고 비판하자 강원기 메이플스토리 총괄디렉터가 내놓은 답이다. 질문을 던진 이용자 대표는 “강 디렉터의 대답은 무책임하다. 이 부분에 대한 입장 발표를 간담회가 끝나더라도 해주기를 바란다”고 일갈했다.

또 “이용자들이 잠재 능력 옵션인 ‘드드드(확률형 아이템 ‘큐브’를 돌렸을 때 얻는 최고 옵션)’가 안 나온다는 것을 알려면, 4억5000만원어치의 큐브를 돌려봐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는 비판에도 “메이플스토리는 혼자 하는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커뮤니티 등에서) 정보가 공유된다고 봤다”고 답하며 책임을 회피해 이용자 공분을 샀다.

각종 게임 커뮤니티에서는 해당 발언을 두고 성토하는 글이 이어졌다. 불꽃은 정치권까지 옮겨붙었다. 이상헌·유동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간담회 직후 공동 입장문을 내고 “메이플스토리라는 게임은 확률형 아이템을 이용한 매출 유지에만 집중했을 뿐, 그 막대한 이익을 좋은 콘텐츠 장착에 투자해 이용자들에게 재분배할 생각은 사실상 없었던 것”이라고 지적하며 강력한 규제안이 담긴 법안 통과를 예고했다. ‘하지만’ ‘그러나’ 식의 단어를 넣어가며 면피하려는 사과는 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였다.

위기관리 컨설팅 회사 스트래티지샐러드의 정용민 대표는 “무엇에 대한 사과인지를 정확하게 스스로 서술해야 한다. 요즘에는 빨간 펜 채점하듯 사과문을 해석하는 시대다. 책임을 회피하듯 두루뭉술하게 사과하면 통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재용 부회장의 ‘메르스 사태 사과’는 ‘확실’한 사죄로 좋은 평가를 받은 경우다. 2015년 이 부회장은 삼성서울병원이 메르스 전염병 확산의 진원지가 된 점에 대해 머리를 숙였다. 당시 이 부회장은 사과문을 통해 잘못을 깔끔하게 인정하고 책임을 지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또 사과의 주체를 국민과 피해자로 명확히 하고 구체적인 지원책까지 제시해 ‘사과의 정석’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악화됐던 국민들의 평가는 사과 직후 빠르게 회복했다.



▶2. 언행불일치 ‘보여주기 사과’

▷구체적인 ‘액션’이 곧 메시지

“컨테이너 작업 중 안전관리에 소홀했다. 이에 따르는 어떤 질책도 달게 받겠다.”

5월 12일 故 이선호 씨 사망사고에 대해 공사를 진행한 원청 업체 ‘동방’이 공식으로 사과했다. 이 씨는 지난달 경기도 평택항에서 화물 운반 작업을 하던 도중 300㎏의 컨테이너에 깔려 유명을 달리했다.

대표이사까지 나서 고개를 숙였지만 반응은 싸늘하다. 반성한다는 말과 달리 ‘행동’이 미미했기 때문이다. 우선 사과 시기가 늦었다. 원청 업체인 동방은 사건이 일어난 지 20일이 지나서야 입장을 밝혔다. 사건이 공론화돼서 ‘어쩔 수 없이 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또 사과문 내용과 발표 일정을 유족 측에 알리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故 이선호 군 산재사망사고 대책위원회 관계자는 “사과문을 발표한다는 사실도 공식적으로 전달받지 못했다”며 “기자회견 형식이 아니라 장례식장에 있는 유가족에게 사과하는 것이 도리에 맞다”고 지적했다.

사과문 발표 직전에 벌인 행동들도 사과의 진정성을 의심케 한다. 동방 측은 경찰과 고용노동부의 사고 원인 조사가 진행 중인데도 5월 4일 현장 작업을 재개할 수 있게 해달라고 당국에 요청했다. 말과 다른 행동에 여론은 따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다.

