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못미 현상' 부른 어떤 낙선.."노회찬 같이만 하면 된다"

2020. 12. 21. 09:26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노회찬과 한국 정치 여덟 장면 : 기록으로 톺아보기] 다섯 번째 장면 : 노회찬마들연구소, '지역명품특강'을 열다

[조현연 노회찬재단 특임이사]
"노회찬 같이만 하면 된다"

"노회찬 같이만 하면 된다."

노회찬이 떠난 하루 뒤, 노회찬도 자주 출연한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나온 이준석(바른미래당 전 노원병 당협위원장)이 한 말이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말은 이랬다.

이준석 : 상계동에서 정치하는 사람들 같은 경우는 저는 기호 3번 의원 선거 출마했잖아요. 그런데 노회찬 대표 그때 기호 한 4번쯤 됐을 거예요, 진보신당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통합진보당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저한테 선거 뛸 때마다 하는 조언이 뭐냐 하면요. '노회찬 같이만 하면 된다'라는 얘기가 거의 숙어처럼 돼 있어요, 상계동에서는.

김현정 : 노회찬 같이만 하면 된다.

이준석 : 항상 저는 많은 사람들한테 (노회찬 의원이) 어떤 식으로 활동했다는 것을 들었고. 특히 이번 지방선거에서도 보면 아직까지 노회찬 대표의 영향력이 상계동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김현정 : 떠난 지 한참 됐는데도?

이준석 : 정의당이 구의원 당선된 곳이 많지 않은데 이번에 저희 지역에 노회찬 의원 보좌관 출신 주희준 선배라고 계시는데 그분이 당선되셨어요, 구의원에. 그래서 사실 노회찬 의원이 상계동에 끼친 영향은 크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다. 어제 제가 카페에서 커피 마시다가 이 비보를 속보로 들었는데 어느 누구도 안타까워하지 않은 사람 없고. 어느 누구도 아쉬워하지 않는 사람 없고. 이게 저는 그분이 살아온 삶을 간단히 나타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2008년 18대 총선과 '호빵맨' 노회찬

2008년 4월 9일 18대 총선을 앞두고 노회찬은 고민에 빠진다. 관악과 노원 가운데 어디로 출마할 것인지 결단해야 했기 때문이다. 2007년 11월 무렵 노회찬은 결론을 내리고 12월에 이사를 한다. 1995년 12월부터 거주해온 강서구에서 노원구 상계동으로. 당선 가능성은 두 곳 모두 유력한 것으로 나온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노원구 상계동이 서민들이 더 많이 사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서울 안에서 진보정당의 후보가 의석을 차지한 경우는 1950년 사회당 조소앙 의원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당시 민주노동당 상황은 12월 대선 이후 분당으로 치닫는 정국이었다. 어떻게든 분당만큼은 막아보려 했던 노회찬은 결국 2008년 2월 5일 기자회견을 통해 "진보정치의 새로운 길을 떠나고자 한다"며 이렇게 심경을 토로한다. 사실상의 탈당 의사를 밝힌 것이다.

"지난 2월 3일 임시 당대회에서 노동자 서민은 없었다. 노동자 서민의 상식에 입각해 당을 운영하라는 소박한 요구는 '동지에 대한 의리'보다 우선할 수 없다며 묵살되었다"

"저는 민주노동당의 자주파와 결별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니라 제가 지금 결별하려고 하는 것은 민의에 귀기울이지 않는 오만과 성역을 인정하자는 잘못된 생각과 결별하자는 것이다."

다가오는 18대 총선과 관련해서는 "지역의 동지들과 의논해서 결정할 예정"이라며 "현시점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4.9 총선에 나설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덧붙였다.

사실 당선 가능성으로 보면 민주노동당 당적과 현역의원이라는 프리미엄을 갖고 출마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회찬은 결국 탈당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3월 16일 진보신당이 창당되고, 노회찬은 심상정, 이덕우, 박김영희, 김석준과 함께 공동대표에 취임했다. 노회찬은 노원구 상계동 '노원병 선거구'에 진보신당 후보로 출마했다. 노회찬은 출마의 변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지난 4년 동안 광야에 선 심정으로 한 순간 한 순간 긴장을 놓지 않고 보수정치와 맞서 진보정치의 최전선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대중과 소통하는 진보정치로 진보정당운동을 진보시키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을 통한 지난 8년의 진보정치 실험은 실패했습니다. 낡은 운동권 정파의 자기만족적이고 관성화된 실천을 뛰어넘지 못했습니다. 유능한 진보정치, 진보하는 진보정치를 국민들에게 보여드리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살을 에는 듯한 그 실패의 아픔을 외면하거나 모른척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아픔을 감싸고 치료해 새 살을 돋게 만들기 위해 진보신당의 창당에 나섰습니다. 누구를 탓 하거나 책임을 떠넘기는 게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 반성하고 성찰하면서 진보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겠다는 각오와 다짐을 해야 합니다.

그러한 각오와 다짐으로 저는 진보신당 총선승리의 한 획을 긋기 위해 서울 노원병에 출마하고자 합니다. 2004년 진보정당 원내진출의 새 역사를 만들어낸 것처럼 이번 18대 총선에서 '진보정치 서울에서 원내진출'이라는 '정치혁명'을 만들어 내겠습니다. 그 정치혁명의 바람이 전국의 진보신당 돌풍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노회찬의 캐릭터는 명랑만화 주인공 '호빵맨'이었다. 선거운동원들은 호빵맨 가면과 차림새로 지역을 돌았다. 넓은 이마와 늘 홍조가 도는 툭 불거진 광대뼈. 생긴 것도 생긴 것이지만, 그의 지지자들에게 '호빵맨 노회찬'은 더 의미가 있다.
"노회찬 씨는 진보정치인 가운데 노동자 서민과 괴리감이 없는, 가장 대중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쉽고 핵심을 찌르는 말로 국민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도 호빵 속 달콤한 팥소와 같잖아요."(☞ 관련 기사 : <경향신문> 2008년 4월 25일 자 '노회찬 "학교에서 혼자 잘먹고 잘살라고 배운 적 없다"')

▲ '호빵맨'과 함께 유세하는 노회찬. ⓒ노회찬재단
▲ 이금희 아나운서와 함께 유세한 노회찬. ⓒ노회찬 후보 홈페이지

낙선 이후의 '지못미' 현상과 낙선 인사: "나에게 묻는다"

유세 기간 여론조사에서 박빙이긴 하지만 13전 13승을 기록했던 노회찬은 결전의 날인 4월 9일의 실제 개표 결과는 낙선이었다. 한나라당 홍정욱 후보와의 경쟁 결과는 40.1% 대 43.1%, 3만4554 대 3만2111로 나타났다. 낙선 이후 온라인을 중심으로 몇몇 낙선자들에 대한 '지못미(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해)' 현상이 나타났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근태와 심상정, 그리고 노회찬이었다.

노회찬 사무실은 선거 이후에도 한동안 북적거렸다. 노원 주민은 물론 강남구와 서초구 주민들까지 사무실을 찾아 "안타깝다"는 격려의 말과 회식비까지 건넸다. 노회찬의 홈페이지에는 "지켜드리지 못해서 미안합니다. 제 생각엔 당신은 이미 성공한 정치인입니다", "우리 동네지만 화가 나네요" 등의 글이 쏟아져 일시 정지될 정도였다.

이에 대해 노회찬은 "노원구 주민들은 물론이고 전국 각지에서 격려해주시는 국민들에게 감사한다"면서 "노원 주민들께 약속한 대로 노원에서 다시 진보정치를 시작할 계획"이라고 밝히면서, 선거운동 때와 같이 상가 방문, 지하철 퇴근인사 등 '낙선사례'를 시작한다.(☞ 관련 기사 : <프레시안> 2008년 4월 11일 자 '"노회찬·심상정·김근태 '지·못·미~'"')

낙선인사 중에 만난 상계동의 한 주민은 "승리와 패배를 떠나 노원을 떠날 생각이 아니라면 서민들 모두의 바람이 집값 올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라. 정말 노원의 서민들을 위한 정책이 필요하다"며 쓴소리를 겸한 아쉬움의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이 주민은 노회찬과 진보신당을 지지했던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나는 사실 정치에 그다지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내가 노회찬을 지지했던 이유는 시민기자로 취재 활동을 하며 장애인 행사, 호주제 폐지 등 국민의 민의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노회찬 의원의 모습을 늘 보았기 때문이다. (중략) 서민 밀집지역이라 나처럼 자신들의 처지를 알고 노회찬을 지지할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뜬구름을 잡아 솜사탕을 만들어 주겠다는 달콤한 공약에 대부분 서민들이 자신의 처지를 잊었고 귀마저 무뎌진 까닭이다."(☞ 관련 기사 : <오마이뉴스> 2008년 4월 14일 자 '18대 총선이 상계동 주민에게 던진 두 가지 직격탄')

"여의도동 1번지에 있는 꽤 많은 분을 초대 손님으로 모셨는데, 내 기억으로는 유일하게 진짜"였던 노회찬의 선거현장을 같이 뛰어다닌 이금희 아나운서는, "낙선 사례를 혼자 하게 할 수 없어 아침 일을 마치자마자 바로 달려갔다"며 "하루 종일, 시장으로, 아파트로, 거리로 다니는데, 나는 울었지만, 그는 울지 않았다"며 훗날 회고한다.(☞ 관련 기사 : <중앙일보> 2018년 9월 8일 ''노회찬 추모제' 참석자들 울게 만든 이금희의 '첫 마디'')
▲ 2008년 4월 13일 방영된 <KBS 스페셜: 노회찬과 상계동 사람들> 화면 갈무리.

2008년 4월 13일 방영된 <KBS 스페셜: 노회찬과 상계동 사람들>(연출: 임기순, 글: 주은경)은 두 달 동안 노회찬 후보의 총선 도전 과정과 서민밀집 지역인 상계 사람들의 삶과 지역 민심을 밀착 취재한 것이었다. 살아온 길이 너무나도 다른 두 후보를 '서민적 이미지의 진보신당 노회찬 후보'와 '귀족적 이미지의 한나라당 홍정욱 후보'를 대비시키며 제작진은 이렇게 마무리 멘트를 한다.
"노회찬 후보는 상계동 사람들에게 선택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얻은 40%의 지지는 그에게 희망의 자양분이 되었다. 상계동 서민들과 함께 하는 민생정치를 실현해보겠다는 그의 꿈은 당장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다시 상계동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4년 후의 그의 모습이 기대된다."

"선거에서 진보 성향의 많은 후보들이 고배를 마셨지만, 대표적인 서민의 동네 상계동의 선택은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노회찬이라는 사람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지역주민의 전반적인 정서와는 상관없이 조직과 바람에 의해서 표심이 좌우되는 모습이 안타깝다. (중략) 4년 임기 내에 될지 안 될지 모를 무책임한 뉴타운 공약으로 표심을 유혹한 자들만이 득을 본 꼴이 됐다."