전문가들은 피해를 입은 상대방이 공감하지 못하는 ‘형식적’ 사과는 위기관리에서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온다고 강조한다. 정용민 대표는 “피해자나 대상이 있다면 공감하는 메시지가 필요하다. 공감은 이해를 전제로 한다. 공감하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형식만 따지지 말고 피해자를 이해하는 내용이 들어갔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말과 행동이 일치한 사후 조치로 이미지 회복에 성공한 사례가 꽤 많다. 온라인 의류 쇼핑몰 무신사가 대표적인 예다. 무신사는 2019년 故 박종철 열사를 희화화하는 광고를 올려 소비자들에게 거센 질타를 받았다. 문제를 인식한 무신사 측은 즉각 사과문을 게재하고 문제 재발을 막기 위한 후속 대책을 내놨다. 이어 피해 당사자인 박종철 열사 유족과 기념 사업회 측에 직접 사과할 수 있는 기회를 요청했다. 자사 규칙에 의거해 광고를 만든 담당자와 검수 담당자를 징계하는 ‘처분’ 조치까지 확실히 했다. 사과문과 행동이 일치하는 깔끔한 사과에 당시 피해자인 기념 사업회 관계자로부터 “문제 해결 방식이 건강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덕분에 논란 극복은 물론 ‘피드백’이 확실한 기업으로 이미지 회복에 성공했다.

▶3. 장난과 재치 혼동 금물

▷“싸나이답게 용서?” BBQ 되레 역풍

2017년 5월 국내 대표 치킨 브랜드 BBQ는 ‘황금올리브 치킨’을 1만6000원에서 1만8000원으로 2000원(12.5%) 인상하는 등 주요 제품 가격을 일제히 올렸다. 가맹점 이윤 확보를 이유로 ‘치킨 2만원 시대’를 연 것이다. 그러나 공정거래위원회 직원들이 가맹사업법 위반 혐의로 현장조사를 시작하자마자 가격 인상을 즉각 철회했다. 명분도 없는 갑작스러운 가격 인상에 소비자 반응은 싸늘했다. BBQ는 공식 블로그에 ‘고객 여러분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임직원의 고개 숙인 사진과 함께 이런 문구를 넣었다.

“싸나이답게 시원하게 용서를 구합니다. 아량을 베풀어 거둬주십시요. 죄송합니다!”

BBQ는 소비자가 유머러스한 사과에 한번 웃어주고 용서해주기를 기대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반응은 정반대였다. 소비자는 장난스러운 사과 방식에 더욱 분개했다. 당시 누리꾼들은 “드립 칠 때와 안 칠 때를 구분 못하지?” “애들 장난도 아니고 … 회사로 인한 피해는 가맹점 사장님들만 보네요. 본사는 피해도 없을 거고, 얼굴 부끄럽지 않은지?” “싸나이답게 문구를 여기에 쓰는 게 맞는다고 생각하는 건가? 진심으로?” 등의 글이 올라왔다.

사과는 반드시 진심이 담겨야 한다. 장난스러운 사과는 진심을 가린다. 유머와 장난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물론 재치 있는 사과의 좋은 사례도 있다. 영국 소매업 막스앤스펜서(M&S)가 2009년 ADD컵 이상 큰 사이즈 브라 가격을 올리기로 하자 소비자 반발이 빗발쳤다.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M&A는 발 빠르게 사과 광고를 냈다. ‘We boobed(우리는 멍청한 실수를 저질렀다)’라는 한 줄의 카피는 싸늘한 여론을 뒤집었다. ‘가슴’과 ‘바보’를 동시에 의미하는 ‘boob’이라는 중의적인 단어를 재치 있게 사용했기 때문이다. 이후 언론은 ‘소비자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회사’라는 긍정적인 기사를 쏟아냈고, 공식 페이스북 계정에는 3만명의 새 친구가 생겼다. 시장점유율 곡선은 상승세를 탔다.