▲ <KBS 스페셜: 노회찬과 상계동 사람들> 화면 갈무리.

선거 며칠 뒤 노회찬은 <난중일기>에 '나에게 묻는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린다.(2008.4.18.) 꽤 긴 글이지만 당시 노회찬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에 거의 그대로 옮긴다.
- "낮 12시경 KBS 라디오 박에스더 인터뷰를 기다리던 중 아주머니 한분이 사무실로 찾아오셨다. 나이 40세. 두 아이의 엄마라며 부천시 원미구에서 2시간 반 걸려 난생처음 상계동에 왔다면서 상계동이 이리 먼 줄 몰랐다고 한다. 가지고 온 분홍보자기를 풀더니 다양한 떡들이 정성스레 담겨져 있는 대나무 바구니를 열어 보인다. 40년간 떡집을 운영해온 70세 시어머니가 연로해서 오늘 떡집 문을 닫는 날인데 마지막 떡을 나에게 주려고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시어머니와 함께 만든 작품이라 한다. 어젯밤 MBC 백분토론도 보았다면서 힘을 내라고 한다. 다음 선거 때는 가게문을 닫고서라도 며칠간 상계동에 와서 선거운동 하겠다고 한다. 전화인터뷰를 마치고 나가보니 어느새 후원당원으로 등록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박규님 동지가 맛을 보라며 떡을 한 접시 담아주는데 집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새벽부터 저 떡을 빚은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정성이 천근만근 무게로 가슴을 누른다."

- "어젯밤엔 퇴근한 직장인 부부가 유모차에 아이를 싣고 사무실로 찾아왔다. 둘다 후원당원으로 가입하면서 힘내라고 말한다. 선거가 끝난 지 일주일. 거리에 나서면 많은 사람들이 선거운동 마지막 날보다 더 적극적인 표정으로 먼저 인사를 해온다. 가장 많이 듣는 얘기는 '나, 찍었는데… 꼭 될 줄 알았는데…'이다. 그럴 때마다 참으로 송구스럽기 그지없다. 나의 낙선으로 실망과 좌절을 경험한 분들 앞에서 나는 피해자 앞에 선 가해자일 뿐이다. 기쁜 마음으로 기대를 갖고 투표했다가 결과에 실망한 분들이 심경의 일단을 털어 놓을 때마다 나는 영락없는 죄인이다. 일주일째 낙선인사를 다니고 있지만 낙선인사란 낙선자가 위로 받기 위한 인사가 아니라 사과하는 인사라는 것을 첫날부터 알게 되었다."

- "선거결과가 발표되자 인터넷에서 일부 격앙된 네티즌들이 노원구 주민을 원망하기도 한다는 얘길 들었다. 그러나 그들이 던지는 돌을 맞아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이다. 집값상승과 뉴타운에 대한 기대감으로 상대후보를 찍었다는 분들에게도 아무런 유감이 없다. 먹고 살기 막막한 상태에서 부동산가격상승이 그나마 위안을 주는 유일한 탈출구처럼 여겨지는 것은 안타까운 현실이나 이분들을 탓할 문제는 아니다. 이런 분들에게 우리는 언제 한번 제대로 된 희망과 대안으로 다가선 적이 있는가? 얼굴이 잘생겨서 상대후보를 찍었다는 아주머니의 발언은 오히려 희망을 주지 못하는 진보정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에 다름 아니다."

- "투표를 거부한 50%에 가까운 유권자들의 질책은 그중 가장 두려운 대목이다. 투표 기권을 나태한 시민의식의 소산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으며 누가 되더라도 나아질 것이 없다는 절규 앞에서 진보정치는 과연 당당할 수 있는가?

시인 안도현이 우리에게 물었다.
"연탄재를 함부로 발로 차지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오늘 나는 나에게 묻는다.
"너를 거부한 사람들을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 너는 그들에게 한번이라도 희망이 된 적이 있느냐"

같은 물음을 제대로 된 진보정당으로 거듭나려는 진보신당에게도 던진다."

한 번도 가본 일 없는 낯선 길 앞에 서다

노회찬과 선본 식구들은 '이후'를 어떻게 할 것인지를 두고 숙고의 시간을 갖는다. 낯선 곳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길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역설적이지만, 노회찬의 당시 심정은 아마도 2004년 17대 국회의원 당선 직후 아내 김지선에게 보낸 편지글의 내용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다.

"다시 광야에 섰습니다. 험한 세월 모진 풍파 모두 뒤로 하고 한 번도 가본 일 없는 낯선 길 앞에 섰습니다. (중략) 다시 비바람 거센 광야에 섰습니다.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이 새로운 길은 어쩌면 더 큰 희생, 더 큰 시련, 더 많은 고통만이 예정된 고난의 길일지도 모릅니다."

숙고와 논의 끝에 함께 다다른 결론은 '마들'(노원구 상계동)에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겠다는 것과, 그것을 위해 지역정치를 제대로 일구는 연구소를 세우겠다는 것이었다. 내부 논의와 함께 외부의 아이디어와 자문도 계속 구했다.

내부에서 논의된 1차 결과는 '평등·평화·생태·연대의 진보적 가치를 기본으로 좋은 사회(Good Society)를 만들기 위한 정책연구와 실천', '주민들과 소통하고, 주민들과 함께, 주민들이 주체가 되어 지역을 건강하게 바꾸어 나가는 생활정치 실현'이라는 목표 아래 한 장의 그림으로 모였다.

ⓒ노회찬재단

외부의 자문은 여러 차례 이뤄졌지만 그 가운데서도 특히 외부 전문가 여섯 분과 노회찬 및 연구소 사람들(박규님, 오재영, 유성재, 조현연, 김의열 등)이 함께 자리를 한 2008년 9월 초 두 차례의 의견 수렴의 시간은 연구소의 지역 활동을 설계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의견 청취 및 이야기 주제는 노회찬과 마들연구소 활동 및 진보신당의 지역 뿌리내리기 등 새로운 지역정치 활동의 모형 창출과 관련한 것이었다.

- 9월 3일(수): 조효제(성공회대, 사회학) 신정완(성공회대, 경제학), 구갑우(북한대학원대, 정치학)
- 9월 5일(금): 은수미(한국노동연구원, 사회학), 이기호(한신대, 정치학), 조국(서울대, 법대)

기억에 남은 이야기, 그리고 구체적인 연구소 차원의 지역 사업 프로그램을 작성하는데 도움이 된 의견을 몇 가지 범주로 나눠 정리해보면 이랬다.

첫째, 노회찬 개인과 관련:

○ 진보적이면서도 대중적(서민친화적)인 이미지를 지닌 노회찬에게는 개인(인간) 그 자체가 가장 큰 자산이다. 통상 진보라 하면, 여전히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그리고 칙칙한 이미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지 프로파일링을 통해 장점과 단점을 확인한 뒤 장점의 극대화 전략과 단점의 보완 전략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 노회찬하면 이미지는 있지만 내놓을 만한 브랜드가 없다. 정치를 바꿀 수 있는 노회찬 만의 브랜드 만들기가 필요하다. 새로운 진보의 거처로서 지역,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서 '지역'을 접근하는 것이 진보적이면서 대중적인 정치인 '노회찬' 브랜드 만들기의 핵심 착목 지점의 하나가 될 수 없을까? 지역을 통한 한국 사회의 기득권 구조의 거대 몸통 흔들기라고나 할까?

○ 전국적 지명도를 지닌 노회찬의 경우 중앙과 지역의 조화가 필요하다. 치밀한 계획을 통해 중앙정치 무대를 어떻게 흔들 것인지를 집중 고민해야 한다.

○ 진보의 사람 키우기 주력해야 한다. 그 차원에서, 비록 무능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에 대한 보수의 정치적 감각과 섬세함을 배울 필요가 있다.

○ 진보의 윤리학이 부재한 지금 상황에서, 진보의 윤리학을 만들고 실천해야 한다. 예컨대 '이 땅에서 진보로 살기 위한 100가지 실천 방법' 같은 것.

둘째, 지역과 관련:

○ 제출된 사업계획서만 놓고 보면 연구소가 혼자 하는 느낌을 받는다. 자료로 제출된 연구소 프로그램의 경우 듣기보다는 선전전의 느낌이 든다. 제가 무엇인지 그들에게 먼저 들어라! 지역주민과 함께 하는 느낌으로 다가가는 것이 중요하다.

○ 연구소 활동이 선거용이 아니라 지속을 통해 진화 가능한 버전이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그랬을 때 ‘지역을 새롭게 만든다’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지역 안에서 작은 국가를 만들기’, 골리앗과 맞서 싸우는 일명 ‘다윗 프로젝트’를 가동하면 어떨까 싶다.

○ 지역의 눈높이로 지역 드러내기, 즉 전문가가 말하기에 앞서 지역 주민 스스로 말하게 함으로써 주민들이 희망하는 지역이 어떤 상인지를 먼저 그리게 해야 한다. 예컨대 뉴욕 맨하탄 1번가의 웬디라는 여성(아이콘 디자이너)의 활동에 주목해봤으면 좋겠다. 마을에서 아이들과 2년 작업으로 지도를 그리기(만들기)를 통해 세대별 지도 등으로 발전한 사례다.

셋째, 구체적인 사업과 관련:

○ '지역 터 잡기'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연구소의 모든 사업 이슈를 노원 지역과 연결할 필요가 있다. 진보신당 활동가를 비유하면 모두 일당백의 사람들이다. 문제는 중앙 마인드라는 것이다. 지역 활동에서 몸과 사고가 변하지 않는다면 문제다. 중앙이나 전국 차원의 통계 자료에 앞서 노원 지역의 통계를 우선하고, 그것을 전국 차원 또는 서울의 다른 구와 비교하는 것이 중요하다.

○ 마들의 고유한 브랜드를 만들어낼 수 있는 (쉽게, 즐겁게 할 수 있는) 5개 이하의 사업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명사초청특강'과 주민 요청을 연결, 주민들의 요구에 응답하면서 물결을 타는 것이 중요하다.

○ 명사초청 특강이 배운 사람들을 참여주체로 하는 것이라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맞춘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작지만 오래할 수 있는 것’을 꾸준히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컨대 해외의 경우 지역에서의 '책읽기/책읽어주기' 프로그램이 지속되는 것에 대한 의미를 한 번 확인할 필요가 있다.

○ 교육문제에 집중할 필요, 특히 가정주부를 주된 참여주체로 한 특화된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 정치를 주제로 한 '청소년 참여체험학습'(정치교실) 프로그램을 추진해봄직하다. 즉, 아이들이 참여주체인 모의국회나 모의구의회 개최를 통해 아이들도 정치할 수 있다는 것으로 관념 전환과 함께, 정치를 먼 것, 나와는 무관한 것이 아니라 나와 아주 가까운 어떤 것으로 어렸을 때부터 학습할 필요가 있다.

'노회찬마들연구소', 세상에 나오다

'(사단법인)노회찬마들연구소'는 이처럼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으고 다듬으며 만들어졌다.