세계적인 패스트푸드 업체인 KFC는 2018년 영국 전역에서 닭고기를 공수하지 못해 수백 개의 점포가 임시 휴업했다. 브랜드 평판은 급속히 나빠졌다. 유고브브랜드인덱스(YouGov BrandIndex)가 조사한 KFC 입소문지수는 0.9에서 20.1로 급락했다. KFC가 현지 신문에 발 빠르게 광고를 냈다. 화려한 빨간색을 배경으로 텅 빈 용기의 사진을 싣고 KFC 대신 욕설을 연상케 하는 ‘FCK’라는 문자를 장식했다. 그 아래에는 치킨 없는 치킨 식당이 돼 진심으로 죄송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지칠 줄 모르고 일하는 직원들에게 감사하다는 문구를 적었다. 상황은 나아져 이제 신선한 닭고기가 매일 공급되고 있다는 내용을 포함했다. 매장별 영업 일정을 알려주는 웹사이트 주소도 게시했다. 광고는 큰 효과를 거뒀다. 이름을 살짝 뒤튼 것만으로 엉망진창이었던 며칠이 적나라하게 전달된 것이다. 냉동 재료를 사용할 것이라고 여겨졌던 KFC가 신선한 닭고기를 매일 공급받는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예상치 못했던 치킨 대란에 자조적인 유머로 대처한 KFC는 소비자에게 더욱 호감을 얻게 됐다.

▶4. 한국에서 묵묵부답은 최악

▷정확한 내용을 적시해 사과해야

지난 4월 25일 배우 윤여정은 영화 ‘미나리’로 제93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시상식 직후 진행된 비대면 인터뷰, 엑스트라TV 리포터는 윤여정이 수상 소감에서 브래드 피트를 언급하고 이후 대화를 나눴던 것과 관련해 “브래드 피트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고, 그에게서 어떤 냄새가 났느냐”고 황당한 질문을 했다. 이에 윤여정은 “난 개가 아니다. 그의 냄새를 맡지 않았다”면서 뼈 있는 농담으로 받아넘겼다. 윤여정 특유의 재치가 돋보이는 대처였다. 하지만 엑스트라TV 리포터의 돌발 질문은 무례하고 생뚱맞았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쏟아지는 비난에 엑스트라TV 측은 유튜브 계정에 올린 인터뷰 영상에서 논란이 된 부분을 ‘슬그머니’ 삭제했다. 삭제 이유에 대한 별다른 언급은 없었다. 해당 영상에는 윤여정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는 댓글이 이어졌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아우디폭스바겐은 2015년 디젤엔진 승용차에 차량 검사 시 배출가스 정보를 조작한 소프트웨어를 장착한, 이른바 ‘디젤게이트’를 일으켰다. 당시 한국 법인은 ‘본사 지시 사항이 없다’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디젤게이트로 국내 대기오염 피해는 엄청났고, 폭스바겐 오너들은 중고차값 하락이라는 재산상 피해를 겪어야 했지만 사과는 없었다. 대신 각종 할인행사로 대대적인 판촉 활동만 벌여 ‘치졸한 상술’이라고 비판받았다. 브랜드 이미지에 먹칠했다는 점은 말할 필요도 없다.

사과 없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방식은 주로 외국계 기업 전략이다. ‘잠재적인 소송’에 대한 우려가 사과에 인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기업이 사과를 하면 잘못을 인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소송에 불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지난해 코로나19 발발 이후 온라인 유통 강자들의 사과 방식도 달랐다. 외국인 지분이 80%대인 쿠팡 김범석 대표는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홈페이지를 통해 방역 조치 강화나 물류센터 폐쇄 등 기본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데 그쳤다. 반면 마켓컬리는 김슬아 대표가 “고객들께 심려를 끼쳐 사과드린다”며 “방역이 불가능한 상품을 전량 폐기하겠다”고 직접 나서 고객을 달랬다.

한국에서 ‘묵묵부답’은 최악에 가까운 사과 방식이다. 특히 최고경영자의 침묵은 고객을 외면한다는 인상을 준다. 잘못 했다면 반드시 사과해야 하고 또한 적절한 ‘타이밍’을 찾아야 한다. 대체로 잘못을 인정하는 과정은 신속하면 좋다. 그러나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없는 빠르기만 한 사과는 역효과를 낼 수 있다.

[명순영 기자 msy@mk.co.kr, 반진욱 기자 halfnuk@mk.co.kr]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109호 (2021.05.19~2021.05.25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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