기록을 정리하다가 문득 물음 하나가 떠올랐다. 만약 노회찬이 2008년 총선에서 당선됐다면 과연 노회찬마들연구소는 세워졌을까? 아무도 모를 일이겠지만, 추정컨대 꼭 연구소는 아니더라도 비슷한 유형의 지역 네트워크 정도는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아무튼 노회찬의 낙선 '덕분'에 2008년 11월 28일 노원구 상계동 지역에 '노회찬마들연구소'(이사장 노회찬)가 창립기념식을 통해 공식 출범했다. 창립기념식에서 노회찬은 이렇게 말했다.

"삶의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남을 배려하고 더불어 사는 살며 인간을 지향하는 사회가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인간끼리 경쟁을 부추기며 강한 자만이 부를 누리는 사회입니다. 대한민국은 지난 60년의 결과로 전 세계에서 출산율이 가장 저조하고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지난 60년간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우리 모두의 책임입니다. 진보진영도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민주정부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양극화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새로운 진보적 대안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제 진보적 대안이 왜 국민들에게 수용되지 않는지 고민해야 할 때입니다. (중략) 진보진영에 쏟아지는 '당신들만 떠든다', '선언만 한다', '가르치려 한다', '배우려 하지 않는다'는 사람들의 지적을 수용해야 할 것입니다. 왜 함께 떠들려 하지 않았는지, 우리 편을 왜 많이 만들지 못했는지 성찰해봐야 합니다. (중략) 마들연구소를 노원과 한국사회를 개조할 정책생산의 산실로 만들겠습니다. ‘나눔과 돌봄, 희망을 향한 행복한 상상’의 허브가 될 것입니다."

▲ 왼쪽 상단의 '노회찬 마들연구소' 글씨체는 신영복 선생 작품이다. 왼쪽 하단은 이소선 어머님(가운데)과 노회찬 이사장 부모님. ⓒ노회찬재단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축사를 통해 "이 지구에는 연구소가 많은데, 노회찬의 연구소는 진보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쉽게 전하고 이해시키는 방법을 연구하는 연구소가 되길 바란다"고 말한다. 이소선 어머님은 "과거 그 바쁜 와중에서도 노회찬 이사장은 우리를 돕기 위해 애써왔다. 살아생전에 노회찬이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고 싶다"고 말해 박수와 함께 웃음을 선사한다.
창립식에는 노회찬 이사장의 어머님과 아버님도 참석, 자리를 빛내 주셨다.

창립식은 다소 늦어졌다. 노회찬과 함께 연구소를 만든 오재영의 말이다.

"창립기념식을 먼저 하고 지역에서 사업을 펼치는 것보다 사업적으로 주민들에게 먼저 다가서고, 그 다음에 창립기념식을 하는 게 맞다고 판단해 다소 늦게 창립기념식을 열게 되었습니다."

대표 브랜드 '명사초청월례특강'을 41회 개최하다

노회찬마들연구소는 지역주민들과의 소통과 정책생산의 산실로서 주민들의 생활에 밀착해서 지역 정치활동의 전형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나눔과 돌봄·함께 하는 행복한 상상'이라는 기치 아래, '명사초청월례특강', '학부모와 함께하는 교육아카데미', '나눔과 돌봄을 통한 활기찬 지역공동체 만들기 사업', '활동가와 함께 하는 공부모임', '여성교실', '마들정책포럼과 지역정책연구' 활동 등을 통해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특히 <오마이뉴스> 구영식 기자가 '지역명품특강'이라는 애칭을 붙여준 '명사초청월례특강'은 이금희 아나운서가 첫 스타트(2008년 9월 7일)를 끊은 뒤, '공지영의 쌍용자동차 이야기 <의자놀이> 북콘서트'(2012년 9월 26일)에 이르기까지 총 41회가 진행, 노회찬마들연구소의 대표 브랜드가 됐다. 그것은 '뉴타운 개발'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문화적 접근을 통해 지역의 품격과 지역주민의 자존감을 올리는 기대 이상의 효과를 가져왔다. 아마도 노회찬마들연구소 활동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사업을 꼽아보라면, 지역 주민 대부분 첫손가락으로 꼽을 사업이 아닐까 싶다.

ⓒ노회찬재단

연구소 행사 가운데 가장 많은 청중이 모인 것은 '노회찬·조국 북콘서트: 2012년, 새로운 희망을 찾는다'(2012년 1월 10일)로 1000여 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당시 조국(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은 노회찬 후원회장이었다.
ⓒ노회찬재단

교육전문가 이범의 경우는 바쁜 와중에도 몇 차례 마들연구소 행사를 함께했다. 특히 이범이 기획한 여성, 학부모, 청소년을 위한 교육아카데미 개설은 지역주민들의 교육에 대한 갈증을 어느 정도는 채워주었다.
ⓒ노회찬재단

마들연구소의 대표 브랜드 '마들명사초청특강'이 평균 200~300명 참석한 가운데 41회 진행되는 동안 어려웠던 점은 사실 적지 않았다. 강사 섭외, 홍보, 참석인원에 대한 노심초사, 지역 선관위의 감시 아닌 감시 등등등. 그 가운데서 초기에 특히 힘들게 한 것은 특강 장소를 구하는 것이었다.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가면서 많은 난관을 뚫고 알차게 진행된, 1회부터 41회까지 <마들명사초청특강>의 초청강사와 이야기 주제를 하나로 모아보면 이렇다.

명사초청특강과 관련해 몇 가지 이야기를 간추려 사진과 함께 소개해본다.
1회: 이금희 방송인
ⓒ노회찬재단
'아침마당을 통해 본 우리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벽돌 두 장'

일상에 쫓겨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거대담론에 휘말려서 (중략) 잊고 지냈던 나와 내 가족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다. 반듯한 998장의 벽돌과 나머지 부족한 두 장의 벽돌이 조화하면서 아름다운 벽을 이루는 우리 모두는 (중략) 방영만 되지 않았을 뿐 각자 제 생의 '인간극장'이 아니던가. 오늘 저녁엔 온 가족 둘러앉아 저녁 식사라도 해야겠다.(강연 후기)
5회: 신영복 교수
ⓒ노회찬재단

- 가지 끝에 마지막 남은 한 개의 과실이 석과(碩果) 곧 '씨과실'입니다. 석과는 먹지 않고 땅에 묻어 이듬해 봄의 새싹이 됩니다.(獨全不落 故果至于碩 而不見食)

이 '씨과실'을 먹지 않고 새싹으로 키워내는 '석과불식'이 바로 희망의 언어입니다. 삭풍 속에 남아 있는 가지 끝의 마지막 과실은 고난의 상징이지만 우리의 몫은 이러한 고난의 상황에서 희망을 일구어내는 일입니다.

- 잎사귀를 떨고 자신을 냉정하게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나아가 우리 사회를 새롭게 바꾸어 가는 일은 대단히 먼 여정입니다. 단 한 번의 개혁으로 불가역적(不可逆的) 사회변화를 이루어낼 수 없습니다. 끊임없는 노력이 점철된 먼 여정이 요구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먼 여행, '가슴으로부터 발에 이르는 여행'에 의하여 완성됩니다.

이 긴 여정을 견디게 하는 것이 양심(良心)과 자부심(自負心)입니다. 양심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입니다. 자부심은 자기(自己)의 이유(理由)로 걸어가는 것입니다.(강연 내용)

10회: 박중훈 영화배우
ⓒ노회찬재단

- 열렬한 환호 속에 등장한 박중훈 씨는 이날 '신기하고 유쾌한 생명력'을 주제로 이야기를 펼쳐나갔다. 그가 말하는 '신기하고 유쾌한 생명력'은 결국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배우'라는 직업이 다양한 역할을 소화하며 타인을 이해하듯 우리 사회에도 '다양성'을 중시할 때 유쾌한 생명력이 발산된다는 것.

- 그는 학창 시절 내내 오락부장을 도맡았다고 한다. 한 반에 꼭 한 명씩은 있는 유쾌한 아이들 중 하나가 바로 그였다. '영화배우 역시 사회의 오락부장'이라고 말하는 그는 "학창 시절에는 왜 오락부장에 대한 자부심을 갖지 못했을까?"라며 "모든 가치를 (공부 잘하는) 반장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스스로 답했다. 그는 우리가 쉽게 혼동하게 되는 '틀리다'와 '다르다'를 빗대어 "오락부장은 '틀린 학생'이고 반장은 '맞는 학생'이라는 사회적 풍토 때문에 자부심을 갖지 못했다"고 말했다.(☞ 관련 기사 : <레디앙> 2009년 6월 3일 자 '박중훈, "다양성 인정이 유쾌한 생명력"')

14회: 김제동 방송인
ⓒ노회찬재단

- '말'이란 영혼을 옮기는 수레, '대화'란 서로의 영혼을 교감하는 것으로 대화 중 가장 좋은 것이 '유머'입니다.

- 나는 독재도 반독재도 모릅니다. 상식밖에 모릅니다. 적어도 누가 죽었으면 최대한 예의를 표하고, 선덕여왕에 나온 것처럼 '먹고 살기 힘들어서 들고 일어난 것은 폭동이 아니고 절규며, 국민은 계몽과 협박의 대상이 아니라 희망을 줘서 같이 살아가야 하는 대상'이라는 것. 그것이 바로 상식입니다.(강연 내용)

18회: 박찬욱 영화감독
ⓒ노회찬재단

- "아마 주연배우보다 더 인기 있는 감독은 많지 않을 겁니다."

강연이 시작되기 전, 노회찬 이사장의 인사말에서처럼 '주류 영화판'에서 '비주류'의 이야기를 거침없이 내뱉는 영화감독 박찬욱이 노원에 왔다. 여느 때와 달리 참석자들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된 이 날의 강연은 예정된 시간을 30분이 넘긴 시간에야 겨우 끝날 정도로 열띤 질문들이 이어졌다.

- "이 사회에는 수많은 모순들이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계급모순에 대해서는 숨기려고 하고 쉬쉬하려고 합니다. 사실 모든 모순들의 시작이 바로 계급모순에서 비롯된 것인데 말이죠. 그래서 그런 내용을 가지고 영화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복수는 나의 것>이지요. 흥행에는 완전 실패했지요." 그러나 흥행 실패와는 달리, 다수의 평론가들은 이 작품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작가로서의 그의 지위도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거짓말은 '하면 된다'라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노력도 안 해보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노력을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미덕도 부로 결정되는 세상이에요. 하다가 안 되면, 때로는 과감하게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 집 가훈은 '아니면 말고'입니다."

처음에는 웃음을 터뜨리던 관객들도 이내 그의 설명과 대답에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관련 기사 : <레디앙> 2010년 2월 5일 자 '정곡을 찌르는 모호함, 영화감독 박찬욱')

36회: 정혜신 의사
ⓒ노회찬재단

- 가까운 사이의 사람일수록 충고나 조언은 불필요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격려와 응원, 지지뿐이다. 심리상담의 최종목적인 사람을 홀가분해지도록 하는 것. (중략) 현대인의 우울증을 극복하는 홀가분의 비법을 들어보는 시간"(초청특강 홍보 포스터)
39회: 김미화 방송인
ⓒ노회찬재단

- 내년으로 방송 경력 30년을 맞이하는 김미화 씨를 초빙하는데 노회찬 의원은 딱 1년이 걸렸다는 인사말을 전합니다. 너무도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지만, 한걸음에 달려와 주신 김미화 씨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웃음과 감동이 묻어나오는 그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만으로도 큰 행복을 느꼈던 시간이었습니다.(<노회찬의 공감로그>)
41회: 공지영 작가
ⓒ노회찬재단

- "쌍용자동차 사태 르포르타주 <의자놀이>를 출간한 공지영 작가를 모셨습니다. 그리고 쌍용자동차 김정우 지부장, 노회찬 의원도 함께하여 북콘서트 형식으로 쌍용자동차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북콘서트에 오신 많은 분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전해 들으며 울었습니다. 당장 분향소로 달려가 이제서야 와서 미안하다며 말하고 싶다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수치와 순위 놀이로 국민들을 현혹시키기 보다는, OECD 국가다운 수준으로 올라갔으면 좋겠습니다."

- 무자비한 파업 진압이나 비인간적인 처우가 쌍용자동차 사태의 본질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제법 안정적인 대기업의 노동자들이 왜 파업을 벌였느냐가 이 사건의 열쇠입니다. 정부가 얘기하는 배후 조종이 아닌, 쌍용자동차의 내부 구조와 역사를 제대로 알게 된다면 어느 누구라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 77일간의 옥쇄 파업.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여름. 40도를 넘나드는 공장 내부에서 물과 전기도 없이 싸워야 했습니다. 사측의 불법파업을 그만두라는 선동 방송, 용역들의 위협과 횡포, 의사도 물도 들여보내지 않았던 사측과 경찰에 맞선 노동자들. 노동자들은 공장 내부에 그나마 돌아가던 비상발전기의 전기를 자동차 만드는데 필요한 도료가 굳을까 봐 그쪽으로만 전기를 가동했다고 합니다. 도료가 굳어버리면 배수관 등을 교체하며 한 달 정도의 수리 기간과 100억 정도의 비용이 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노회찬의 공감로그>)

'나눔과 돌봄'

노회찬은 '나눔과 돌봄'에 있어서도 정성을 다했다. 소외된 이웃에게 연탄과 도시락 배달, 김장 담가 나누기 등, 그것은 보여주기식 민생'투어'가 아니라 노회찬의 진심이 담긴 나눔과 돌봄의 실천이었다.

17대 총선 선거운동의 기록을 정리한 노회찬의 <선대본 일기>는 '민생투어'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민생투어'가 계속되고 열우당은 이를 표절이라 비판하는 3류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투어'의 사전적 정의는 여행, 관광 혹은 견학이다. 그러니 '민생투어'는 민생현장을 여행하고 관광하거나 혹은 견학한다는 뜻이다.

민주노동당은 '민생투어'를 하지 않는다. 왜냐면 민주노동당에게 민생현장은 바로 고향이고 또 삶의 현주소이기 때문이다. 자기 고향을 '여행'하고, 자기 마을을 '관광'하며, 자기 집을 '견학'하는 사람은 없다.

'민생투어'를 한다는 것은 '민생현장'이 바로 남의 고향이고, 다른 사람들의 마을이며 남의 집안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민생투어'는 백인들의 '아프리카 투어'이고 부자들의 '소말리아 방문'이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먼저 했느니 싸우고 있다. 식민지를 누가 먼저 발견했는지 싸우다 망한 17세기의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이다."(<선대본 일기> 2004년 3월 27일 자)

2012년 19대 총선에서 노회찬이 상대적으로 손쉽게 당선될 수 있었던 것도 '민생투어'가 아니라 꾸준한 그리고 참신한, 지역주민의 삶과 마음에 스며드는 활동의 결과였다. 이준석이 들었다는 "노회찬 같이만 하면 된다"는 말도 여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 노회찬은 2008년 이래 4년간의 노원구 상계동 삶에 대해 이렇게 표현한다. "넘어지고, 엎어지고, 멍도 들었다." 민주노동당 분당과 진보신당 창당, 2008년 18대 총선 낙선과 마들연구소 창립, 2010년 서울시장 출마, 진보신당 탈당, 통합연대 결성 등에 이르기까지 '정치백수' 노회찬은 숨가쁘게 달려왔다. 오전에는 마들연구소 일을, 오후에는 주로 진보정당 통합과 관련된 일을, 밤에는 전국 각지의 강연과 집회를 돌아다녔다.(<시사인>, 222호, 2011.12.21.)

2012년 4월 11일 19대 총선, 노원구 상계동(노원병)에 '엄마와 아이가 행복한 대한민국', '노원이 바뀝니다. 대한민국이 바뀝니다'를 앞세우며 출마한 노회찬은 5만2270표, 57.2%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당히 당선된다. 새누리당 허준영 후보는 3만6201표(39.6%)를, 국민생각 주준희 후보는 2889표를 득표했다.
ⓒ노회찬재단
ⓒ노회찬재단

'당의 명령'으로, 정든 '마들'을 떠나다
"저는 오늘 대법원의 판결로 10개월 만에 국회의원직을 내려놓고 다시 광야에 서게 됐습니다. 안기부 X파일 사건으로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서도 뜨거운 지지로 당선시켜주신 노원구 상계동 유권자들께 죄송하고 또 죄송할 뿐입니다. 그러나 8년 전 그날 그 순간이 다시 온다 하더라도 저는 똑같이 행동할 것입니다. 국민들이 저를 국회의원으로 선출한 것은 바로 그런 거대 권력의 비리에 맞서 이 땅의 정의를 바로 세우라는 뜻이었기 때문입니다."(2013년 2월 14일, 국회의원직 박탈 직후 국회 정론관 기자회견)

2013년 2월 '삼성 X파일' 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뒤, "노원구 상계동 유권자들께 죄송하고 또 죄송할 뿐"인 노회찬은 2014년 동작을 재보선 출마와 2016년 창원 성산 출마를 놓고 마지막까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다. 노원은 그만큼 그에게, 그리고 그 주변의 활동을 함께 해온 사람들에게 굉장히 소중한 기억과 값진 실천이 깃든 곳이었기 때문이다. 정들었던 시간의 기억을 뒤로 한 채, '철새정치' 등 비판과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다른 결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그것이 당의 결정이고 명령이기 때문이었다.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창원 출마를 놓고 고민이 컸다"며 노회찬은 이렇게 문답한다.(☞ 관련 기사 : <한겨레> 2016년 3월 4일 자 '창원 간 노회찬 "빼앗긴 땅에도 봄은 올 것이다"')

- 당의 요청이라 해도 매번 다른 지역구에 출마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나.

"나도 매우 힘들다. 어찌 보면 불행한 일이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이사를 다니는 사람은 이사를 다니지 않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나. 여행이라면 낯선 곳에 가는 게 좋을지 몰라도 선거는 익숙한 곳에서 하는 게 더 낫다. '선거를 앞두고 여기에 왜 왔느냐'는 상황에 다시 봉착할까봐 걱정했다."

- 서울(노원병)에서 출마해 이긴다면 그것도 당에 큰 의미가 될 텐데.

"당에서 여러 의견이 있었다. 다시 노원으로 가자는 의견, 광주로 오라는 광주시당의 요구, 창원으로 오라는 경남도당의 요구가 있었다. 광주 선거는 야권의 어느 정파가 호남의 주도권을 가져가느냐의 문제다. 노원병 선거는 내가 당선되지 않으면 국민의당 안철수 의원이 당선될 수도 있는 곳이다. 하지만 창원 성산구에서 이기면 정의당의 의석 하나를 늘리는 데 그치지 않고 새누리당 의석 하나를 뺏어오는 의미가 있다. 정의당에 성산구는 전략적 가치가 전국 3위 안에 드는 중요한 곳이다. 당의 전략적 요충지라면 승리 가능성이 높은, 당의 에이스를 보내는 게 당연하다."

2016년 철새정치 공세에 대한 노회찬의 반박은 이어졌다.

"당명이 여러 차례 바뀐 것은 사실이지만 당이 합치고 나뉘는 과정이 있었을 뿐 당을 옮기지 않고 오로지 진보정치를 지켰다."

"흥부전에서 박씨를 물어다 주는 제비도 철새다. 그런 좋은 철새까지 방지해서는 안 된다."

정의당 한창민 대변인도 노회찬에게 힘을 보탰다.

"봄을 몰고 오는 제비처럼 노회찬 후보는 민의를 받들고 왔다. 창원성산에 민생의 봄을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이곳에 왔다. 봄을 부르는 철새는 민생의 알곡만 탐내는 지역 텃새보다 백배천배 유익하다."

2016년 20대 총선에서 정의당 후보로 경남 창원성산에 출마한 노회찬은, 진보후보 단일화 투표, 야권후보 단일화 투표 등 두 번의 예선 관문을 거쳐 본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를 누르고 3선 국회의원이 된다. 당선 후 몇 분이 노원의 '명사초청특강'과 같은 마들연구소의 프로그램을 창원 지역에서 진행했으면 하는 바람을 전해왔지만, 몇 차례 논의만 하고 결국 추진하지는 못했다. 돌아보면 아쉬움이 크게 남는다.

창원에 출마하면서 노회찬이 남긴, 그의 진심이 담긴 말 한마디가 떠오른다.

"노동자 서민의 땀과 눈물과 애환이 서려 있는 곳, 그곳이 저 노회찬의 고향입니다."(20대 총선 경남 창원성산 출마기자 회견 중)

그의 말을 전하며 오늘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오늘 새벽 첫 열차를 타고 창원으로 향해오면서 온갖 상념들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쳤습니다. 저의 생애 첫 직업은 전기용접사였습니다. 산업용보일러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당 5000원을 받는 용접공으로 사회에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노동법이 무시되고 인간 이하의 대접이 강요되던 현실을 고쳐보려고 전기용접 2급 기능사 자격을 취득하고 노동현장에 투신한 것입니다.

그 대가는 3년에 가까운 옥중 생활이었지만 한 번도 이를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그 후 10년에 걸친 천신만고 끝에 진보정당을 만든 것도, 두 차례나 국회의원이 된 것도, 국회의원직 박탈을 두려워하지 않고 '삼성 X파일'을 공개한 것도, 평생 한 우물만 판 것도 모두 한 가지 목표,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 사회를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향이 어디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합니다.

'노동자 서민의 땀과 눈물과 애환이 서려 있는 곳, 그곳이 나의 고향입니다.'"

* 노회찬재단은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과 함께 공동기획으로 12월 7일부터 31일까지 4주 동안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8편의 이야기 글 '노회찬과 한국 정치 여덟 장면 : 기록으로 톺아보기'를 선보인다.

[조현연 노회찬재단 특임이사]

Copyright © 프레시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